운동 중에 어떤 동작을 가장 좋아하세요? 라는 질문을 받아본 적 없지만 혼자 생각해둔 답은 있다. 일명 브이(V)자 자세. 먼저 매트에 바로 누워 두 다리를 쭉 편 상태에서 다리를 바닥에서 60도로 들어 올린다. 그 다음 머리와 어깨를 매트에서 들어올리고 올라왔을 때 다리와 평행할 수 있도록 양팔을 앞으로 쭉 편다. 이때 시선은 멀리 두고 목과 어깨 사이의 거리를 넓히면서 머리와 발끝으로 이어지는 몸의 선을 브이(V)자 모양으로 만든다. 이 동작을 좋아하는 이유는 다른 도구나 기구의 도움 없이 맨몸으로 할 수 있는 비교적 간편한 근력운동이어서다.
물론 처음부터 몸을 브이자 모양으로 만들 수는 없었다. 바닥에 닿는 부위는 엉덩이가 전부이고 나머지는 코어 힘으로 사지를 지탱해야 하는데 코어 힘이 부족해서 나의 다리는 자꾸만 바닥으로 힘없이 떨어졌다. 그러니까 코어 힘이 핵심이었다. 그런데 코어는 어디를 말하는가 ? 코어는 몸통 전체. 목의 시작에서부터 척추 끝까지다. 코어 힘이 받쳐주어야 팔다리를 온전히 뻗을 수 있고 30초동안 지탱할 수 있다.
마지막 버티고 하나, 둘, 셋!
이 동작을 처음 알려주셨던 운동 선생님의 구령 30초는 30분처럼 느껴졌다. 나는 구령을 떠올리며 버틸 수 있을 만큼 버틴다. 그렇게 버티다 보면 내 몸은 더 이상 내 것이 아닌 것처럼 각자의 의지대로 움직이기 시작한다. 팔다리가 부들부들 떨리면서 나는 떨림을 통제할 수가 없는 지경에 이른다. 버티기는 마지막 힘을 쥐어짜는 것. 마지막 한 방울을 짜내듯이 남아 있는 힘을 그러모아 버티기에 동원한다. 흔히 힘을 끝까지 쓸 때, 젖먹던 힘까지 동원한다고 말하는데 모유 수유를 하기 전까지는 ‘젖먹던 힘’은 단순한 수사에 지나지 않았다. 얼굴이 벌게지면서 땀을 뻘뻘 흘리며 젖먹는 아기를 보기 전까지는. 첫째 아이를 낳고 10 개월 가량 모유 수유를 했다. 갓 태어난 아기는 눈을 뜨기 전부터 빠는 법을 배운다. 자그마한 몸이 동원할 수 있는 최대한의 힘을 발휘하여 엄마의 품에 얼굴을 묻고, 그것이 유일한 생존법이라는 것을 본능적으로 아는 듯이.
젖먹던 힘을 발휘하여 최대한 버틸 수 있을만큼 버틴다는 말은 절박하게 들린다. 버티기가 필요한 시점은 운동의 처음이 아니라 맨 마지막이라는 것. 에너지로 가득 차 있을 때, 버티기는 불필요하다. 좋아하는 일을 하면서 버틴다는 말은 하지 않으니까. 하지만 좋아하는 일도 반복하다 보면 언젠가 권태가 오고 지겨워지고 버텨야 하는 순간이 오지 않나? 버티기는 꽤 괴롭지만 버티기 너머에는 무언가가 기다리고 있다. 그것이 무엇인지는 버텨봐야 안다. 나의 한계를 넘어섰다는 기쁨일지, 성취감일지, 아니면 또 다른 무언가가 버티고 있다는 새로운 앎일지 모르지만 최소한 다른 단계에 발을 내디뎠다는 느낌은 갖게 된다.
버티기, 하면 생각나는 동작은 플랭크다. 대표적인 전신운동으로 역시 코어 힘이 요구된다. 등, 허리, 힙이 일자가 되도록 몸을 곧게 펴고 양팔로 바닥을 누르면서 버티는 동작이다. 목 뒤부터 꼬리뼈까지 이어지는 척추 기립근의 힘으로 유지 된다. 몸의 중심축을 올바로 세워야 버틸 수 있는 플랭크 자세. 역시 버티기가 쉽지 않다. 힘이 소진되어 몸이 덜덜 떨리기 시작한다. 언제까지 버틸 수 있을까.
무너지지 마세요.
PT 선생님의 말이 귓가를 울렸다. 곧게 편 몸이 자꾸만 주저앉으려 하고 중심축이 아닌 팔에 힘이 들어간다. 그렇게 되면 엉뚱한 부위에 힘이 들어가서 운동을 잘못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까 브이자 자세와 마찬가지로 몸의 중심축이 충분히 버텨줄 만큼 힘이 있어야 한다. 힘이 부족하면 무너진다.
무너지지 마세요, 라는 말은 잔음이 되어 귀에서 맴돌며 내게 물었다. 몸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 코어 힘, 단단한 중심축이 필요하다면, 정신이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는 무엇이 필요할까? 부들부들 떨리는 몸 안에서 질문이 바깥으로 흘러나왔다.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 라는 책이 있다. 폴란드 장교 유제프 차프스키는 소련군에 포로로 잡혀 스타로벨스크 수용소에 수감되었다. 폴란드 귀족 가문의 자제로 태어나 법학과 미술을 공부한 차프스키. 그는 언제 풀려날지 모르는 상황에서 불안과 두려움을 극복 하기 위해 동료 장교들과 강의를 시작한다. 각자의 전공을 살려 역사, 건축에 대한 강의가 열린다. 차프스키는 폴란드 회화와 프랑스 문학을 강의한다. 그가 가장 깊은 애정을 품고 많은 빚을 진 작품이라고 고백하는 마르셀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에 대한 강의다.
수용소 차가운 방안의 현실과는 완전히 동떨어진 프루스트의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가 그들에게 대체 어떤 의미였을까. 어쩌면 의미는 중요하지 않은지도 모른다. 다만, 암담한 시간을 보내는 방법으로 그들은 프루스트를 소환한다. 포로들은 혹독한 추위 속에서 종일 일하고 돌아와 강의를 듣는다. 수용소의 차가운 방을 울렸던 프루트스 강의가 그들을 지탱해주었다.
시간을 버티게 하는 힘. 지적 노동이 중심축이 된 시간은 그들에게 ‘잃어버린 시간’이 아니라 ‘되찾은 시간’이 아니었을까? 자신만의 세계에 유폐되어 독립된 예술 세계를 추구했던 프루스트처럼, 프루스트 강의는 수용소에 유폐되었던 그들이 추구했던 인간다운 삶에 대한 존엄이었다.
가끔 생각한다. 내가 운동을 하고 책을 읽는 이유는 무너지지 않기 위해서라고. 일상에서 빈번하게 벌어지는 사소한 실망과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상실에 버틸 수 있는 힘을 위해서라고. 그러므로 운동과 책을 내 삶의 척추 기립근, 중심축이라고 말할 수 있을까. 여전히 힘이 부족해서 부들부들 떨리지만, 떨리면서 버틴다. 무너지지 않기 위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