첼로를 발레로 바꾸면
학교 도서관에 있길래 빌렸다. 일단 표지가 예뻐서 봤다. 역시 책은 표지가 중요하다. 그런데 작가 이름이 낯설지 않다. 얼마 전에 읽었던 <훌훌>의 작가였다. <훌훌>도 재밌어서 틈나는 대로 최대한 빨리 읽었던 책이다. <브릿지>도 그랬다. 오랜만에 종이책으로 읽었는데 내용이 재밌고 아주 길지 않아서 종이책 위 작은 글씨가 크게 불편하지 않았다.
이 책은 첼로를 전공하는 예고 2학년 여학생 인혜에 관한 이야기다. 당장 첫 페이지부터 '이거 우리 집 첫째 이야기네' 하며 몰입해서 읽었다. 첼로를 발레로 바꾸기만 하면 된다. 우리 집 첫째는 발레를 전공하는 예술중학교 2학년 학생이다. 치열한 경쟁, 선생님들의 평가와 평판, 학생들 사이의 질투, 다소 신랄한 비난 모두 거의 사실이다. 인혜는 냉혹한 평가와 경쟁 속에서 버티고 버틴다.
이게 내 길이 맞나? 내가 첼로를 좋아하기는 하는 걸까? 연주자로서 살 수 있을까? 아니면 뭐 하고 살지?라는 고민을 한다. 부족하지는 않지만 아주 부자는 아니라서 예중, 예고를 다니는 자신을 지원하는 부모님에게 미안하다. 아빠와 다투고 집안의 분란을 일으키는 남동생도 챙겨줘야 한다. 이제는 이런 역할도 지겨워진다. 돌아가신 할머니가 그립다. 할머니에게 잘해드리지 못한 게 미안하고 후회된다. 첼로 레슨을 위해 오고 갈 때마다 함께 한 할머니에게 짜증과 뾰족함을 그대로 드러냈었다.
이 책의 주인공 인혜와 우리 집 첫째(이하 '땡글이'이라고 칭하겠다. 땡글이라는 이름이 매우 귀엽게 느껴진다. 첫째 태명이다. 첫째는 여전히 땡글땡글하게 생겼지만 하는 짓은...... 하......)의 다른 점은 일단, 땡글이는 인혜처럼 '그럼에도 불구하고' 연습하러 가지 않는다. 레슨만 하지 따로 노력을 안 한 다는 것. 시간이 있을 때는 자기 방문을 잠그고 있는데 방 안에서 뭘 하는지 알 수가 없다. 알고 싶지도 않다. 보통은 잠을 자거나 핸드폰을 하는 것 같은데 그렇다면 차라리 다행이다.
인혜처럼 집안의 해결사이자 성숙한 큰 딸도 아니다. 우리 집은 땡글이 덕분에 창문과 현관 밖으로 험한 소리가 나가기도 한다. 사실 나도 땡글이와 발레 '덕분에' 많이 지친 상태다. 학교 선생님들에게 좋지 않은 이유로 여러 번 전화받는 것도 괴롭다. 부끄러워서 어디다 말 못 할 일도 몇 번 있었다. 자식 자식 욕은 내 얼굴에 침 뱉는 격이므로 여기서 줄이기로 한다.
<브릿지>는 소설이기 때문에 극적인 만남과 인연이 있다. 나는 현실이 소설이나 영화보다 더 가혹하다고 생각한다. 엄정현선생님, 할머니, 연수, 인혜의 관계는 역시 소설에나 있을 법한 일처럼 보인다. 앞서 말한 것처럼 현실은 소설이나 영화보다 가혹해서 엄정현선생님과의 화해나 연수와의 친밀함은 실제로는 없을 것 같다. 엄정현선생님은 원래 그렇게 막말하는 사람이고, 연수는 여전히 질투의 대상일 것이다.
할머니가 돌아가시는 날 할머니로부터 인혜에게 전화가 왔고 인혜는 그 전화를 일부러 받지 않았다는 설정은 완독 한 바로 다음날 <미지의 서울>에서 또 보게 되었다. 미지를 대신하는 미래와 친해진 전직 투자회사 대표도 할아버지로부터 두 번이나 전화가 왔는데 받지 않았다. 그리고 할아버지가 돌아가셨다. 이건 극적인 변화나 아픔 같은 것을 표현하는데 쉽게 쓰이는 설정이 아닌가 하는 의심이 든다. 이거 빼면 다 좋았다. 땡글이에게도 읽어보라고 권했다. 첫 다섯 페이지 정도 읽고 바로 땡글이에게 말했다.
"이번 방학에 책 한 권 정도는 읽어야 하지 않니? 이거 읽어봐"
"무슨 내용인데요?"
"읽어보면 알아"
작가의 말을 보니 이야기 속에 작가의 삶이 녹아있는 것 같았다. 저자는 '에라, 모르겠다' 잘 살아 봐야지 어쩌겠냐고 말한다. 그렇다. 잘 살아봐야지 어쩌겠나. 저자는 묻는다. <브릿지>가 괜찮았냐고. 완전 괜찮다. 문경민 작가의 다른 소설도 밀리의 서재에 담아놓고 방학 때 읽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