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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작은꽃 Oct 06. 2024

내 아이가 남을 도울 때

어찌 됐든 남을 돕는 것은 좋은 일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어느 반에나 유난히 남을 잘 돕는 아이가 있다. 학부모와 상담할 때 나는 ‘아이가 어쩌면 그렇게 착하고 다른 사람을 배려하느냐, 정말 훌륭한 아이다’라고 그 아이를 폭풍칭찬한다. 그러면 부모님은(주로 어머님들과 상담하므로 이하 어머님이라고 하겠다) ‘아휴… 착해서 걱정이다. 자기 것 못 챙길까 봐’라고 한다. 남 도와주느라 자기 할 일 못 할까 봐 걱정이라는 것이다.  


  남을 배려하는 일은 분명 좋은 일이지만 엄마 입장에서는 걱정이 될 수도 있다. 남만 챙기느라 자기 것은 못 챙길까 봐, 너무 착하기만 해서 다른 아이한테 이용당할까 봐, 다른 아이들 거 해주느라 자기는 할 일도 제대로 못할까 봐 걱정하는 것이다. 내 아이들이 담임 선생님께 그런 종류의 칭찬을 받아보지 못했으니 칭찬을 받고도 걱정하는 어머님의 심정을 정확히 알지는 못할 것이다. 하지만 어떤 마음일지 짐작은 간다. 나도 내 아이 담임 선생님이 그런 칭찬을 하신다면 마냥 좋지만은 않을지도 모른다. 담임 선생님께 이렇게 물어볼 것 같다. “선생님, 그런데 우리 애가 자기 할 일은 제대로 하나요? 자기 할 일도 제대로 못 하면서 남만 도와주는 건가요?” 실은 나 같은 경우, 자기 할 일 못하고 다른 아이들만 도와주고 다닐까 봐 걱정이라기보다는 남을 도와줄 능력이 안 될 것 같은데 그게 가능할까 싶은 것이다. 자기 할 일에 어설픈 사람이 남을 도울 수는 없으니 말이다. ‘우리 집 애들이 남을 도울 정도가 되나?’ 


  내가 남을 돕는 아이를 칭찬할 때는 자기 할 일을 제대로 하는 것을 전제로 한다. 내 것부터 하고 어려움을 겪는 친구를 도와주는 게 맞다. 남을 위하는 일이 독립운동이라도 자신과 가족을 희생시키면서 하는 것은 글쎄… 꼭 잘하는 일인지 잘 모르겠다. 나와 내 가족은 쫄쫄 굶고 있는데 밖에 나가서 선교활동하고 자선사업 하는 사람들도 있는 것 같다. 아무리 훌륭한 자선사업이라도 자기 가족 내팽개치고 하는 일이라면 그게 무슨 큰 의미일까 의심스럽다. 일단 자기 할 일부터 해놓고, 자기 식구부터 챙기고 남을 돕든지 독립운동을 하든지 해야 하는 거 아닌가? 그러니 내가 하는 칭찬은 당연히 자기 일 잘하면서 남까지 돕는 경우를 말한다. 


  자기 할 일도 못 하면서 남을 돕는 것은 칭찬할 일이 아닐뿐더러 무엇보다 자기 일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이 남을 도울 수는 없다. 수학익힘책을 풀어야 할 때, 문제를 풀지도 못하는 사람이 남에게 가르쳐 줄 수는 없다. 그림을 그려 내야 한다면 자기 그림부터 완성하고 시간이 오래 걸리고 어려워하는 아이를 도와줘야지 자기 것은 하지도 않고 남을 도울 수는 없다. 그건 돕는 것이 아니라 그냥 오지랖이 넓은 거라 생각한다. 도움 받는 사람 입장에서도 그렇다. 자기 일도 제대로 못하는 사람에게 도움을 받고 싶지는 않을 것이다. 도움 받는다고 느끼지도 못할 것이다. 


  그런데 자기 할 일을 잘하고 남을 도울 경우라도 그 아이가 내성적이라면 어머님들의 걱정이 깊어진다. 어머님들이 남을 잘 도와주는 자신의 아이를 걱정하는 경우, 대부분 그 아이들은 내성적이다. 내 아이가 다른 아이들한테 이용당할까 봐, 하기 싫은데 말도 못 하고 해주는 것일까 봐. 야, 내 것도 해줘, 나도 해줘, 왜 나는 안 해줘, 이럴까 봐. 그런 상황도  생길 수 있다. 어떻게든 남을 이용해 먹으려는 사람은 언제 어디에나 있으니까. 그런데 대부분의 경우 아이들은 적극적으로 남을 돕는 아이를 무시하지 않는다. 무시가 웬 말인가. 오히려 인정한다. 마음속으로 그 아이에 대한 호감과 존중의 마음을 가지고 있다. 그래서 남을 돕는 사람을 함부로 하지 못한다. 아이들도 다 안다. 특히 그 아이가 선생님에게 인정받고 반듯한 아이라면 더욱 그렇다. 그 아이가 말수가 없고 조용해도, 내성적이라도 함부로 하지 못한다. 


  내성적이라 하면 자기가 부당한 대우를 받아도 한마디 말도 못 하고 그저 계속 남 좋은 일 하면서 속앓이를 하는 모습을 상상할 것이다. ‘내성적’이라는 말을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겉으로 드러내지 아니하고 마음속으로만 생각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기분이 안 좋아도, 남이 나를 이용해도 겉으로 드러내지 못하고 마음이 상하거나 실질적 피해를 입게 되는 것, 그런 것이 내성적인 것 아니냐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한편으로 내성적이라는 것은 자신의 생각과 의견을 속으로 가다듬어 적절한 시기에 적절한 상황에서 말하고 행동하는 성향이기도 하다. 평소 신중을 기하던 사람이 적절한 상황과 시기에 내는 의견과 행동이 더 신뢰받는다. 


  H는 5학년 때 내가 담임했던 아이다. 조용하고 내성적인 아이였지만 학급 임원이었고 다음 해 전교 임원이 되었다. 이 아이는 내가 생활통지표 종합의견에 ‘남을 돕는 모습에서 감동이 느껴짐’이라고 썼다. 진심으로 그렇게 느꼈다. 반듯하고 선한 마음을 가지고 있으며 미래가 기대된다고도 했다. 이런 아이가 정치인이 되어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H는 말 그대로 나에게 감동을 주었다. 한 아이가 교실에서 갑자기 코피를 아주 많이 흘렸다. 피가 줄줄 흘러서 책상과 바닥에 뚝뚝 떨어졌다. 그때 H가 벌떡 일어나 그 피를 닦았다. 근처에 앉아 있던 아이 한 명도 H와 함께 닦았다. 그 모습에 나는 충격을 받았다. 함께 코피를 닦는 두 아이를 보면서 뜨끔했다. 나보다 더 빨리 반응했기 때문이다. H는 옆에 앉은 친구가 코피가 나면 바로 휴지를 갖다 주며 닦으라고 내민다. 주저함이 없다. 이런 상황에서 보통 아이들의 반응은 그냥 쳐다보거나, "어! 코피 난다!"라고 외치거나, "선생님, 얘 코피 나요."라고 한다. 그럼 나는 "어!" 하면서 휴지를 가지고 급히 다가간다. 부끄럽지만 솔직히 말하자면 나는 그런 상황에서 ‘으……피……’하면서 움찔한다. 내 피도 무서운데 남의 피는 더 무섭다. 아이 셋을 키우며 다양한 배설물에 대처하느라 많이 단련되었다고 생각했는데 여전히 ‘어떡하지’라는 생각이 가장 먼저 스친다. 이제는 의젓한 척하며 피를 닦아 주고 보건실에 데려다주지만 여전히 나에게는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H는 성큼 다가간다. 


  H는 아이들이 하기 싫어하는 먼지 많은 곳 청소도 열심이고 준비물이 없는 친구에게 자동적으로 자기 것을 내민다. 그냥 몸에 배어있는 듯하다. 어느 날, 반 아이들이 책상을 모두 뒤로 밀고 바닥에 앉아서 영상을 시청하고 있었다. 그때 한 여자아이가 갑자기 허둥지둥 교실 밖으로 나갔다. 아이의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라서 따라 나가니 화장실에 가겠다고 했다. 다 큰 여자아이가 혼자 급히 화장실에 가는데 더 물으면 싫어할 것 같아 다녀오라고 하고 교실로 들어왔다. 한 아이가 “선생님, 바닥에 물이 있습니다!” 하고 외쳤다. 화장실로 달려간 아이가 앉아있던 바닥에 물이 흥건했다. 정황상 그 여자아이가 소변 실수를 한 것으로 보였다. 그때 아이들 모두 어안이 벙벙했다. 나도 그랬다. 태연한 척하려고 했지만 티가 났을지도 모른다. “누가 물을 흘렸나 보네…….”하면서 화장지를 뭉쳐서 닦으려고 하니 H가 벌써 두루마리 화장지를 가져와 그 물을 닦고 있었다. 몇몇 아이들은 “그런데 중요한 건 물이 노랗다는 거야.”, “물인지 다른 건지 모르지…….”라며 자기들끼리 키득거렸다. 나는 못 들은 척하고 “여러분, 물통 좀 잘 잠급시다. 가끔 물통에서 물이 새서 가방까지 젖을 때가 있어요.”라고 말하며 바닥에 물을 닦았다. 


  사실 그 물은 물이 아니었던 것 같다. 정황상 누구나 알 수 있었다. H는 그것을 알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그 물을 닦았다. 나는 나보다 한참 어린아이에게 경외감을 느낄 수도 있다는 것을 알았다. 나라면? 과연? 저 나이에? 애 셋을 키워본 나에게도 누군가의 소변을 닦아야 하는 것은 여전히 결코 나서서 하고 싶은 일이 아니다. 그런데 저 아이는 뭐지?


  H의 어머님과 통화할 때 H의 이런 부분을 격하게 칭찬했다. 어머님 도대체 아드님을 어떻게 키우신 겁니까? 어떻게 하면 이렇게 훌륭하게 자라는 겁니까! H의 어머님은 아이가 그동안 그런 칭찬을 많이 들었으며 천성이 착한 아이라고 하셨다. 한 번은 비가 오는 날 하교하는데 친구가 우산이 없으니 친구에게 우산을 주고 H는 비를 맞고 왔다고 하셨다. 그러면서 자기는 비 맞고 오면서 친구한테 우산을 주는 것이 맞는 건지, 자기 것도 제대로 못 챙기고 남만 챙기다가 자기 할 일 제대로 못하는 것은 아닐지 염려하셨다. 하지만 한 발짝 물러선 담임교사의 입장에서는 조금 다르다. 아주 훌륭한 아이다. H는 예의 바르고 몸가짐이 단정하고 수업태도도 좋고 공부도 열심히 한다. 쉬는 시간에 혼자 뭘 열심히 하고 있길래 뭐 하냐고 물어보니 학원 숙제가 많아서 하고 있다고 했다. 아이들에게도 친절하다. 학급과 전교 임원으로 뽑혀 친구들에게도 인정받고 있었다. 


  혹여 자기가 조금 손해를 보더라도 같은 교실에서 공부하는 친구에게 양보하고 배려하는 것이 걱정할 일이라고 보지 않는다. 사실은 전혀 걱정할 일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오히려 대단한 일이다. 그렇게 하기가 굉장히 어렵기 때문이다. 사람은 이기적이다. 나쁜 게 아니라 그냥 그렇게 생긴 것이 인간이다. 그런데 그런 인간의 본성에 역행하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인가. N은 옆반 선생님이 2학년 담임하던 해 만난 아이였다. N은 대변 실수를 한 같은 반 친구가 어쩔 줄 모르고 울고 있으니 친구의 밑과, 변이 묻은 변기를 닦아 주었다. N은 평소 내성적이고 예의 바르고 공부도 잘하고 모두가 인정하는 인성이 훌륭한 아이라고 했다. 어떤 말썽꾸러기와 같은 반이 되어도 N은 마음으로 친구를 감싸줄 수 있는 아이라고 했다. 이런 모습을 아이에게서 보았다면 이 아이는 이타심과 배려라는 재능을 가지고 태어났다고 볼 수 있다. 그런 귀한 재능을 계속 유지하고 발전시켜야 한다고 본다. 


  내가 남 좋은 일 해주느라 조금 손해를 본다면 그것은 언젠가 반드시 나와 내 주변 사람들에게 좋은 것으로 돌아온다고 생각한다. 내 아이가 남을 도울 때 너무 착하기만 한 것 같아 걱정이 된다면 이렇게 생각하면 어떨까? 내가 조금 밑지는 기분이 들어도 남에게 친절을 베푼다면 이것은 ‘나중에 좋을 일 통장’ 같은 것에 저축을 하는 일과 같은 것이라고.  비록 넘어진 아이를 일으켜 세워주느라 달리기 시합에서 꼴등을 한다고 해도 남을 돕는 일은 분명히 좋은 일이다. 다시 한번 강조하지만, 자기 앞가림도 제대로 못하면서 남한테 퍼다 주라는 말이 아니다. 내 할 일도 하면서 남을 도울 수 있을 때 적극 돕는 것은 마땅히, 지극히 좋은 일이다. 내 아이가 남을 돕는 일에 앞장선다면 자랑스러워하셔도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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