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사는 나름대로 인플루언서
교사가 된 후에도 내 마음 한 구석에 ‘학교 선생님은 시시한 직업’이라는 마음이 살아있었다. 돈 많이 벌고 사회에서 인정받고 명함 딱 내밀면 ‘오~’하고 알아주는 그런 직장에 다니고 싶었다. 의사나 변호사나 메이저 신문 기자나 방송국 PD, 적어도 이름만 대면 아는 대기업 사원 같은 그런 직업을 갖고 싶었다. 불과 얼마 전까지 그랬었다. 특히 경력이 조금 쌓이고 주식이 잘 나가던 시절에는 ‘이까짓 거 하기 싫으면 그만 두지’라는 마음이 상당히 컸다. 몰아치는 업무와 예의 없는 아이들, 오직 내 새끼만 감싸는 학부모, 아직도 권위적인 일부 관리자와 꽉 막힌 동료교사, 낮은 급여, 교사를 은근히 깔보는 사람들의 인식이 두드려져 보였다. 이걸 꼭 해야 하나? 내가 원했던 것도 아니잖아? 길게 할 일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투자 잘해서 돈 많이 벌고 학교는 슬슬 다니고 싶었다. 아니면 그만두던가.
과거에 했던 생각이 지금도 꼭 틀린 것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어떤 직업이든 그만둘 수 있는 자의적, 타의적 이유가 생길 수 있다. 나를 지켜줄 백업플랜도 필요하다. 그런데 지금은 그만두고 싶은 생각이 많이 사라졌다. 발령 18년 차를 맞는 올해, 휴직과 복직을 반복하고, 투자해서 돈도 벌어보고 망해도 보고, 애를 셋 낳고 키우는 시간을 거쳐 오며 내 생각이 꽤 바뀌었다. 직업의 소중함을 알게 되어서 그런 건지, 새로운 학교와 새로운 환경에서 일하게 되어서 그런 것인지, 아니면 잘 나가던 나의 주식계좌가 꼬꾸라져서 그런 것인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겠다. 요즘에서야 이 직업 자체에 대해 다른 생각이 들었다. '이 직업은 의미가 있다'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1년 동안 거의 매일 만나는 반 아이들과 교사는 서로 큰 영향을 미친다. 아이들과 교사가 합이 잘 맞는다면, 아이들이 순수하고 교사가 긍정적이고 유연한 사고방식을 가졌다면, 그 1년은 서로가 좋은 에너지를 주고받는다. 그때 교사는 자신의 사고방식과 행동에 바탕을 둔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다.
3학년 우리 반 반티 색깔을 고를 때였다. 여러 가지 색깔 중 아이들이 가장 선호하는 색깔은 하늘, 하양, 검정이었다. 하늘색은 다른 반이 이미 선택해서, 검은색은 눈에 잘 안 띄어서, 하얀색 역시 눈에 안 띄고 쉽게 더러워질 수 있으니까 등의 이유로 결정이 쉽게 나지 않았다. 결국 우리가 다수결로 고른 색깔은 ‘분홍’이었다. 그때 이런 말이 나왔다. “남자가 분홍을 입는다고?” 나는 그 말이 낯설게 느껴졌다. ‘요즘에도 아이들이 이런 생각을 하는구나’ 요즘 아이들은 좀 다를 거라 기대했었다. 성별에 따라 색깔을 나누는 것은 나 어렸을 때나 하던 것인 줄 알았다. 아이들이 성별에 대한 편견을 갖고 있지 않기를 바랐다.
반티 색깔에 대해 아이들끼리 짧은 논쟁이 있었다. "야, 남자도 분홍 입을 수 있어!", "분홍이 어때서?"라는 의견이 다수였다. 하지만 일부 분홍반대파는 민망한 듯 웃으며 “분홍을 입는다고……”라며 남자는 분홍을 입을 수 없다고 못마땅해했다. 반티가 교실에 도착하여 아이들에게 배부하던 날이었다. 아이들은 신나서 반티를 지금 입어 봐도 되냐고 물었다. 그러자고 하고 나도 겉옷에 껴입어보았다. 그날도 작은 소리로 “으악… 분홍이라니!”라는 말이 들렸다. 나는 아이들에게 이렇게 말했다. “입으니까 더 예쁘네. 인물이 훤 해졌어. 우리 잘 고른 것 같은데요!” 한 아이가 뒤이어 내 말에 힘을 실어줬다. “남자는 분홍이지!” 작은 논쟁이 있었지만 아이들이 분홍색 반티를 입고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나도 기분이 좋았다. 그 후로 아이들은 아무렇지 않게 분홍색 반티를 잘 입고 다녔다. '남자는 분홍이지', '남자가 분홍 입으면 뭐 어때서?'라고 말해준 아이들이 대견했다. 나는 초등학교 때 저런 말할 줄 몰랐는데……. 한 수 배웠다.
어느 날, 소변검사 안내장을 배부했다. 학교에서 관련 기관과 함께 아이들의 신장 이상 여부를 조사하기 위해 실시하는 것이다. 아무래도 아이들에게 불편한 일이다 보니 여기저기서 탄식과 질문이 나왔다. 이거 손에 묻으면 어떡하냐, 막대기에 묻히는 거 해봤는데 묻히라는 데 묻혀야지 다른 데 묻히면 안 된다, 화장실에 애들 많이 몰리겠다 등. 그중에서 단연 모두의 관심이자 궁금증은 이것이었다. 한 남자아이가 말했다. “남자는 편한데 여자애들은 어떻게 해?” 이 말로 인해 다시 시끄러워졌다. "진짜 여자애들은 어떻게 해?" "손에 묻는 거 아니야? 옷에 묻는 거 아니야?" 주로 남자아이들이 큰 소리로 말하고 여자아이들은 듣고 있었다. 더 얘기하다가는 수업을 시작할 수 없을 것 같아 내가 말했다. 다 하는 방법이 있으니 걱정하지 말라고, 걱정해 주는 것은 고맙지만 이것은 집에서 더 자세하게 얘기하는 게 좋겠다고 했다. 그때 한 남자아이가 말했다. “남자는 고추가 있는데, 여자는 고추가 없어서 힘들지 않나요?”
여자와 남자의 신체구조상 소변검사 할 때 여자가 좀 더 불편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남자는 있고, 여자는 없다고 말하는 것은 여성의 성기와 신체에 대해 결핍의 이미지를 심어줄 수 있다. 남자는 있고 여자는 없다고 말하는 것은 있어야 하는 데 없다고 하는 부정적인 의미를 내포한다. 나는 아이들에게 말해주었다. 남자에게는 있고 여자에게는 없는 것이 아니라 여자와 남자 모두에게 성기가 있는데 다르게 생긴 것이라고. 그리고 '고추'라는 표현보다는 '음경'이라고 말하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사고는 언어를 지배하고 언어는 다시 사고를 지배한다. 우리가 아무 생각 없이 쓰는 말 중에 누군가에게는 상처가 되는 말이 있다. 그래서 나는 아이들이 최대한 순화된 언어를 사용하기를 바란다. 예를 들어 ‘결정장애’ 같은 말이다. 교사는 그 말의 무엇이, 왜 잘못되었는지 말해줄 수 있다. 그 이면의 뜻까지 이해하면 아이들은 그 말을 잘 쓰지 않는다. 『은유의 글쓰기 상담소』에서는 이렇게 말한다. 보통 부족함이나 열등함을 표현하는 관용구에 ‘장애’라는 단어가 들어가는데 그런 관념이 담긴 표현을 쓰다 보면 장애인을 열등한 존재로 여기는 무의식이 강화된다는 것이다.
장애인 이해 교육을 할 때 시각장애인 안내견과 시각장애인의 하루를 영상으로 보았다. 시각장애인 안내견은 법적으로 대중교통, 식당, 숙박시설, 공공기관에 들어갈 수 있다. 정당한 사유 없이 이를 거부할 시 300만 원 이하의 과태료가 부과된다. 그러나 영상 속에서 대부분 식당은 다른 사람들이 싫어한다는 이유로 안내견과 시각장애인이 함께 들어오는 것을 거부했다. 영상을 본 아이들은 어이없다며 흥분했다. 내가 식당을 차려서 안내견이 들어올 수 있도록 하겠다, 식당 주인을 혼내주겠다, 불매하겠다고 말하며 식당 주인이 나쁘다고 말했다.
시각장애인 안내견의 출입을 거부한 것은 업주의 분명한 잘못이다. 하지만 식당 주인이 안내견을 들어오지 못하게 하는 이유는 그 안에 있는 사람들, 즉, 우리같이 밥 먹으러 식당에 간 일반 사람들 때문이기도 했다. 식당에서 밥 먹는 손님들이 싫어하기 때문에 가게 주인은 안내견이 들어오지 못하게 한 것이다. 나는 식당 주인을 탓하기 전에 우리부터 달라져야 한다고 지도했다. 우리부터 안내견이 식당에 들어오는 것을 당연하게 받아들여야 한다고 말이다. 식당주인도 잘못이 있지만 우리의 인식이 바뀌어야 식당주인도 손님 눈치 보지 않고 안내견을 받을 수 있다. 아이들은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우리가 집에 가서 오늘 배운 것을 부모님께 말씀드리고 함께 실천할 수 있어야 한다고도 덧붙였다.
초등학교에서 교사와 학생은 일주일 중 5일을 만나고 평균적으로 약 5시간 정도 같은 공간에서 생활한다. 밥도 같이 먹는다. 가족보다 오랜 시간을 함께 한다. 초등학교는 사고방식과 습관이 형성되는 중요한 시기다. 그렇다 보니 교사와 학생의 상호작용은 매우 중요하고 영향력이 크다. 교사가 무엇인가 영향을 미치고자 한다면 충분히 그렇게 할 수 있는 조건이 된다. 매일 텀블러를 가지고 다니며 물을 마시는 이유를 말해줄 수 있다. 선생님은 플라스틱병에 든 음료를 잘 사 먹지 않는다고 말하면 아이들은 왜냐고 묻는다. 그럼 그 이유를 말해줄 수 있다. 미세플라스틱이 나와서 건강에도 좋지 않고 썩지 않는 쓰레기가 나오는 것이 싫어서 그렇다고. “선생님은 왜 맨날 똑같은 옷만 입어요?”라고 물으면 옷이 없어서 그렇다고 말한다. 왜 옷이 없냐고 물으면 나는 '선생님은 아무거나 입어도 예쁜데 뭐 옷을 굳이 사냐'고 대답한다. 그리고 옷을 잘 사지 않는 이유도 말해준다. 옷을 만들고 파는 과정에서 노동력이 착취되고 환경이 오염된다는 것을 알려준다. 무분별한 소비가 가계, 기업, 사회에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도 간단하게나마 설명한다. 신문에 황당한 교통사고 소식이 난 것을 보면 아이들에게 전해준다. 교통안전의 중요성에 대해서 지도하는 동시에 우리가 이렇게 매일 얼굴을 마주하고 공부할 수 있는 것이 얼마나 감사한 일인 지도 말해줄 수 있다.
교실에서 아이들이 “선생님이 그렇게 하라고 하셨잖아.” "선생님이 이건 하지 말라고 하셨잖아." 하는 말을 가끔 듣는다. 이 말을 처음 들었을 때 신선하면서도 당황스러웠다. 내가 뭐라고 내가 하라는 데로 하는 거지? “선생님이 말하고 싶으면 손들고 기다리라고 하셨잖아.”, “야, 다른 사람 말도 들어야지!” 내가 평소에 자주 하는 말을 아이들이 자기들끼리 한다. 내 말도 중요하지만 일단 상대의 말을 충분히 듣고 그 사람 말이 다 끝나면 자기 말을 시작하라고 여러 번 강조했다. 내 의견도 중요하지만 다른 사람의 말도 충분히 들으며 자기 차례를 기다리는 연습이 아이들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긍정적이든 부정적이든 교사는 분명히 학생들에게 영향을 미친다. 아이들의 언어 사용과 사고방식, 행동에 작은 변화를 일으킬 수 있다. 완전한 변화는 아니더라도 작게나마 그 시작을 충분히 만들어낼 수 있다. 물론 아이들과 교사 사이에 래포(rapport)가 있을 때 가능한 일이다. 이런 조건을 갖추는 것이 말처럼 쉽지 않다. 사실은 어렵다. 어렵더라도 해볼 만한 일이고 가치 있는 일이다. 서로 신뢰하는 관계에서 아이들이 교육을 받는다고 생각하면 희망 같은 것이 느껴진다. 교사 한 명이 3년에 한 번이라도 변화를 이끌어낸다면? 이 아이들이 자라서 좀 더 상식적이고, 책임을 동반한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사회를 만들 수 있을지 않을까. 내가 교사로서 조금이나마 역할을 할 수 있다는 것이 뿌듯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