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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모운 Nov 20. 2020

새끼손가락

2년 전, 왼손 새끼손가락이 골절됐다. 주짓수를 하다가 바닥을 잘못 짚는 바람에 '빠각' 소리와 함께 시간이 멈췄다. 의사는 제대로 관리하지 않으면 수술을 해야 할 수도 있으니 불편해도 깁스를 꼭 하라고 했지만, 촬영 때나 밥을 먹을 때에도 자주 깁스를 풀곤 했다. 뼈가 붙지도 않았는데 멀쩡한 손가락인 척 연기를 해야 하는게 위기였지만 그래도 잘 넘겼다.  5주가 지나고 병원에 가서 깁스를 푸니 손가락 마디는 엄지처럼 두꺼워져 있었다. 의사는 깁스를 푼 시간 동안 뼈가 주저앉아 두껍게 굳었다고 했다. 모양을 이전처럼 하고 싶으면 다시 부러뜨린 뒤에 붙이는 방법도 있다고 했지만 괜찮다고 하고 병원에서 나왔다.   그 뒤로 내 왼손은 주먹에 틈이 생겼다. 새끼손가락이 다른 손가락과 접히는 각도가 달라져 완전히 주먹을 쥐면 새끼손톱만 다른 곳에서 논다. 그렇게 나는 아픈 손가락을 하나 갖게 되었고 이것 때문에 연기를 하는데 문제가 생기는 건 아닌가 걱정하고, 괜히 위험한 운동을 해서 스스로 병신이 되었나 자책했다.  손이 잡히는 연기를 해야 할 때면 긴장했다. 손을 뻗는 장면에서는 은근슬쩍 손가락을 구부리면서 손을 뻗고, 카메라 방향에 따라 새끼를 가릴 수 있게 각도를 조정했다. 탈 없이 촬영이 끝나고 나서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놈의 운동을 왜 해가지고 밥벌이를 하러 갈 때마다 이 걱정을 하면서 살아야 하는지 화가 났다. 촬영이 끝나고 며칠 뒤, 이런 하소연을 하며 지인에게 내 손가락을 보여주자 그는 자신의 주먹을 보여주며 굴곡이 없는 손 허리뼈(주먹을 쥐면 튀어나오는 손가락 끝의 뼈)를 보여주었다. "몰라. 원래 이랬어. 그래서 애들이 쉽게 세던 월(月)도 손으로 못 세." 왜 그렇냐는 내 질문에 그의 답은 간단했다. 별로 신경 쓰지 않고 살아왔고, 내가 먼저 말하지 않으면 딱히 누가 먼저 묻지도 않는다고. 게다가 월도 손으로 못 센다는 조크를 더해가며.  시간이 제법 흐르고 이제 다른 손가락들을 덜 구부려 새끼손가락과 같은 위치로 주먹을 쥘 수 있는 노하우가 생겼다. 연기 할 때 자연스럽게 새끼를 구부려 가릴 줄 알고, 운동 탓에 생긴 골절이라고 당장 그만두었던 주짓수도 다시 다닌 지 반년이 넘었다. 물론 아직도 팔씨름을 하거나 도복을 잡거나 하면 힘주기가 어렵다. 하지만 팔씨름 못 하면 어떻고, 도복 조금 덜 세게 잡으면 어떤가. 막상 제일 불편한 건 모기를 잡으려고 주먹을 꽉 쥐면 새끼손가락 사이 틈으로 모기가 빠져나간다는 것이다. 그리곤 '이제는 모기 하나 못 잡는 왼손잡이가 되었군' 하고 웃는다.  생각해보면 꽤나 많은 단점들을 보완하며 살아왔다. 어려서부터 체구가 작아 무시당하기 일쑤라 힘을 엄청 키웠는데, 덩치 큰 친구들이랑 씨름을 해도 밀리지 않을 만큼 악바리로 버텼고, 힘이 약한 대신 재빠르게 움직이는 법을 익혔다. 공부에 흥미가 없는 대신 예체능을 좋아해서 뽐낼 만한 무대가 있으면 어디든 나가 재롱을 부려 모범생보다 예쁨 받았다. 1등을 해보지 못하는 대신 무엇이든 4,5 등 하는 아이로 자라났다. 똑 부러지게 잘하는 건 없지만 무엇을 시켜도 못하지 않는 사람으로.  지나고 보니 이런 것들은 모두 생존에 관련된 문제였다. 부족한 사람이 되지 않기 위해서 남들이 할 수 없는 부분에서 노력해왔다. 잘하는 것들만 앞에 내세우고 못하는 것들은 뒤로 숨겼다. 괜찮은 사람이 되기 위해서 좋은 부분만 보여주려고 했다. 하지만 어떤 부분에서는 회의감이 든다. 단점이나 치부가 들통났을 때 빨개지는 내 얼굴이 싫었다. 그걸 수습하려고 이런저런 핑계를 대던 자신을 돌아보면 귀까지 빨개진다. 그래서인지 어느 순간부터 나는 단점을 애써 숨기려고 하지 않는다. 고등학교 1학년 수리 문제도 못 풀지만 소설은 여느 대학원생보다 많이 읽었고, 키는 좀 작지만 이병헌만큼 연기를 잘하면 되지 않을까.  누구나 상처는 있다. 외적이든, 내적이든 상처라는 것은 보여주기 쉽지 않다. 그것을 내보였을 때 다가오는 타인의 불편한 연민과 상처를 회고하면 떠오르는 근심, 앞으로도 지워지지 않을 흉터.  하지만 그 상처를 치료하는 동안 다른 부분들이 더욱 건강해진다. 아파하는 내 일부를 구하기 위해. 이 흉이 내 존재를 낮추지 않게 하기 위해. 날개가 아파 자주 날지 못하는 호수 위의 백조는 발을 더욱 열심히 구른다. 거북이는 느리지만 강한 파도에도 밀려나지 않게 땅을 힘차게 디딘다. 누구나 아픈 손가락 하나는 갖고 살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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