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반기를 시작하며

2020 하반기를 시작하면서 드는 단상들

by 주모운

1

출간회를 한 지 보름이 지나고 삼백 권이 넘는 책을 팔았다. 예상보다 많이 팔았지만 아직도 집에 수북이 쌓인 책들을 보면 앞으로 갈 길이 멀다.

책 한 권의 값이 내 소비의 기준이 되었다. 4년이라는 시간 동안 적어온 내 글의 가치만큼, 식당에서 내어주는 요리나 수많은 과정을 거쳤을 물건들이 지닌 가치를 생각한다.

책 한 권은 손바닥 한 뼘의 크기지만 깊은 고민이 새겨져 있고, 삼십 분이면 해치울 접시 위의 요리도 오랜 시간의 연구가 담겨 있다. 과정을 무시하고 눈 앞에 놓인 것만 생각해서는 내가 쓰는 돈도 가치를 잃는다.


2

분리수거를 잘해보려고 노력 중이다. 공병은 물로 헹궈서 뚜껑과 분리하고, 플라스틱은 라벨이나 포장지를 벗기는 과정을 반복하다가 치약 앞에서 두 손을 들었다. 뚜껑을 제거하고 칼로 치약을 자른 뒤 안을 솔로 깨끗이 닦다 대체 내가 뭘 하고 있는 건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이천 원짜리 치약을 제대로 쓰고 버리려면 이런 과정을 거쳐야 하는구나. 인간은 너무 많은 걸 쓰고 버리며 살아가고 있구나.

매번 꼼꼼히 분리수거를 할 순 없겠지만 버릴 때마다 지구 생각 한 번은 하고, 살 때마다 치약 생각 한 번은 할 것 같다.


3

사람들이 나보고 뭐가 그렇게 바쁘냐고 한다. 나는 오늘 당장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은 없지만 오늘도 하지 않으면 안 되는 일을 한 가득 안고 사는 사람이다. 매일매일 해야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들을 쌓아두고 미션을 깨듯이 해치운다. 그러다 어느 날 갑자기 불쑥 떠나기도 하고 며칠을 멍만 때리기도 하다 보면 어쩔 수 없이 할 일이 항상 쌓여있다. 스스로 야근을 만들고 휴가를 주기도 하는 프리랜서의 삶이란 그런 것이다. 대단한 성과 없이도 매일을 바쁜 일과로 가득 채우다 과로로 쓰러지기도 하는 백수의 삶.


4

책을 한 권 냈으니 책을 다 팔 때까지 쉴까 싶기도 했지만 또 하나의 프로젝트를 시작했다. 내가 감독을 하진 않겠지만 한 편의 영화를 만들 것 같다. 주변에 영화를 만드는 사람들이 많으니 딱히 새로운 일은 아니다. 제작과 시나리오를 겸임하고 연기까지 할 것 같은데 어떤 영화가 될지는 미지수다. 초저예산의 소규모 모험이라는 사실은 정확하다.

이미 단편영화를 만들어 한 번 망쳐본 경험이 있기 때문에 딱히 두려움은 없다. 생각보다 못 미칠 수도, 기대 이상일 수도 있다. 혹은 누군가에게 보여주지도 못할 수준의 쓰레기가 될 수도 있다.

그래도 만드는 수밖에 없다. 살고 싶은 대로 살아지지 않는다고 해서 되는 대로 살다 보면 삶은 수동태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 삶에 도전 하나 더하는 것이다.


5

많은 사람들이 지독하게도 무기력한 2020년 상반기를 보냈다. 바이러스로 인해 새로운 일을 추진하지도 못 하고, 예정된 일들을 미루거나 취소하고, 앞으로도 어떻게 살아가야 할지 모르는 이들이 많다.

나는 촬영장에 가는 일이 줄어 불안했지만 책을 내고 나니 마음이 편해졌다. 직업이 아니더라도 내가 할 수 있는 일로 생존할 수 있다면 그것만으로도 충분히 살아갈 만하다. 어떤 일은 내 삶을 어지럽히고 경력을 더럽힐 수도 있겠다. 아무렴 어떤가. 거장들의 필모그래피에도 한순간의 흑역사는 있기 마련이다. 완전무결의 삶을 꿈꾸기보다 완전다결해도 좋으니 일단 살아남자. 생존이 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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