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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투스칸썬 Dec 06. 2022

초경과 파자마


사흘도 길다.

딸애가 한사코 해보라는 MBTI 검사를 하다 내 결과보다 우리 엄마가 더 궁금했다.

엄마는 ‘ESTJ’ 일 테고 나와는 상반될 것이다. 그래야 맞다.

엄마에게 있어 말수 적고 온순한 둘째 딸은 리얼 내가 아니라 엄마가 원하는 딸의 모습이다.

“나 서울이다. 지금 간다.” 엄마의 전화는 이렇게 간단하게 뚝 끊긴다.

 

증여 문제로 오래 알아 온 세무사를 만나겠다고 약속 없이 오셨으니 허탕 치시는 것도 어찌 보면 당연하다.

나는 엄마가 물려주실지 모르는 상속에는 관심이 없다. 상속조차 엄마가 공짜로 주실 분이 아니시니까 안 받아도 괜찮다고, 다 정해놓고 하시는 "내가 하란대로만 해라."는 소리, 더는 듣고 싶지 않다고 속으로만 생각한다.

거두절미하고 “다음 주에 올라간다.” 하시고 전화를 뚝 끊으시지 이번처럼 바로 오신다는 건 처음이다.

몇 시쯤 오신다는 건지 얼마나 계실 건지도 말씀이 없으시다.

반가움보다 늘 불편하고 일방적인 통화. 어디서 전화를 받아도 엄마라고 뜨는 휴대폰 발신자명은 부담스럽다.

이렇게 엄마와의 사흘이 시작되었다.




어제저녁부터 딸아이가 초경을 한다.

호들갑스러운 아이가 아니라서 크게 힘들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래도 뒤처리가 신경 쓰이는지 생리 기간은 안방 화장실을 혼자 쓰겠단다.

하지만 학교에서 돌아오니 안방 화장실 임자는 바뀌어있다.

세면대 위 선반에는 비누, 칫솔, 양치컵까지 할머니가 가져오신 세면도구가 줄 서있다.

엄만 우리 집 것에 손대지도 않으시지만 양해를 구하는 법도 없다.

“아우, 짜증 나. 엄만 할머니 저러시는 거, 화도 안 나?”

(화 많이 나지, 할머니가 바뀌실 것 같으면 백번 천 번도 말하지.)

대꾸 없이 딸아이 등을 재촉해서 거실 화장실을 내어준다.

엄마를 설득시키는 것에 성공한 적은 없다. 식사 메뉴나 티브이 채널권, 주차장 동선까지 엄만 정하시고 향하신다.

이렇게 세월이 지나도, 초경한 아이 키우는 나이가 되어도 여전히 엄마의 따뜻함을 그리워하는 것은 나에게도 뜻밖이다.

이번에도 세무사 측에 약속 없이 가셨다 기어코 용무를 마치고 돌아오신 엄만 많이 고단해 보였다.

한사코 방에서 주무시라는 데 거실에 요를 펴고 모로 누워 유튜브를 켜시는 엄마.

앉았던 자리든 드시고 난 자리든 표 남는 거 하나도 질색이신 분이다.

한다면 하고야 마는 네 엄마가 그러겠다는 걸 누가 말리냐고 지난달 아버지는 증여 준비에 관해 이렇게만 언급하셨다.

"너도 뭐 한다 하면 아비가 이래라저래라 하질 않잖냐, 허튼 데가 하나 없으니. 너나 네 어미나."


모녀라고 살가운 대화가 오갈 리 없으니 집안은 엄마가 틀어놓은 유튜브 정치뉴스로 가득하다.




이튿날 딸아이가 허둥지둥 등교 준비하는 와중에도 엄마는 커피믹스를 찾으시고 보온병 물이 식었다고 투덜대신다. 여분 생리대를 챙겨주고 토닥여 등교시킨 후 커피믹스를 홀짝이며 슬며시 엄마에게 묻는다.

“엄마는 생각 나? 나 첫 생리한 날?”

“그럼, 여행 간다고 우리 집에 친척들이 와 기다리는데. 너 화장실 들낙 대느라 다 늦었잖아.”

엄마도 기억하는구나.

대체 무슨 영문인지 어리둥절해서, 뒤처리를 하고 또 해도 마찬가지라서 화장실 안에서 이도 저도 못하던 나의 초경.

엄마 대신 닦달하러 온 동생 목소리가 화장실 안으로도 크게 렸다.

“엄마, 언니 계속 설사하는지 안 나와. 옷도 몇 번 갈아입나 몰라. 더러워.”

여행지에서 인디언 핑크 파자마 바지를 입고 잤다. 눈을 뜨자 확인한 7부 바지 파자마에는 동그란 얼룩이 두 군데나 묻어있고 나는 고민 없이 바지를 돌돌 말아 쓰레기통에 버렸다. 으로 돌아오면서, 엄마한테 말해서 빨아달라 할걸, 하는 아쉬움이 들었다. 정말 좋아하는 파자마였다.

요즘이야 여자 어른이 된다는 것을 엄마가 귀띔하고 아이가 받아들이는 문화가 자연스러운 세상이지만 우리 때만 해도 엄마에게 그런 말을 들어본 적이 없다.

 

출처 : 픽사베이


“엄마, 나 들를 데 있어요.”

아파트 상가에서 엄마와 바지락 칼국수를 먹고 2층으로 올라갔다.

“나이 먹어 무슨 잠옷을 따로 입냐? 살림하면서 집에서 입는 옷 하나면 되지.”하시고도 엄만 잠옷 파는 코너에서 옷을 고르고 값을 치르신다.


사흘 째 아침, 비행기 출발시간도 안 알려주신 채 엄만 이부자리를 개어놓고 들고 오신 가방 하나 그대로 일찍 나가셨다.

쌀쌀맞은 얼음나라 여왕, 우리 엄마.

현관 입구에서 내 주머니에 "네 거는 맘에 드는 걸로 사 입어."하고 오만 원짜리 두장을 넣어주신다.


딸애가 산발한 머리를 깡충하게 위로 묶으며 나오는데 후들후들한 면 파자마 차림이 귀엽다.




온 집안 창문을 여니 속이 다 시원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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