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석과 피자

방송 에피소드

by pdjohn

10년도 훨씬 넘은 어느 추석 연휴의 이야기다. 연휴에 대분의 식당들이 문을 닫았고, 편의점 컵라면엔 인이 박힐 듯하여, 며칠 째 주말 방송 프로그램을 편집하던 좁은 편집실에서 나와 먹을 것을 찾아다녔다.


차를 몰고 10여 분을 어슬렁 거리다가 운 좋게 회사 인근 주택가에 문을 연 작은 피자집을 발견했다. 영어로 적힌 간판명이 '피자 **'다. 유명한 프랜차이즈 피자집은 아니라 내심 노파심은 있었지만, 그래도 컵라면보다 낫겠지라는 확신에 가득한 마음으로, 기대는 반쯤 접은 채로 들어갔다.


기대와는 달리 메뉴판 속의 현란한 피자들과 사이드 메뉴들이 굶주린 눈을 현혹했다. 아주 잠시 안정성과 모험 둘 중 어떤 선택을 할지 우리는 방향성에 대해 고민했다. 결론은, 화려한 토핑을 자랑하는 피자들 대신 가장 기본적인 '콤비네이션' 피자를 주문했다.


언제나 잘 모르는 식당에 가면 비빔밥이나 라면을 주문하는 것처럼, 함께 간 일행과 나는 이 와중에도 안정성을 추구하기로 했다. 배는 고팠지만, 평생 먹을 피자에 대한 몹쓸 기억을 간직하고 싶지는 않았다. 지금도 처음 가는 식당에선 무조건 기본 메뉴나 시그니쳐 메뉴를 주문한다. 버거킹의 와퍼 같은.


그런데 잠시 후. 그 노파심은 현실이라는 과녁의 만점 원 안에 바로 적중하고 말았다. 주문한 지 얼마 되지 않아 나온 피자에는 한 가지 문제가 있었던 것이다. 그것은 피자에 있어 큰 문제였다. 맛이 없었다. 없어도 너무 없었다. 순간 편집실 구석에 놓여있는 컵라면이 피자 위로 오버랩됐다.


사실, 피자라는 음식이 뭐 그렇게 복잡한 제작 과정을 거치는 음식은 아닐 텐데... 어떻게 하면 이렇게 맛이 없는 걸까...라는 생생을 하며 한 입 그리고 두 입 째 입에 넣어 보았다.


마치 SBS <골목식당>에서 장사가 잘 안 되는 햄버거 가게에 들러, 주인이 야심 차게 만들었다고 우기는 수제 햄버거를 입에 넣고 묘한 표정을 띄며 맛을 보던 백종원처럼, 우리에게 이 피자가 오늘의 마지막 선택이었기 때문에 한 입 한 입을 아주 신중하게 씹어 넘겼던 것 같다.


그런데... 두 입을 먹고 나서 우리는 더 먹는 것을 포기했다. 더 이상 먹다가 평생 피자에 대한 트라우마가 생길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에 먹던 피자를 내려놓았다. 그 맛은 마치.. 냉장고 속에서 자연 숙성된 마른 피자에 치즈맛 풍선껌을 올린 다음 전자레인지에 1~2분가량 돌려서 먹는 그런 맛이 아닐까 싶다.


너무나 어이가 없어서 아직 4분의 3이나 남은 피자를 그냥 두고 나가려다가, 이 마저도 먹을 게 없는 회사에 남아있는 조연출들이 생각나, 눈을 내리깔고 엄숙한 목소리로 주인아저씨에게 포장을 부탁했다.


그런데 거기서 끝이 아니었다. 충격적인 피자 맛에 얼얼해진 정신을 다잡으며 착잡한 마음으로 포장 피자를 기다리던 우리는, 방심하고 있다가 제대로 일격을 맞게 되었다. 그것은 포장된 박스를 건네면서 해준 주인아저씨의 말 한마디였다.


"피자 포장 나왔습니다. 이 피자는요.. 전자레인지에 데워 드시면.. 더욱 맛있습니다. (헤헤)"


순간, 내 귀를 의심했다.


"네에에? 뭐라고 하셨... 전자레인지요?"


주인아저씨는 "더욱 맛있습니다."라고 발음한 것이 분명했다. 방금 전의 그 오디오를 확인하고 싶다는 욕구에 0.1초 만에, 피자를 건네주는 주인의 손에서 얼굴로 시선을 옮겼다.


방금 전 "더욱 맛있습니다"라는 몽환적인 오디오가 흘러나왔다는 것을 증명이라도 하는 듯 그 입은 입꼬리가 하늘로 올라가 있었고, 두 눈은 한가위답게 보름달 같은 눈으로 해맑음을 뽐내고 있었다.


"아... 네..."


대답을 하면서, 머릿속은 온통, 전자레인지 옆에서 웃고 있는 주인아저씨의 모습으로 가득했다. 게다가 직업병이 발동했는지 상상에 상상에 상상을 더해서, 이젠 그 주인아저씨가 한 손에 김이 모락모락 나오는 피자를 들고 웃으며 서 있는 이미지로 바뀌어 있었다.


상상과 동시에 단전에서부터 반사적으로 엄청난 빅 웃음이 밀려올라고 있었다.


'아.. x 됐다.. 여기서 웃으면.. 큭큭.. 안되는데.. 이건 주인과 손님 간 아니 홍익인간 정신에 위배되는 큰 결례인데..ㅋㅋ'


이 생각에, 인사를 하는 둥 마는 둥 숨도 못 쉬고 뒷걸음질 치며 서둘러 가게를 빠져나왔다.


"아니, 무슨 전자레인지에 요리사라도 들어있다는 건가? 하하하"


가게 문을 나오자마자 우리는 90도로 접는 폴더폰이 되어 배를 잡고 웃지 않을 수밖에 없었다. 얼마나 웃었는지 눈에는 눈물이 입가에는 침이 흐르고 있었다. 나중엔 하늘이 노랗게 보이기까지 했다.


회사로 복귀하며, 다음엔 차라리 피자맛 컵라면을 먹자고 굳게 다짐했다. 그렇게 주말 방송을 편집하며 보낸 추석 연휴가 지나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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