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본식탁위의_가위 #한국어능력시험과_삼겹살
어떤 문화권에 낯선 문화가 전파될 때, 가장 쉽고 빠르고 거부감 없이 파고들 수 있는 건 역시 음식입니다.
음식은 동시에 가장 저항이 극심한 문화콘텐츠이기도 하죠.
지금 일본에 전혀 새로운 음식 한류가 불고 있습니다. 일본 넷플릭스를 통한 한국 드라마가 최상위권에 줄줄이 랭크되어있고, BTS와 블랙핑크는 일본만이 아닌 글로벌 신드롬을 일으킨 지 오래죠.
주목하고 싶은 조리도구는 가위입니다.
한국인의 밥상에서 가위를 사용하는 건 꽤 일상적이죠. 고기구이집이나 냉면만이 아니라, 보통 가정의 주방에서도 가위를 일상적으로 사용합니다.
대가족이 거주하는 대형 아파트나, 주방 공간이 적은 1인 가구. 어느 쪽이라도 가위는 반드시 갖추고 있습니다.
우리는 고기를 자를 때 가위 외의 조리도구를 상상하기 어렵습니다.
고기 가위도 발전을 거듭한 나머지 이제는 반달형태로 아랫부분을 둥글린 가위까지 나왔죠.
오랫동안 외국인이 한국인의 외식문화에서 가장 충격을 받은 게, 바로 가위입니다.
고기뿐 아니라 면요리까지 가위로 썩둑썩둑 자르는 모습은, 외국인이 보기는커녕 상상조차 못 했던 일이니까요.
우리가 세계에 미치는 영향이 상대적으로 적을 때에는, 가위를 사용한 식습관은 비난의 대상이 되기도 했습니다. 문구나 공구에 가까운 도구로 음식을 건드리는 모습에 일부 외국인이 거부감을 느낀 거죠
일본도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래전부터 한국식 고기구이집인 야키니쿠(焼肉)가 문화가 성행했지만, 일본의 야키니쿠는 고기를 미리 주방에서 잘라 서빙합니다.
그러니 일본인이 식탁 위에서 가위를 사용해 고기를 자르는 건, 상상조차 하기 어려웠죠.
일본인이 가위를 사용하게 만든 마법의 음식이 있습니다.
삼겹살. 일본어로도 그대로 삽겹살(사무교푸사루;サムギョプサル)고 읽습니다.
2010년대 중반부터, 한국식 삼겹살이 일본에서 유행하기 시작합니다. 우리 기준에서는 맛있어서 먹는 음식인데, 어쩐지 일본에서는 건강식 이미지가 강합니다. 그도 그럴 것이 우리 삼겹살은 기본적으로 갖은 쌈채소를 제공하죠. 어떤 삼겹살 가게는 고기보다도, 쌈채소의 종류와 양을 홍보 포인트로 삼기도 할 정도입니다.
일본인의 식탁에서 한 번에 다량의 채소를 곁들이는 식사는 의외로 적습니다. 일식이 건강식이라는 이미지가 있지만, 일식에서 채소를 먹기는의외로 쉽지 않습니다. 추가로 샐러드를 만들거나 주문하지 않는 이상 말이죠.
한국식 삼겹살은 이 점을 멋지게 파고들었습니다.
일본인의 감각으로 미식동원(美食同源).
즉 “음식을 먹고 몸도 마음도 깨끗해지자(食べて心も体も キレイ になろう)”를 자극한 거죠.
실제로 일본의 고급 삼겹살 가게는 이런 콘셉트로 홍보합니다.
삼겹살은 일본인에게 다량의 쌈채소만 안겨준 것은 아니죠.
덤으로 가위도 안겨줬습니다.
기존의 야키니쿠는 미리 주방에서 고기를 한입 크기로 손질해 서빙하는 게 실용적이었습니다. 눈으로 보기에도 그쪽이 좋았죠.
하지만 삼겹살의 핵심은 두툼하고 긴 고기입니다. 이걸 통째로 불판에 올려야만 느낄 수 있는 호쾌함과 기대감이 있죠. 삼겹살을 미리 잘라 굽는다는 건 풍류도 없고, 맛있게 느껴지지도 않습니다.
불판에서 호쾌하게 구워낸 삼겹살을 눈앞에서 먹기 좋게 자르려면, 가위보다 효율적인 조리도구는 없습니다.
삼겹살의 대유행은 엉뚱하게도 일본인에게 조리도구로서의 가위의 효용성을 늘려줬죠.
전 세계적으로 한식당에서 가위를 사용하는 비율이 높아진 것 이상으로, 일본 야키니쿠 가게에서 가위 사용비율이 높아지고 있습니다. 삼겹살 가게라면 뭐 말할 것도 없죠.
이런 게 진짜 문화 전파이며, 한류가 아닌가 생각합니다. 처음에 거부감을 가지던 문화가 어느새 자연스레 일상에 전파되는 모습이요.
여기에는 어떤 정치적 배경도 프로파간다도 없습니다. 그저 경험해보니 좋았더라 그리고 괜찮았더라는 체감 효용만 있을 뿐이죠.
그런데 왜? 갑자기 삼겹살과 가위가 일본에 새롭게 퍼져나간 걸까요?
문화가 전파되는 이유는 다양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중요한 건 역시 그 문화 고유의 쿨함이겠죠. 그런데 쿨함은 대부분 경제력에서 나옵니다.
우리는 80년대부터 본격적으로 삼겹살을 지금처럼 먹어왔죠. 삼겹살은 40여 년간 ‘서민의 고기’ 자리를 굳건히 지키고 있습니다. 한국인의 감각으로 삼겹살은 치킨만큼이나 서민적입니다. 삼겹살과 치킨은 한국 서민을 대표하는 고기 요리죠.
일본에서 ‘한국식 치킨’의 위상은 이미 삼겹살을 넘어선 지 오래입니다. 일본에서 삼겹살은 단 한 번도 치킨의 위상에 근접한 적도 없습니다.
생각해보면 이상하죠. 우리 감각으로 결코 고급 음식이나 고급 식문화가 아닌 치킨과 삼겹살이 어떻게 일본인의 입맛을 사로잡았을까요?
결국, 2010년대 이후 한국의 높아진 경제 수준과 대중문화의 영향이라 생각합니다. 삼겹살과 치킨은 한국 영화와 드라마에 빠지지 않고 등장하니까요. 심지어 K-POP 뮤직비디오에도 나오기도 합니다.
일본 내에서 한국식 치킨의 성공은 여러 미디어를 통해 접할 수 있습니다.하지만 삼겹살의 성공은 좀처럼 한국인에게 잘 알려지지 않았죠.
삼겹살의 성공은 우리가 미드 ‘빅뱅이론(Bigbang Theory)’의 여주인공 페니가 일했던 레스토랑 ‘치즈케이크 팩토리(Cheesecake Factory)’에 열광했던 것과 마찬가지 아닐까요?
사실 치즈케이크 팩토리(the Cheesecake Factory)는 미국 서부에서 시작한 프랜차이즈 레스토랑입니다. 고급과는 거리가 먼, 매우 캐주얼한 레스토랑이죠.
주로 캘리포니아 서부에 집중되어 있고, 드라마의 인기에 힘입어 중부와 동부 일부 지역에 진출하기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미국 전역에서 열광적 인기를 얻고 있다고 말하기엔 너무 부족하죠.
현지인에게 치즈케이크 팩토리가 맛집이냐고 묻는다면, 열에 아홉은 “뭐 그냥 동네 식당이야”라고 답할 겁니다. 실제 경험한 일이기도 하고요.
하지만, 빅뱅이론에 심취했던 외국인들에게는 한 번쯤 찾고 싶어 지는 가게 일지 모릅니다.
그 식당에 페니는 고사하고 쉘던이나 레너드가 없는 걸 잘 알고 있더라도 말입니다.
이런 게 진짜 문화 콘텐츠의 힘이겠죠. 무엇이든 사실보다 쿨하게 느껴지게 만드는 것.
삼겹살의 전파도 똑같지 않았을까요?
한국이 먹고살만해지기 시작할 무렵부터 서민의 고기로 떠오른 삼겹살은, 이제 삼겹살을 바라보는 외국인에게 무언가 ‘쿨함’을 제공해 줍니다.
한국이 쿨해 보이지 않을 때는, 식탁 위에서 큰 고기를 가위로 써는 모습이 경박하게 보였다면, 이제는 그 반대가 되었죠.
다수의 일본인(그리고 다른 외국인이)이 삼겹살을 불판에 손수 굽고, 가위로 자르고, 쌈채소에 싸서 먹는 것을 쿨하다고 생각하기 시작했습니다. 이왕 외래에서 전파된 음식문화라면, 철저히 현지의 방법을 따르는 편이 쿨하다고 생각한 거죠.
이런 인식의 전환이 삼겹살과 가위만 있을까요?
‘한국어 능력시험(TOPIK)’이야말로 가장 대표적인 인식의 전환 사례가 아닐까 싶습니다.
지난, 2월 이데일리에 따르면, 한국어 능력시험이 토익처럼 인터넷 시험으로 전환된다고 합니다.
이 말은, 한국어능력시험을 치르는 외국인이 그만큼 많아졌다는 이야기죠.
기사에 따르면 TOPIK에 응시한 외국인은 2017년 70개국 29만 명이었는데, 2019년에는 86개국 37만 명으로 늘었다고 합니다. 단 2년 동안 30%나 성장한 거죠.
그런데 2022년에는 70만 이상이 응시할 것으로 예상한다고 하네요.
또 불과 2년 만에 100% 성장을 기대하는 겁니다.
이런 추세처럼 한국문화는 전 세계에 자연스레 스며들고 있습니다.
자국의 고급지고 세련된 문화만을 엄선해 전파하려는 시도는 거의 실패합니다. 중국이 전 세계에 공자학원을 만들어 중국어와 중국문화를 강제 수출하려 했죠. 물론 결과는 참담합니다.
문화의 전파는 거창하고 대단한 게 아닐 겁니다. 삼겹살과 가위처럼 그들의 일상에 자연스레 스며드는 편이 훨씬 단단해 보입니다.
정작 이 사실을 가장 모르는 건, 한국인이죠.
그리고 소수의 일본인도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