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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잔잔호수 Mar 15. 2024

아무것도 아닌 인간

휴대폰에서 음악이 흘러나온다.

평소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다.

하지만 불쾌하게 느껴지는 건 왜일까?

시계를 보니 새벽 6시다.

내가 좋아하는 음악이 날 깨워준다면, 상쾌하게 하루를 시작할 줄 알았는데 오히려 더 괴롭다.

평소에는 마냥 좋게만 들었던 그 음악이 갑자기 소음공해처럼 느껴진다.


이제 이 생활에 조금 적응했다고 생각했는데 아침에 일어나는 것은 언제나 괴로운 일이다.

졸린 눈을 비비며 거울을 본다.

아무것도 아닌 인간 한 명이 우두커니 서 있다.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라... 너무 스스로를 비하하는 표현 같지만 실제로 나의 자존감은 바닥을 치고 있었다.

내가 멀쩡히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난 뒤로 난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되었다.

그전에 회사를 다닐 때는 내가 하는 일이 곧 나였다.

나를 소개할 때면 자랑스럽게 '나는 무슨 일을 하는 누구'였다.  

사람들이 나를 기억할 때는 내 이름 석자보다 내가 하는 일을 기억하곤 했다.

그런 직장을 벗어나니 나는 쓸모가 없는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된 것처럼 느껴졌다.   


대학을 졸업하고 갖게 된 첫 직장은 금융업이었다.

남들이 흔히 갖는 취준생이라는 공백기 없이 바로 시작된 사회생활.

급하면 체한다 했던가? 공백기가 없어서 그런지 자신을 돌아볼 겨를도 없이 매일매일 쏟아지는 업무량과 실적에 대한 압박, 스트레스가 나를 짓눌러왔다.  

매일 정장을 쫙 빼입고 출근하고 나름 일찍 취업하여 친구들의 부러움을 살 때도 있었지만,

집에 돌아오고 회사에 출근할 생각만 하면 신기루처럼 나의 자존감은 사라지곤 했다.
'하아... 이렇게 사는 게 맞는 걸까? 전혀 행복하지 않다.'

몇 년간 쳇바퀴 같은 삶을 버티고 버티다가 내린 결정은 결국 퇴사였고,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 되어

공무원 시험을 준비하고 있다.

그렇다. 나는 공무원시험 준비생. 공시생이다.


"야 백수새끼!"

오랜만에 만난 친구 놈이 나의 심기를 자극한다.  

하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그놈도 나와 똑같은 공시생이기 때문이다.

나보다 몇 년 일찍 공무원 시험에 뛰어들었던 그 녀석은 이제 나도 그와 똑같은 처지가 된 것을 매우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아마 동병상련의 감정을 느끼지 않았을까 싶다.

"그래, 나 백수새끼 됐다. 어쩔래"

나는 웃으며 사람 좋게 받아쳤지만 백수라는 말이 좀 아프게 다가왔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제 더 이상 떨어질 자존감도 없다.

이왕 시작한 거 끝을 봐야지라고 마음을 다잡는다.

"공부나 하자. 얼른 백수 탈출해야지"


내가 공시생이 된 이유는 교도관이 되기 위해서다.

나는 사실 공무원이 되기 위해 공시생이 된 것이 아니라

교도관이 되기 위하여 공시생이 되었다.

교도관이라는 직업이 공무원이기 때문에 자연스레 공무원시험을 준비하게 되었다고나 할까.     

 

퇴사를 하기 전부터 내가 무슨 일을 하면 좋을까 고민해 보던 차에

우연히 접하게 된 교도관이라는 직업. 알면 알수록 흥미로웠다.

범죄자들을 관리하고, 교화시키는 직업이라고 막연하게 알고 있었지만

뭔지 모를 사명감 같은 것도 생기고, 이 일을 하면서 보람도 느낄 수 있을 것 같았다.

물론 내가 직접 해보지 않아서 너무 이상적인 생각을 하는 것일 수도 있다.

요즘과 같은 물질 만능주의 시대에 취준생들의 직업선택의 기준 제1순위가 '돈'이라고 하는데

나는 그러한 트렌드에 역행하고 있는 듯했다.

예전이나 지금이나 나란 놈은 유행에 뒤처지는 건 여전하다.  

뭐 어쨌거나, 백수가 된 지금 이 직업이 너무나 갖고 싶다.


"야 인마! 사명감? 보람? 그런 게 밥 먹여주냐?

공무원 되려는 것도 그냥 밥벌이하려고 하는 거지. 그것도 철밥통 밥벌이 잖냐.

따박따박 나오는 월급, 잘릴 걱정 없는 안정감, 빵빵한 연금. 이거 보고 하는 거 아니냐?

근데 왜 넌 하필이면 그 많고 많은 공무원 중에 교도관을 하려고 하냐... 난 시켜줘도 안 한다."


친구 놈은 자기도 아직 공시생 주제에 공시계의 선배랍시고 말이 많다.

친구가 하겠다는데 응원해주진 못할망정 소금을 뿌리는 건 뭐람. 그날따라 그놈이 밉고 야속하다.

물론 나를 위해서 하는 말이겠지만 그 말들은 매우 쓰라리고 아팠다.  


"몰라. 그냥 하고 싶으니깐. 다른 건 안 땡겨"  

나도 진짜 모르겠다. 그런데 안 해보면 후회할 것 같다.


친구 놈과 헤어지고 집에 일찍 들어가기 싫어 일부러 모르는 길을 돌고 돌아 이리저리 시간을 때웠다.

아마 조금은 우울한 감정을 터덜터덜 걸으면서 떨쳐내고자 했던 것 같다.

걸으면 답답한 마음이 조금은 가라앉는다.

그러고 보니 오늘따라 달이 유난히 밝게 빛난다.

수험생활을 하면서부터는 땅만 보면서 걸었는데 이렇게 오랜만에 하늘도 쳐다보게 되니 좋네.

오랜만의 여유와 낭만이다.  


집에 돌아와서 거울을 다시 본다.

지금 나는 내세울 것 없는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다.

하지만 미래에 교도관 제복을 입고 있는 멋진 나를 상상해 본다.

지금은 비록 아무것도 아닌 인간이지만 꿈이란 게 있는 내 처지가 그렇게 우울하지만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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