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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cegraphy Mar 03. 2022

세상에서 발리가 사라지는 날, 녜삐데이

완벽한 휴식

꽤 만족스럽던 반둥 생활을 정리하고 발리로 급하게 거처를 옮긴 이유 중 하나는 '녜삐데이'를 경험하기 위해서다. 발리의 가장 큰 명절이자 국경일인 녜삐데이. 영어로 하면 'Silent day', 침묵의 날이다. 모든 것이 멈추는 날이다. 한국에도 없고 인도네시아 다른곳에도 없는 발리에만 있는 '이 날'을 겪어보고 싶었다. 올해는 3월3일, 오늘이 녜삐데이다.


각자의 집에서 차분히 명상하며 힌두교 최고신 상향위디(Sang Hyang Widhi)에게 기도하며 새해 첫 날(녜삐데이는 힌두교 사카 달력의 새해 첫날)을 보내는 게 발리의 풍습이다.



#'녜삐 이브', 거리에 몰려나온 발리 사람들


크리스마스처럼 녜삐데이도 전날, '이브'에 메인 축제가 펼쳐진다. 3월2일 오후 5시쯤 발리 남부 누사두아 숙소에서 오토바이를 불러 짐바란 식당까지 갔지만 문이 닫혀 있었다. 다른 식당들도 대부분 문을 일찍 닫았다. 이날을 기념해 오후 6시 전에 대부분의 식당이 문을 닫는다. 밥은 먹지 못했지만 녜삐페스티벌을 볼 수 있었다.


벌써부터 일부 거리는 출입이 통제됐다. 밤에 있을 행진을 위해서다. 출격을 앞둔 '오고오고(ogoh ogoh, 악령인형)'가 곳곳에 보였다. 짐바란 시민회관에는 전통의상을 입은 학생들이 모여 행사를 준비하고 있었다.


2년을 쉬고 열린 행사에 대한 사람들의 관심은 상상 이상이었다. 가던길을 멈추고 아직 행진을 시작하지 않은 오고오고를 촬영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아직 코로나19 팬데믹이 끝나지 않은 상황, 올해에도 축제는 열리지 않거나 규모가 작을 것이라는 얘기를 들었다. 하지만 코로나가 발리 사람들의 녜삐데이에 대한 열정을 막을 순 없었다. 코로나로 숨죽인 2년이 이들에겐 길게 느껴졌나보다.


쏟아져나온 인파가 거리를 가득 채웠다. 소나기가 쏟아졌지만 이들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전통의상을 입고 횃불을 든 남자들과 일본 오키나와에서 들었던듯한 전통음악(민속음악, 가믈란)은 행인들의 흥을 돋궜다.


#오고오고와 잿밥의 의미


오고오고는 지옥에서 온 나쁜신들이다. 어떤 마을이 더 흉측하게, 거대하게 오고오고를 만드나 경쟁한다고 한다. 행진의 시작은 떠돌이 악령들을 인형 안으로 불러들이는 의식으로 시작한다. 행진 후 마을 광장이나 교차로, 바닷가에서 오고오고를 태운다. 악령고 함께 지난 1년간 쌓인 나쁜 기운들을 제거, 퇴치, 정화한다는 뜻이다. 발리 대부분의 마을에서 이날 오고오고가 행진한다.


지난 주말 발리에 도착했을 때부터 발리 곳곳에서 '잿밥'을 볼 수 있었다. 사원은 물론 가정집에서도 해변에서도 신들에게 공물을 드리는 것이다. 한국 제삿상과 비슷하다. 동식물로 만든 음식, 꽃에 향초가 올라간다. 자연이 인간에게 준 것을 더 소중히 다루고, 신들에게 바친다는 의미다.


발리가 '신들의 섬'으로 불리는 이유를 체감했다. 힌두교 신자들도 힌두신의 숫자를 모른다고 한다. 발리 곳곳에는 여러 형태의 '신상'이 있는데 모습이 제각각이다. 의지할 곳, 믿을 대상이 있으면 삶의 가치와 행복감이 높아진다. 발리 사람들이 온화하고 긍정적인 이유 아닐까.


#완벽한 휴식


화려한 축제가 끝난 뒤 3월3일 오전 0시가 되면 발리의 모든 '불'이 사라진다. 1980년도부터 녜삐데이 행사가 시작됐다고 하는데, 심할 때는 전기를 차단했다. 최근까지도 녜삐데이 당일에는 인터넷과 통신망이 먹통이 됐다고 한다.


발리가 지구에서 사라지는 날이다. 식당은 물론 모든 영업점이 문을 닫는다. 발리 공항도 폐쇄돼, 이곳을 떠날수도 방문할수도 없다. 서핑도 할 수 없고 골프도 칠 수 없다. 아무것도 할 수 없다. 방안에만 있어야 한다. 심지어 공부도 못한다고 한다. 그냥 아무것도 안하는 날이다.


발리를 찾은 악령들이 침묵의섬을 보고 사람들이 없다고 믿어 떠나도록 한다는 의미라고 한다. 새해 첫 날, 인간이 자율적인 침묵으로 악령에 대응할 수 있다는 의미를 상징하기도 한다. 힌두교를 믿지 않는 사람도 자연스레 이 의식에 동참한다. 관용과 조화다.


3개월 일정으로 해외에 머물며 가장 좋은 점은 '완벽한 휴식'을 할 수 있다는 점이다. 3박4일, 길어야 일주일 정도 해외여행을 갈때는 빽빽하게 일정을 소화하다보면 한국에서 일하는것보다 더 지친채로 귀국할 때도 많았다. 하지만 시간이 여유가 있으니 '아무것도 하지말자'는 날을 정해 호텔에서 '푹' 쉬면 몸이 정말로 회복되는 느낌이 든다.


발리의 녜삐데이는 완벽한 휴일이다. 공휴일이라고 어디에 놀러갈지 고민하지 않아도 된다. 휴일근무를 자원해야 할지 '눈치게임'을 하지 않아도 된다. 모두가, 아무것도 하지 않는, '완벽한 휴일'이기 때문이다.


#충전, 다시 시작


녜삐데이 다음날은 '응엠박 그니(Ngembak Geni)'라고 불린다. 자유로운 불이라는 뜻이다. 활동이 재개된다. 전날 완벽한 휴식으로 에너지를 충전한 발리 사람들은 다시 새해를 시작한다.


이날은 가족, 친지, 친구들을 방문해 그동안 잘못한 일들을 (잘못하지 않았더라도) 사과하는 날이라고 한다. 괜한 자존심을 지키며 어색해진 관계를 회복할 수 있는 기회다. 지혜가 담긴 풍습이다. 먼저 사과하면 그렇게 마음이 편할수가 없는데, 그게 참 어려운 일이다.


인도네시아 3달 살기, 벌써 한달하고도 1주일이 지났다. 충전은 이미 100%. 뭐든 다시 시작할 때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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