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리에 오면서 가고 싶다고 '버켓리스트'에 담은 곳은 아궁산이었다. 해발 3200m, 발리에서 가장 높은 활화산. 불과 4년전에 대폭발을 겪은 곳이다.
아궁산에 가고 싶었던건 7년 전 만났던 브로모 화산의 임팩트가 컸기 때문이다. 바로 7주 전 반둥 땅꾸반프라후 화산의 경험도 만족스러웠다. 자연의 위대함, 경이로움을 느끼기에는 살아있는 화산이 제격이다.
아궁산 투어를 알아봤다. 아무리 검색해도 한국인이 등반했다는 기록은 2018년 화산이 폭발하기 전 예전기록 뿐이었다. 그동안 친해진 현지인들에게 물어봐도 한국인의 아궁산 트레킹 문의는 거의 없다고 한다. 현지인이나 다른 외국인 관광객들도 예전만큼 많이 아궁산을 찾지 않는다고 한다.
아궁산에 오르려면 최소 8시간 동안 걸어야 한다고. 마라톤 풀코스도 2번 뛰어본 마당에 못할건 아니었지만, 무리하지 말자는 요가의 가르침에 따라 차선책을 택했다. 발리 넘버원 아궁산과 넘버투 아눙산, 발리 최대 호수 바투르 호수를 한번에 볼 수 있는 바투르산이다.
바투르 투어 역시 '급'으로 진행됐다. 어제 밤 7시 구글맵에서 batur mountain을 검색하고 나오는 여행사로 왓츠앱 메시지를 보냈다.
혼자면 75만 루피아, 2명이면 45만루피아, 3명이면 40만루피아를 받는다고 한다. 짱구에서 2시간 넘게 걸리는데 왕복차량은 물론, 트레킹가이드, 아침식사, 물, 랜턴, 스틱이 포함된 가격이다. 커피 플랜테이션 관광(?)도 포함해서다.
여행중 알게 된 한국 친구와 같이 가기로 하고 예약을 했다. 출발은 다음날(오늘) 오전 1시15분. 설레는 마음에 잠도 제대로 못잤다. 오랜만에 느끼는 새벽골프치러 가기 전날 밤 느낌이다.
기사님이 길을 잘 못찾아서 1시간 정도 딜레이 됐지만 새벽 4시쯤 베이스캠프에 도착했다. 우붓을 훨씬 지나쳐 나오는 바투르 호수 북부 지역. 가는 길부터 이미 여행은 끝났다. 차량 창문 옆으로 들어오는 별들. 7년 전 브로모 화산을 오르기 전날 묵을 산장으로 향하며 본 그 별을 다시 봤다. 인생 두 번째 보는 엄청난 광경.
난 이걸 보기 위해 인도네시아로 연수 지역을 정했다. 발리 사누르에서 많은 별을 봤지만 이 광경과 비교할 수 없다. 유독 빛나는 별이 시리우스인가 했지만 위치가 달랐다. 금성이었다. 내가 본 가장 큰 금성이다. 과장 조금 보태면 달처럼 환하게 빛났다.
베이스캠프에서 트레킹가이드를 기다렸다. 잠시 후 도착한 트레킹가이드 '제로'. 32살인데 7살때부터 바투르산을 탔다고 한다. 가이드 경력은 10년이 넘고, 1000번 넘게 이 산에 올랐다고 한다. 서글서글한 성격이다.
제로와 함께 산행을 시작했다. 칠흙같은 어두움을 별빛이 밝혀준다. 생전 보지 못한 별들이 보이고, 동행은 별똥별을 봤다고 한다. 밀키웨이, 은하수가 늘어서 있다.
험한 길을 오르면서 발밑을 봐야 하는데, 자꾸만 시선이 하늘로 향한다. 계속 보고 싶은, 계속 봐도 또 보고싶은 그런 모습이 머리 위에 펼쳐진다.
태어나서 두 번째로, 7년 전 브로모 화산 전날밤 이후 처음 보는 장관. 감탄사만 나온다. 이런 장면을 보면 우주의 신비로움을 다시금 깨닫는다. 헤이즈의 '저 별' 가사가 떠오른다. 혹시 저 별도 나를 보고 있을까.
셀수없이 많은 별, 그 별 중에 한곳에는 이 별, 지구를 볼만한 생명체가 살고 있지 않을까. 셀수없이 많은 별들이 합쳐진 나의 우주도 더 큰 우주에선 미물에 불과하다는 건 되새기고 되새겨도 충격적이다.
어디를 밟는지도 모르게 칠흙같은 어둠을 뚫고 꾸역꾸역 고도를 높인다. 중간쯤 다다랐을까, 새로운 장관이 펼쳐진다. 쏟아지는 별들을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전망대가 나온다. 아래로는 작은 시골마을의 전등이 별처럼 반짝인다.
하늘에는 얼마나 떨어져있는지, 지금 있을지 없을지도 모르는 수많은 별들이 반짝인다. 아래에는 지구, 인도네시아, 발리, 바투르산 아래마을의 사람들이 만든 또다른 별들이 반짝인다. 사람 하나하나가 별이고, 우리 모두가 우주를 구성하는 별이 아닐까. 랜턴 불빛 하나를 반짝이고 있는 나도 우주의 일부, 별 하나가 된 느낌이다.
정상으로 거의 다다랐을때 동이 트기 시작했다. 별과 해와 달이 공존하는 순간. 그야말로 음양조화의 순간이다. 이 순간을 향유할 수 있음에, 우주에, 존재에 감사함을 느낀다.
2시간 정도 가파른 산을 오른 끝에 정상에 도착했다. 1717미터 바투르산 정상. 아궁산, 아눙산, 바투르호수를 한눈에 바라볼 수 있는 곳이지만 자연은 쉽게 그 모습을 내어주지 않는다.
바투르호수에서 올라온 수증기가 구름과 안개를 만들었다. 강하게 부는 바람도 이들을 밀쳐내지 못한다.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기다림 뿐이다.
기다림은 절대 미약하지 않다. 결국엔 성공하는 게 기다림이다. 일출을 맞이하기 위해, 갓 고개를 든 태양을 맞이하기 위해 모두가 한마음으로 기원한다. 구름아 걷혀라, 태양아 나와라.
구름속에서 태양은 시시각각 다른 아름다움을 선사한다. 새빨간 초란같은 모습을 보여주고 이내 자취를 감춘다. 한때는 하얀 태양이 되기도 한다. 기대했던 화려한 아름다움은 아니지만, 나름의 매력이 있는 일출이다.
약간의 아쉬움을 뒤로한채 산을 내려간다. 내려갈수록 구름이 걷히고 새로운 장관이 펼쳐진다. 올라올때는 어두워서, 하늘만 보느라 몰랐던 모습이다.
화산재가 갈려 만들어진 검은색 모래와 흙을 밟고 내려온다. 마그마가 빨간 상태로 굳어 돌이된 라바스톤을 발는다. 돌 사이에 삐져나와 생명력을 뽐낸 풀들, 적도의 태양을 받고 척박한 땅에서도 쑥쑥 자라난 나무들과 마주한다.
제주도 성산일출봉처럼 멋드러진 암석, 깎아내린듯한 절벽이 눈앞에 드러난다. 어디든 포토존. 그사이 구름이 걷혀 맑아진 하늘은 훌륭한 배경이 된다.
정상에선 그렇게 꽁꽁 몸을 숨기던 아궁산과 아눙산, 바루트호수가 모습을 드러낸다. 그야말로 절경이다. 이곳에 도착했을 때 본 별이면 이 투어는 제값을 했는데, '덤'이 너무 크다.
1000번을 이산을 오르내린 가이드 제로도 신이 났다. 당신이 행복하면 나도 행복하고, 당신이 행복하지 않아도 나는 행복하다고 한다. 이렇게 말하고 신나게 뛰어가는 그의 뒷모습을 보며 나도 웃음이 난다. 행복 바이러스의 힘이다.
천혜의 자연, 인간의 기술이 아무리 뛰어난다한들 재현하기 힘든 광경들. 그게 대자연의 매력이다. 발리 바투르 화산에 가면 그 매력을 느낄 수 있다.
수많은 별들 속에 내가 하나의 별이 된 느낌, 광활한 대자연의 일부가 된 기분. 대자연을 동경하는 이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