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는 이의 시선에 따라 다른
내 친구는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를 미워했다. 다른 친구들에 비하면 현실적인 어려움도 크게 없었고 평등했던 아버지였지만 다정하고 친절한 감수성이 필요했던 그는 가족들과의 소통 없이 외롭게 자랐다고 느꼈기에 그런 가정에 주도적인 역할을 한 아버지에게 책임이 있다고 생각하고 저항하게 되었다. 그러다 어른이 되면서 결국 그런 자신이 괴롭고 힘이 들어 어떻게든 아버지를 이해하려고 시도하기 시작했다.
어떤 세상 속에서 살고 있는가 스스로에게 물어라.
그 세상에 대한 그림이 바로 자신의 내면에 대한 서술이다.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데 빈 배가 와서 부딪혔다면, 아무리 속 좁은 사람이라도 화를 내지 않는다. 그러나 배 위에 사람이 있다면 피해 가라고 소리칠 것이다. 한 번 소리쳤는데 듣지 못하면 재차 소리치고, 그래도 듣지 못하면 세 번 소리를 지르며, 이제는 욕설이 뒤따를 것이다. 앞에서는 화를 내지 않다가 이제 화를 내는 것은, 앞서에서는 빈 배였지만 지금은 사람이 타고 있기 때문이다. 이처럼 사람들이 자신을 비우고 세상을 노닐 수 있다면 어느 누가 그를 해칠 수 있겠는가.(장자) "
장자의 빈 배 이야기는 꽤 많은 이들이 알고 있는 이야기이다. 마음을 비우고 세상을 살아간다면 거기에 해를 끼칠 이는 없다는 뜻이리라. 세상은 곧 내면의 거울이자 투영이라고 한다. 그렇다면 마음을 비운 이의 세상은 어떨까. 내면이 투명하게 비워져 있으니 거기에 비친 세상 또한 투명하게 비칠 뿐이라는 사실은 누구나 추측할 수 있다.
장자는 가장 지고한 차원에 이른 현자는 세상이 없다고 했고, 그다음 차원에 이른 이에게는 세상이 있으나 분별이나 구분이 없다고 했고 마지막으로 시비분별이 따르면 구제불능이라고 했다. 장자가 그렇게 말한 이유는 바로 내면에 있다. 가장 지고한 차원에 이른 현자의 내면은 텅 비워져 세상 또한 텅 빈 상태로 비치는 것이고 그다음 차원에 이른 이의 내면에는 그의 마음에 비친 세상이 감각적으로 있다고 느끼기는 하나 분별이나 구분이 없으며, 마지막 차원에 존재하는 이들의 내면은 시비분별로 가득 채워져 구제불능이라고 한 것이다. 그렇게 내면의 수준에 따라 세상은 달리 투영될 수 있는 것이기에 결국 세상 그 자체가 어떠한 것이 아니라 그 세상을 투영한 내면에 따라 달리 세상이 현전 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내면의 차원에 의해 세상은 달리 투영될 수밖에 없는 현실이나 그러한 세상과 아무 관련 없이, 누구나에게 현전 하는 마음의 빈 바탕이 있다. 그릇이 비어 있어야 담을 것이 들어갈 수 있고, 도화지가 깨끗이 비워져 있어야 그림을 그릴 수 있듯 우리의 의식의 거울도 투명하게 비워진, 세상과 아무 관련 없는 영역이 현전 한다. 거기에 어떤 세상이든 그려지는 것이다.
우리의 내면에서 세상에 일어나는 일과 아무 관련 없이 현전 하는 존재의 성품은 거울처럼 다만 비칠 뿐, 선악시비미추의 분별을 하지 않는다. 마음을 비운 이는 그렇게 세상과 상관없는 본질적 성품으로 존재한다.
물론 자기가 그린 세상의 두께가 두껍고 무거울수록 그 그림에만 포인트를 두고 무게감을 싣고 있기에 그 무게감은 움직일 수 없을 만큼 강한 벽으로 서 있게 된다. 그러나 자기가 바라본 세상이 자신의 거울에 비친 투영임을 알게 되면 그것이 실제라고 여기던 마음이 사라지고 투영물에 대해 뭐라고 할 수 없는 상태에 이르게 된다. 더불어 그 허상의 밑바닥으로 의식이 향한다. 아무것도 시설되지 않은 순수한 마음공간인 순수의식에로 향하는 것이 우리의 마음속 순수한 본성, 자연성을 회복하는 길이다.
세상이 내면을 비춘 거울의 투영임을 알고 실제의 세상은 있다고 하더라도 내가 보고 듣고 느끼는 저 너머의 초월지대에 내 인지시스템을 넘어서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면 세상을 이루는 것이 그저 스스로의 의식일 뿐이라는 것도 알게 된다. 그때에는 본성이 자신 속에만 있지 않고 세상 전체를 가득 채우는 동질의 것이 된다.
이 때는 걱정도, 두려움도, 분노도, 슬픔도 오직 스스로를 향한 스스로의 허무하고 부질없는 몸짓이 되어 버린다. 세상은 본래 그렇게 온전했고 지금도 온전하며 앞으로도 온전할 것임을 안다. 그렇게 밋밋하고 균일한 세상에서 누군가가 울면 눈물을 닦아주고 누군가가 상처받으면 위로해 주는, 스스로에게 내미는 자연스러운 손짓이 된다. 누군가에게 향하는 손짓이면서도 실제로는 스스로가 그 마음의 향기를 받는 수혜자가 된다. 세상의 어떤 상황이나 손익과도 관련 없이 본성의 숨결로 사는 존재가 된다.
그 친구는 세월이 흘러 이제 어느덧 중년이 되었다. 자신의 마음을 들여다 보면 볼수록 그의 아버지가 아버지의 존재 자체가 아니라 그가 그린 아버지였음을, 도리어 그런 아버지를 그린 것은 그 자신이었음을 깨닫게 되었다. 이제는 도리어 아버지께 사죄드리고 싶은 심정이라고 했다. 단적으로 말할 수는 없지만 그 아버지 그림은 미성숙한 의식 수준을 가진 그 자신의 그림자였던 것이다. 중년이 되어서야 아버지를 자신이 그린 아버지라는 생각덩어리에서 벗어나 존재 자체로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된 것이다. 그것은 아버지 존재의 인정일 뿐만 아니라 자기 스스로의 회복이다. 자신이 만든 이미지에서 스스로 벗어나 있는 그대로의 자신으로 존재하게 되는 그런 순간, 그 이미지를 품고 있는 자신의 고통으로부터 자유로워지는 순간이다.
밖에 어떤 존재가 있다고 여겨지는 그 순간에 바로 내면으로 향하여 스스로를 돌아보고 살펴보는 것이 세상이 내면의 투영인 줄 아는 이의 삶의 자세다. 무언가 심각하고 두꺼운 무게감으로 느껴져 온다면 그것 자체가 이미 스스로 채색한 그림이라는 것을 잊지 않으면서 말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