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무리 좋거나 괴로워도
아주 오래전에 아들이 한 말이 마음에 걸려 속이 상한 적이 있다. 아들을 불러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었다. 그때 아들이 한 말에 정신이 번쩍 들었다.
" 엄마, 제가 한 말 때문에 속상하셨어요? 미안해요. 저도 모르게 나간 말이 엄마를 그렇게 만들었네요. 그런데 며칠이나 지난 이야기를 아직도 마음에 담고 계셨어요?"
마음에 담고 있는 것, 그것이 바로 자신이다.
지금 억울하고 속상한 것을 마음에 담고 있다면 바로 그것이 자신의 삶이요 자신의 모습이다.
군자는 일이 생기면 비로소 그때서야 마음이 나타나고 일이 지나고 나면 마음도 따라서 비워진다는 말이 있다.
그 말은 우리네 존재의 본성이 빈 마음이라는 뜻이다. 그 빈 마음이 불교에서 말하는 부처요, 모든 존재의 본성이다. 세상 모든 것은 흘러간다. 그 흘러가는 것을 한 지점을 초점화하여 자신의 마음 공간에 쌓아두는 것이 바로 인간의 가장 어리석은 점이요 그것이 바로 고통이다.
부처도 우리와 똑같이 피가 흐르고 배가 고픈 사람이었다. 그리고 똑같이 의식이 있는 존재였다. 그러나 부처와 우리의 차이는 단 하나, 그 의식공간 속에, 마음 공간 속에 무엇을 담느냐의 차이뿐이었다.
사람이 태어나면서 갖는 권리는 행복할 권리이며 의무가 있다면 서로 사랑할 의무밖에 없다고 헤르만 헤세는 말했다.
사람이 태어나 이루어야 할 가장 태생적 소명이 있다면 그 소명은 바로 본성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본성으로 존재하는 것이 존재로서 가장 지고한 행복을 누리는 삶이요 존재 자체로서 무조건적인 사랑으로 존재하는 삶이다.
바람이 숲에 불어와 나무들을 뒤흔들어 소리가 나지만 지나가면 아무 소리를 남기지 않듯이.
기러기가 연못을 지날 때 그림자가 남는 듯 하지만
지나가고 나면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듯이.
우리의 두 눈과 두 귀로 인식한 그 모든 세상은 다 흘러가는 무상한 것이지만 그 세상이 담기기 이전에 이미 본래 투명하니 빈 존재의 바탕이 있다. 글자가 있으려면 빈 종이가 있어야 하고, 그릇에 음식이 담기려면 빈 공간이 있어야 하듯 그렇게 빈 마음이 늘 우리에게 존재한다.
그러나 우리는 글자에만 의식이 향하고, 그 안의 내용물인 음식으로만 의식이 향하며 공간에 들어서서도 공간을 가득 채운 사물에로만 의식이 향하여 그 빈 바탕, 그 빈 공간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그 빔을 의식하지 못하는 삶은 쉼이 없는 삶이요 가득 채워진 일거리와 세상의 뭇 소리들로 가득 채워진 소진의 삶, 그야말로 속 시끄러운 삶이다.
그 무엇이든 붙잡지도 않고 밀어내지도 않으면 그대로 충분한 지금 여기의 삶. 그러나 더 본질적으로는 붙잡을 것도, 밀어낼 것도 본래 없음을 알면 저절로 본성으로 존재하게 된다. 흘러가는 물을, 불어오는 바람을 누가 어떻게 붙잡고 밀어낼 수 있는가.
세상만사가 다 그러한데 우리는 눈앞에 보이고 귀로 들리는 그것들이 바로 지금 여기에서 붙잡을 수 있고 밀어낼 수 있는 것들이라고 여기면서 무상한 변화를 알아차리는 관찰력과 인지력을 갖지 못한 것뿐이다.
이미 지나간 일을 아직도 마음에 담고 있다면, 문도 없이 닫고 있는 그 마음, 그릇도 없이 담고 있는 그 마음을 본래대로 환히 열고 그냥 있어보라.
그것이 그 누구도 줄 수 없는 무조건적인 사랑, 본래의 사랑, 스스로의 존재 자체가 스스로에게 줄 수 있는 가장 최선의 사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