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의식의 노크, 긁힘

작은 것에도 상처받는

by 고요의 향기

작은 것에도 자주 긁히는 사람이 있다.

왜 이렇게 자주 긁히고 살아가는 걸까 억울한 마음이 들기도 할 것이다.

어린 시절에 충분한 사랑과 인정을 받지 못했기 때문일까 하고 어린 시절의 부모님과 환경을 괜히 원망한 적도 있을 것이다. 그것도 딱 그렇다고 증빙할 수 있는 것은 없다. 그렇다고 딱 아니라고 할 수 있는 것도 없다. 아무리 좋은 환경이라도 그 누군가에게는 안 좋을 수 있고, 아무리 안 좋은 환경이라도 그 누군가에게는 괜찮을 수 있기 때문이다.

어떨 때는 '나는 그렇게 자주 긁히는 사람이 아니야'라고 스스로를 포장하고 위장하며 살기도 할 것이고 도리어 그것을 증명하기 위해 강함을 드러내며 살기도 할 것이다.


이왕이면 이렇게 생각하는 건 어떨까.

그 누군가에게 긁힘은 일어나지 않으면 좋을 아픔과 상처일 수도 있겠지만 동시에 그 긁힘을 있는 그대로 직면하여 받아들이면 묻어있던 상처를 자유롭게 할 기회이자 이미 본래 자유로운 우리들의 본마음으로 존재할 수 있는 기회이니 다르게 해석하면 도리어 성장의 기회가 그처럼 많다는 뜻이기도 하다.


굳이 성장해야 하냐고, 나는 성장 같은 것은 안 하고 싶고 그냥 편안하게 살고 싶다고 말하는 혹자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힘이 있을 때 고군분투하지 않고 세월이 흘러 이미 굳어진 상태에서는 그 긁힘이 무의식이 되고 삶의 패턴이 될 것이다. 그때는 그 패턴을 전향시킬 힘이 없어지고 성찰할 수 있는 지성도 얄팍해질 수밖에 없다.


있는 그대로를 그냥 보는 일은 용기가 필요한 일일 수 있다. 그러나 이 순간에 우리가 이미 본래 그러한 우리 자신의 본성으로 존재할 기회를 저버리지 않는다.

뱀으로 착각하고 있는 새끼줄을 뱀이 아니고 새끼줄이란 걸 직면하고 끝까지 바라보는 일은 용기가 필요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 두려움의 원인은 저쪽 새끼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내면에 있는 것이다. 차라리 두려운 뱀이라도 똑바로 바라볼 때 잘 대처할 수 있는 존재가 되어 도리어 자신의 내면에 있는 두려움을 내려놓을 수 있다.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일이 왜 중요한가.

어떤 모습, 어떤 상황이든지 관계없이 있는 그대로 바라봄으로써 그 무상한 대상의 변화를 알아차릴 수 있다. 변화는 곧 흘러가고 지나가는 것임을 인식하게 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괴로운 이유는 고정된 무언가를 마음속에 상으로 지니고 있기 때문이다. 그 상을 있는 그대로 바라보면 그 상조차도, 자신이 만든 주관적인 인상조차도 흘러가고 사라지는 무상한 것임을 알게 된다. 고로 그가 스스로 갇힌 스스로의 주관성이라는 감옥에서 벗어 나온다.


자신의 정체성 자체가 스스로를 정체성이라는 벽에 가둔다는 말이 있다. 이미 본래 하나로 연결되어 있는 초월의 차원에서는 무한히 열려있는 끝없는 의식공간일 뿐인데 그 의식공간을 스스로 엄마다, 아빠다 혹은 교사다, 의사다, 검사다 등의 역할과 직업 등으로 정체성의 벽을 세우고 그 속에 자신을 가두어버린다.


보지 못하는 모든 것은 무의식 속에 있다. 그 무의식은 다양한 습관적이고 충동적인 성격 패턴으로 이루어져 쌓여있다. 나도 모르게 올라오는 모든 것, 생각과 감정, 의지까지도 모두 보아야 할 그 무엇이다. 지금뿐만 아니라 어릴 적 느꼈던 어떤 두려움과 불안 혹은 외로움들까지도 모두, 있는 그대로 보면 사라진다.


그렇게 보다 보면 어느 순간엔가는 보이는 것들이 도리어 자신을 벗어남으로 인도하는 안내자임을 알게 될 수도 있다.


감추어 두거나 억눌러 두면 계속 감추고 억눌러야 하는 에너지를 써야 함에도 불구하고 불편함을 모르지만 정작 그것에서 벗어나 보면 그 에너지조차 크게 자신을 낭비하고 있었다는 걸 알게 될지도 모른다. 그리하여 두려움이든 불안이든 혹은 외로움이든 도리어 그것을 자신 속에서 드러나게 하는 대상에게 감사하게 될지도 모른다. 그것이 모두 보는 이에게 주어지는 용기의 대가, 본성의 자유함으로 존재하게 하는 선물인 것이다.


어떤 상황, 어떤 현실이라도 그 속에는 세 가지 면모가 다 들어있다.

자신을 고통스럽게 하는 면, 행복하게 하는 면, 고통과 행복을 초월해 있는 면이다. 고통스러운 면모를 보면, 그다음 행복한 면모도 보인다. 그 둘 다를 볼 줄 알면 그대로 초월의 면에 존재하게 된다. 그 고통과 행복이 변화이기 때문이다. 어떻게 모든 것이 고통일 수 있고 모든 것이 행복일 수가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가 언제나 자유로울 수 있는 이유는 그 모든 고통과 행복이 본래 초월의 면 위에 그려지는 그림이기 때문이다. 이미 본래 드넓은, 바다보다도 더 끝없는 이 무한의식 공간 위에서 흐르는 파도 같은 것을 우리의 습관적인 눈이 고통이나 행복으로 바라보고 해석하는 것일 뿐, 그것은 본래 고통도, 행복도 아닌 것이다.


그러나 그것이 고통일 때보다 행복이라고 느낄 때 훨씬 더 여유 있게 바라볼 수 있어서 초월의 면도 바라볼 가능성이 높아진다. 인간에게는 행복을 추구하는 면보다 고통을 피하고자 하는 면이 더 크게 작동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모든 것을 다 누려본 사람이 초월을 만날 가능성이 높다고 한다. 그러나 한 편으로 불교에서는 좋은 것만 있는 극락세계보다 인간 세계가 더 낫다고 한다. 이유는 마냥 행복한 세계보다는 고통과 행복이 적절하게 있는 상황이 성장할 수 있는 적절한 상황이기 때문이라고 한다.


왜 그럴까. 고통은 인간을 진정 성숙하게 하는가.


고통 자체가 그를 성숙하게 하는 것이 아니라 고통을 보는 것 자체가 그를 성숙하게 한다.


그리하여 고통이 주어지는 이유는 그가 보게 하기 위해서인 것이다. 더 심한 고통이 주어지는 이유도 그러하고 같은 고통이 연이어지는 이유도 그러하다. 그가 보지 않는 한 그는 그 고통의 고리에서 벗어날 수 없다. 그러나 적어도 그 고통은 그 자신을 볼 기회가 되고 봄으로써 그를 고통으로부터 초월하게 한다.


자신을 있는 그대로 보는 사람은 타인도 있는 그대로 볼 수 있다. 타인 또한 자신의 눈으로 바라본 의식의 그림자다. 세상 모든 것은 이미 다 연결되어 있다. 그것이 무엇이든 다 연결되어 있다. 연결되어 있지 않다면 그것은 본래 성품이 아니라 스스로의 주관성이 만든 벽이다. 그러나 스스로 만든 주관성이라는 허상도 자신이 보지 못하면 결국 그 속에 갇혀사는 죄수가 된다. 그것이 바로, 나도 모르게 일어나는 면인 것이다. 나도 모르게 일어나는 그 면을 보아야 한다. 그것이 무의식이다.

자기도 모르게 무의식에 숨겨두고 눌러둔 그것들이 자유로워지기 위해서 삶의 문을 노크하는 것, 그것이 바로 긁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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