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실을 겪은 자의 사계

일상을 물어주는 이를 그리워하며

by 마자

나의 일상을 물어주는 이가 있었다. 다정한 물음이 어느 날 중단되면 내 일상은 초라해지고 무질서해진다. 20대의 사랑은 일주일 치의 일상만 내어주면 이내 괜찮아졌다. 30대의 사랑은 곱절이 걸렸다. 40대의 사랑은 앞선 시간을 더하고 곱해야 괜찮아질 것이란 걸 알기에 가장 먼저 다짐한 것은 물어주는 이를 잊는 것보다 내 일상을 바로 세우는 일이었다.


오전 일정이 없는 날에는 강아지 두 녀석과 산에 오른다. 하산 후 근력운동을 하고 씻는다. 여유가 있을 땐 괄사를 이용해 마사지를 한다. 단백질과 샐러드를 먹고 주방을 깔끔하게 정리한 후 화장과 커피로 포상한다. 오늘 읽을 책을 챙겨 들고 직업인으로 집을 나선다.


그렇게 내 일상은 마음이 가는 글을 읽고 생각이 많아지면 걷다, 걷는 중에 떠오르는 무수한 말들을 쓰고 이를 나누고 싶어 그린다. 그러다 보면 상실은 옅어지고 살아지더라.


그렇게 일상을 보내던 작년 9월 어느 날. 공기에서 가을이 맡아지던 산길을 걷다 마음에 시가 한 편 써졌다.

“마음은 봄, 차 안은 여름, 산은 가을, 지갑은 겨울.”


이 시를 전해 들은 이들은 ‘나도 지갑이 겨울이다’, ‘아니! 나는 동파다’, ‘4계절 겨울을 산다’, ‘힘내라’, ‘엄살이다’, ‘마음이라도 봄이라 다행이다’ 등등 저마다의 경험으로 거들었다. 우리는 4계절의 일상을 살면서 하루에도 4계절이 있다는 그날의 상념을 적어본다.



마음은 봄이다. 말 그대로 마음이 분홍이고 노랑이어서 봄이면 얼마나 좋을까. 봄날의 일교차, 이름만 예쁜 꽃샘추위, 세차 미루기 최적의 핑계인 미세먼지까지 봄은 제법 얄밉다. 작은 자극에도 쉽게 오르고 내리는 내 마음은 봄의 이러한 면과 닮았다. 종일 설렐 것 같다가 이내 쓸쓸해진다. 수집하고 싶은 좋은 문장을 만나 한껏 마음이 차오르다가도 이내 서러워진다. 도로의 유턴 신호처럼 감정이 유턴할 때도 신호가 있으면 2초의 준비라도 할 텐데 찰나의 변화에 나는 자주 기가 막힌다.

그렇지만 다행이다. 그럼에도 나를 봄이게 하는 것들이 있다. 동향인 집에서 11시면 들이침을 멈추는 볕을 사수하기 위한 검정 푸들 콜라는 부지런히 볕 아래 고쳐 누우며 점점 창쪽을 향한다. 내손에 제 먹을 것이 들릴까 은밀하게 나를 쫓는 갈색푸들 코코는 머리를 고정한 채 눈동자만 분주하다. 매일 변하지만 매일 찾아오는 달에게 하루를 털어놓고, 물을 주면 일주일 치의 열기를 내뿜는 화분의 흙냄새에 내 마음의 미움도 식는다. 이들은 그저 제 역할을 할 뿐인데 바라보는 나를 웃게 하고 감사하게 한다. 그래서 마음은 수시로 봄이다.



차 안은 여름이다. 내가 일상을 보내는 공간 중 여름이 가장 먼저 찾아오고 게으르게 떠나는 곳이 차 안이라 여겨진다. 차는 나에게 생계이자 혼코노, 사유의 공간이다. 특고직인 나는 농민들처럼 농번기가 있다. 이 시기에는 하루 대여섯 시간 정도 운전할 때도 있다. 그러다 보니 자연스럽게 차 안에서 도시락을 먹고 간식을 뜯고 커피를 마신다. 음악을 듣고 오디오북을 듣는 것이 일상이다. 그러다 보면 과거의 기억이 소환되기도 하고 현재의 구름과 노을에 감탄하며, 종종 언제까지 이렇게 살 수 있을까 싶은 불안에 잠수하기도 한다.


나는 첫차부터 늘 이름을 지어주었다. 핑순이, 알식이, 제제, 보스, 대박이, 지금의 제니. 이름은 부르는 이의 기대가 반영된다. 태명, 본명, 필명 그리고 연인의 낯간지러운 애칭도 나의 또 다른 정체성이 된다. 나의 경험상 이러한 성질의 것들은 쉽게 지어 부르면 안 된다고 생각한다. 부작용이 크다. 나를 아가야라고 부르던 어떤 시기의 남자 앞에서는 실수라도 욕이 튀어나올까 조심했고, 귀염둥이라고 부르는 어떤 이를 마주할 땐 자꾸 볼에 힘이 들어갔다. 이럴 거면 필러를 맞자는 내면과 소통하면서 말이다.



산은 가을이다. 어떤 꾸밈도 필요 없다. 산은 산이다. 그런 산은 나에게 자존감을 느끼게 해 준다. 존재 그 자체로 충분하다고 말해준다. 이만하면 괜찮다고 전해온다. 산에서 만나는 자연에는 같은 것이 하나도 없다. 한줄기 붙어 있는 잎사귀의 모양, 저마다 꼴을 갖춘 돌멩이, 그늘을 만들어주는 나무까지 이름은 같아도 모습은 제각각이다. 사람도 그렇다. 모두가 고유하고 나름의 매력을 가진다. 그래서 나도 충분하고 괜찮다. 마음이 비교와 자만으로 가득 차는 날에는 산이 응급처방으로 안성맞춤이다.



지갑은 겨울이다. 내 지갑은 마젠타 색 반지갑이다. 색에 비해 소박한 매력을 뽐내는 녀석이다. 지갑 안에 자리한 현금은 복권가게에서 바깥공기를 종종 마신다. 아주 드물게 연말연시에 소상공인의 사기를 북돋기 위해 좋은 사람들과 유흥을 즐기고 현금영수증이 빠진 현금결제를 한다. 받아 든 사장님보다 내가 더 기뻐하며, 서로의 새해를 응원한다. 취기가 가시고 나면 내 지갑은 안팎으로 더 혹독한 겨울을 맞이하지만 비워야 채워진다는 생각으로 해장한다. 다시 현금을 채우며 언젠간 당첨될지 모를 복권을 생각하며 배에 힘을 딱 주고 일터로 향한다.



우리는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상을 원한다. 그게 행복이란다. 나 또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일어나더라도 두 팔 걷어붙일 수 있는 내가 되기 위해 오늘도 내 몫의 일상을 단단히 세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