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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나현 May 07. 2024

술 못 먹는 사람이지만 술맛은 좀 알아요

술알못의 해명

술 한 모금 못 먹으면서 술자리에서는 엄청 깔깔거리며 누구보다 즐거운 사람, 바로 나다.


술자리에서 이런 나를 보고 한 후배가  물었다.

“누나는 근데 왜 술을 안 먹어요?”

나는 되물었다.

“그럼 너는 왜 술을 먹는데?”

“어.....술이 맛있고, 술 마시면 기분이 좋아지잖아요, 그러니까 마시지!!”

“아, 그렇구나. 나는 술이 정말 맛없고, 술 마시면 몸이 점점 아파지면서 기분이 더 나빠지거든. 그래서 안 마셔.”

후배는 바로 납득했다.

“앗, 맛도 없고 기분도 안 좋아지면 진짜 마실 이유가 없네. 어쨌든 짠!”



해명 하나. 기분이 좋아진다?


고백하자면 나는 음주가무 중에 음주만 쏙 빼고 ‘가무’만 가능한 사람이다. 주변에선 술 안 먹고 그게 가능하냐고 맨정신으로 그럴 수 있다는 게 어떤 면에서 더 대단하다고 묻는데, 나에겐 하나도 이상할 일이 아니다. ENFP 성향이라 그럴지도 모른다고 하면 조금 이해하기 쉬우려나. 일명 ‘대가리 꽃밭’이라 불리는 우리들은 항상 즐겁고 행복한 상태가 기본값이다. 즐거운 꽃밭에서 흥얼거리고 있는 머릿속 상태에서는 굳이 술의 도움을 빌릴 필요가 없을지도. 그 넘치는 흥은 술자리에서 기어코 고삐가 풀려 버리는데, 이른바 알코올 대신 흥에 취해 버린다고, 술 마신 사람보다 더 미친 사람처럼 놀아 재끼는 것이다.


더구나 나 같은 경우는 술의 독성 물질 해독에 선천적으로 취약하다보니 술을 마시면 점점 머리가 아프고 숨이 가빠온다. 독이 흥도 꺾고 몸도 넘어뜨려 버리니, 철 없던 20대 어린 시절에는 아무것도 모르고 마셨다가 청담역 승강장에서 다 토하고 다시 잠실역까지 가서 길바닥에서 쓰러져 있는 걸 아빠가 간신히 찾아서 데려온 위험한 일도 겪었다. (지금 매일 출근하면서 청담역에 내릴 때마다 꼭 토할 거 같은 기분은 그래서인지 잠시 의심해봤다) 그러니 기분 좋아지기 위해 일부러 술을 먹을 필요는 없다.


어떤 사람들은 술을 먹어야 진솔한 이야기를 할 수 있다고 하는데, 취중진담? 난 오히려 술 먹고 하는 말을 믿을 수가 없다. 다음 날 기억나지 않는 둥의 변명을 하며 모르는 척 하는 거에 너무 많이 당했고, 술김에 뱉은 말로 함께 있는 사람들의 마음을 칼로 찌르는 사람들이 참 밉다. 너무 내성적이어서 술의 힘을 빌려 진담을 하고 싶은 것까지 말리지 않겠지만, 본인이 항상 술에 취해 있는 상태가 아니라는 사실을 인지하고 맨 정신에도 감당할 수 있을 때 진실을 폭로하길 바란다. 더구나 나는 앞에서 고백한 대로 술에 취하면 몇 번 크게 토하고 잠들어 버려 아무런 대화를 나눌 수 없는 구제불능 상태가 돼버리는 사람이라, 맨 정신으로 진심을 얘기하는 데 단련이 됐다. 물론 고백하기 전에 우황청심원을 먹은 적이 있긴 하지만.




해명 둘, 술이 맛 없다?


서민의 술이라면서 한국인이 가장 많이 마신다는 소주. 처음 소주를 한입 삼켜보고는 뭐 이렇게 맛없는 걸 마시는지 의문이었는데, 이 질문을 하면 항상 술맛을 모르는 얘 취급 당하기 일쑤였다. 술맛만 모르면 다행이게. 인생의 쓴맛을 모르는 얘 취급당하는 건 더 속상하다. “크흑, 이게 진정 인생의 쓴맛이지!”하며 소주 한 모금 탁 털어 넘기고, 소주잔을 탁 내려놓으며 인생의 쓴맛을 안주로 씹는 그들만의 세상에서 나는 세상물정 모르는 풋내기일 뿐이었다. 아아, 내 인생도 그렇게 쉽지만은 않았는데, 왜 그 맛없는 맛이 인생의 쓴맛인건가요. 인생의 쓴맛도 좀 맛있는 맛 속에서 느끼면 안 되는 건가요, 이런 말을 마음속에 담고 살다가, 드디어 만났다. 소주가 맛없는 건 당연하다는 사람. 지금의 남편이다.


그의 지론에 따르면 현재 우리나라에서 유통되는 소주는 맛이 없을 수밖에 없다. 흔히 알고 있는 녹색병 소주는 희석식 소주인데 값싼 주정(에틸알코올)을 만들어 낸 뒤 물에 희석하고 각종 첨가물을 넣어 인위적인 맛이 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주정만 만들어 내면 그만이기 때문에 원재료도 값싼 탄수화물을 대량의 효소로 분해해 만든 당분을 이용한다. 이에 반해 전통 방식의 소주는 사실 증류식 방식이라 원재료의 맛과 향을 간직하고 있고 감미료를 추가하지 않아 훨씬 맛이 좋을 수밖에 없다고. 지금의 소주는 1960~70년대 우리나라가 배 곪던 시절에 쌀을 아끼기 위해 전통주를 제한하는 법을 만들었기 때문에 어쩔 수 없이 나온 근본 없는 녀석이었고, 그래서 그렇게 맛이 없는 소주가 탄생한 것이다. 아아, 그 맛없음은 정체는 알코올 맛이어서 그랬구나! 소주가 맛이 없을 수밖에 없는 이유를 알고 약간 안심했다. 내 입맛이 틀리지 않았다는 확신과 소주를 거부할 명확한 이유를 찾았으니 자신 있게 말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전 소주 맛없어서 안 먹어요!”




해명 셋, 인생이 씁쓸한 나머지 술이 달다?


그 후 풍미가 훌륭한 술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위스키 매니아인 남편 옆에서 맛본 위스키 한 모금에서 숙성된 오크향이 입안 가득 퍼지는 게 참 좋다는 걸 알게 됐다. 와인을 좋아하는 친구를 만나 와인이 얼마나 다양한 맛을 담고 있는지 알게 됐는데, 여전히 술에 약해서 딱 두 모금밖에 못 마시지만 씁쓸한 맛 뒤의 숙성된 과일향이 나는 게 좋다. 맥주는 그래도 세 모금 정도 마시지만 목 넘김이 좋은 라거보다는 상온에서 오래 숙성해서 특유의 향이 있는(비록 훨씬 쓰지만) 에일이 더 맛있는 거 같다. 술을 못 먹는 내가 술에서 발견한 맛의 비밀은 숙성된 맛이었다. 맛 좋은 술 한 모금에는 아주 오래된 시간이 담아낸 깊은 맛이 있었다.


누군가는 술보다 인생이 더 씁쓸하기 때문에 술이 쓰지 않다고 말하는데, 나에게 있어 여전히 술맛은 쓰다는 것이 진실에 가깝다. 어쩌면 내가 진짜 인생의 쓴맛을 맛보지 못해서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쓴맛 뒤에 진짜 맛이 숨겨져 있다는 걸 알고 나니 쓴맛에 나름 정이 들었다. 시간이 숙성해낸 맛. 그건 아주 오래 시간 공들여 만들어 낸 진국 같은 맛이다. 더구나 쓴맛은 그 끝에 내밀한 향을 감추고 있어 쓴맛을 맛본 사람만 그 진짜 맛을 알 수 있는 매력이 있었다. 그게 술의 쓴맛, 아니 인생의 쓴맛을 대하는 나의 자세다. 한 잔의 술을 앞에 두면 쓴맛 뒤에 또 어떤 깊은 맛이 있을지 내심 기대하는데, 대체로 이런 술은 비싸다는 게 흠이다. 흠흠, 술도 못 먹는 주제에 아는 척은 이제 그만해야겠다. 술꾼들 화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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