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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여름 Sep 30. 2024

잊어야 할 것과 잃어가는 것

당신의 기억도 분리수거가 필요하다

계절이 변하고 서랍장을 정리하다 보면 개어진 옷 사이에서 오래된 머리카락이 나올 때가 있다.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내며 그 옷을 입었던 계절의 나를 떠올린다. 사람의 머리카락에는 기억이 묻는 것은 아닐까. 그래서 이별을 하면 긴 머리를 단발로 싹둑 자르는 게 클리셰가 된 것 일지도 모른다. 우리는 살면서 많은 것들을 경험하지만 모든 것들을 기억하지는 못한다. 어떤 기억은 잊어야만 하고 어떤 기억은 자연스레 잃어가게 되는데, 그것이 머리카락이 자라나고 다시 잘라 내고, 일부는 자연스레 빠져나가는 것이 꼭 사람의 기억과 닮았다.


망각은 신이 인간에게 준 최고의 선물이라는 말이 있다. 좋은 일은 돌에 아로새겨 오래 기억하고, 나쁜 일은 모래에 새겨 흘려보내라는 말처럼, 우리는 겪은 일들을 잘 정리하여 잊어야 할 것과 잃어가는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하지만 살다 보면 좋은 기억은 주먹 쥔 손에 담긴 모래알처럼 서서히 빠져나가고, 그 속에 숨겨져 있던 나쁜 기억들만 작은 자갈처럼 남아있을 때가 많다. 남은 자갈들은 우리 안을 뒹굴며 생채기를 만들고, 좋은 기억이 되려 버틸 수 없게 만들기 때문에, 우리는 더더욱 잊어야 할 일과 잃어가는 것들을 명확히 해야 할 필요가 있다.




처음 정신과를 방문했을 무렵 가까운 친구 모임이 있었다. 나는 아주 큰 결심을 하고 그들에게 정신과에 방문하게 되었고, 이후 강박장애를 진단받아 약을 복용 중이라는 고백 아닌 고백을 했다. 행여 너무 안쓰러워하거나 나를 이상하게 생각하지는 않을까 했던 우려와는 달리, 그들은 자신 역시 정신과 약을 복용한 적이 있음을 고백했다. 현대인들에게 우울증은 감기와도 같다는 말처럼, 나와 내 친구들 뿐 아니라 누구에게나 한 번씩 정신적 감기가 찾아오고 이를 저마다의 방법으로 해결해 나가고 있다.


그런데 여러 사람의 이야기를 듣다 보면 그 시작이 '직장 생활이 너무 어렵다'거나 '생활고에 시달린다'는 원인을 가진 사람도 있지만, 그보다 더 많은 사람들이 유년 시절의 상처에서 비롯된 기질적인 우울감에 괴로워하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나의 경우에도 어린 시절의 가난과 이로 인한 가족 간의 갈등이 기질적인 불안함을 만들어 냈고, 남들의 눈치를 더 많이 보고 예민하게 반응하는 것이 곧 강박장애의 뿌리가 되었다. 이미 수십 년이 지난 일인데, 나는 그 계절이 되면 혹은 비슷한 상황이 되면 다시 유년 시절의 나로 돌아가 삶에 대한 기력을 잃게 되는 것이다.


살면서 실패의 경험이 늘어나게 되면 이러한 기질은 더욱더 공고해지고 잊어야 할 것들은 더욱더 깊이 각인되게 된다. 변하지 않는 사실은 우리가 살아가야 할 삶은 지금이라는 것이다. 과거의 상처로 고통받는 동안 우리가 잃어버리면 안 될 오늘의 행복들-그것이 아주 작고 사소할 지라 하더라도-을 잃고 있는 것은 아닐까. 계절이 지나면 지난 계절의 옷을 서랍에서 꺼내고, 새로운 계절의 옷을 차곡차곡 쌓아가는 것처럼, 잊어야 하는 기억들은 비워내고 잃어가는 기억들을 붙잡아 둘 필요가 있다.




강박장애를 가진 나의 경우에는 꼭 유년 시절의 경험이 아니더라도 몇 달 전에 했던 사소한 말실수 하나도 잘 잊지 못하는 경향이 있다. 일상생활을 잘 이어 나가다 가도, 샤워를 하다가 혹은 양치를 하다가 불현듯 떠오르는 생각에 한참을 괴로워하곤 한다. 실로 쓸모없는 행동이 아닐 수 없다.


지나간 기억은 이미 쏘아져 과녁에 박힌 화살과 같다. 이미 날아간 화살은 붙잡을 수 없으며, 과녁에 꽂힌 화살을 뽑는다 할지라도 과녁엔 이미 선명한 자국이 남아 있을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는 대신 새로 당기는 활시위에 집중해야 한다. 우리는 매일매일 새로운 활시위를 당기고 있고, 새롭게 쏜 화살이 과녁의 정중앙을 맞혔을 때의 기억을 잃지 않도록 소중하게 간직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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