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순간부터 누군가에게 나는 책이 어울리는 사람이 되었다. 나를 잘 모르는 이들이 나를 책을 많이 읽는 사람으로 간주한다. 이것은 타인의 시선에 포착된 나의 욕망일까. 내 심연에 흐르는 욕망은 대타자의 욕망일까. 첫 번째 기억에 이어 두 번째 기억으로 시간의 흐름을 옮겨본다. 실재인지 환상인지 모를 오래전 기억과 선명한 목소리가 떠오른다. 나의 응시는 책에 무한 가치를 두었던, 책에 파묻혀 지냈던 두 사람을 향한다. 대타자의 욕망에 충실한 삶이 당연한 것일까. 내 감각은 어디를 향하고 있을까. 사유가 이끄는 방향에 몸을 맡기는 바람에 감각의 흐름이 차단당한 것은 아닐까. 누군가는 잘 가고 있다고, 누군가는 이제 나의 길을 가라고 말한다. 책이라는 단어에 대한 연상보다 텍스트를 읽는 순간을 떠올려본다. 나에게 책이란, 나침반이나 등대와 같이 길라잡이 역할을 해줄 것이라는 환상에 불과한 것은 아닐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삶의 여정에서 방향을 잃었을 때, 무의식적 상수에 의해 내 손이, 내 발이 그리고 내 눈이 책을 향한다. 지금 이 시간도 텍스트의 향연에 빠져든다. 주체는 무의식적 상수의 메커니즘에 종속된 허상에 불과한 것일까. 이것이 고유한 '나'라고 간주할 수 있는 주체는 무의식적 상수라는 코드에서 벗어날 수 없는 '안'이 아닌 감각, 즉 '겉'이 아닐까. 나의 '겉'은 어느 곳을 향하고 있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