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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도일기

기억의 흔적을 찾아서

by 파란시간

애도하는 자는 죽은 사람 때문에 슬퍼하고, 멜랑콜리아에 빠진 자는 죽은 사람과 함께 죽는다. 프로이트는 애도와 멜랑콜리아 둘 다를 인간이 상실의 경험에 반응하는 방식으로 보았다. 그렇다면 그는 이 둘을 어떻게 구분하는가? 애도는 우리가 잃게 된 사랑하는 사람으로부터 우리 자신을 떼어내는 길고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애도의 기능은 살아남은 자의 기억과 희망으로부터 죽은 자를 떼어놓는 것이다’라고 프로이트는 썼다. 그러니까 애도는 슬픔과 다르다. 슬픔은 상실에 대한 반응이고, 애도는 슬픔을 처리하는 방식이다. 우리가 잃은 사람과 관계된 모든 기억과 기대를 되살리면서 그 사람이 영원히 사라졌다는 판단에 이르러야 한다.

대리언 리더



사망신고서

나는 어쩌면 내 두 다리로 걸어가, 행정복지센터 문을 열고 들어가서 해야 하는 이 의례적인 행위를 하지 못했을 것이다. 대신해 줄 누군가가 있었기에 가능했던 것일까. 형제들이 모인 방, 작은 핸드폰 화면에 새겨진, 낯선 종이가 담긴 사진을 읽을 수도 저장하기 버튼을 누를 수도 없다. 어쩌면 영원히 '저장하기' 버튼을 누를 수 없을 것이다. 나를 증명해야 하는 서류가 필요할 때, 그 종이에 새겨진 부모님의 이름 옆에 낯선 두 글자를 마주하는 순간 마음 어딘가 묵직한 울림을 느낄 것이다.


아버지의 곱고 하얗던 얼굴을 떠나보내던 날, 머리에 꽂았던 하얀 리본 핀을 서랍에 넣지 못하고 화장대 위 작은 도자기 그릇에 올려놓은 것처럼…. 아침저녁 화장대 앞에 서서 하얀 핀을 스치듯 바라보며 위안이 되었던 것처럼…. 이제 아버지와 달리 고통의 흔적이 남아있던 어머니의 마지막 얼굴을 뒤로하고 머리에 꽂았던 하얀 리본 핀을 아버지의 하얀 핀 옆에 나란히 두었다. 하얀 리본 핀 옆에 딸아이가 머리에 꽂았던 내 핀과 달리 검은 줄이 있는 리본 핀을 나란히 놓으며 조금 위안을 느꼈던 것을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하얀 핀을 보며 그분들에 새겨진 아니 새겨져 있다고 생각했던 나를 지우고 새로운 나를 만들어나가야 한다는 현실을 어떻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읽을 수도 풀어낼 수도 없이 다양한 감정이 엉켜버린 실타래를 그저 서서히 하나씩 집어 길고 긴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빨려 들어갈 것 같은 커다란 공백의 무한한 힘을 이겨내기 위해, 그 힘에 맞서 살아가기 위해, 마치 다른 사람의 이야기처럼 한 발자국 떨어져서 바라볼 수 있기 위해 한 편의 이야기를 만들어야 한다.


위독하시다는 소식을 듣고 떨리는 다리와 두 손으로 핸들을 붙잡고 달려가 어머니의 마지막 숨결을 마주한 날, 늦은 밤 너머 이러저러한 일들을 서로 상의하에 결정하고 아버지를 보내드렸던 곳에 어머니를 남겨두고 집으로 돌아와, 내 마음은 실감할 수도 형언할 수도 없이 꿈틀대는 복잡 미묘한 감정을 지그시 누르고, 내 몸은 지금을 살기 위해 오늘 반드시 해야 할 일을 마치기 위해 글자판을 두드렸다. 새벽이 올 때까지 다른 날보다 더 완벽을 기해 마무리했다.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전화 너머 마음이 아프다고 울먹이며 이야기하는 이에게 입으로는 위로와 공감 그리고 용기와 희망을 이야기했지만 마음 어딘가에 나도 큰일을 겪었다고, 내 마음은 너보다 더 아프다고 말하는 목소리가 울려 퍼지는 것 같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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