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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한테 그렇게 90도로 인사하지 마세요, 부서장님

by 피넛버터

입사 후 처음으로 참석하게 된 회식. 평소 회식을 그다지 즐기는 타입은 아니지만 그렇다고 해서 '저는 아이가 있어서 회식 참석이 어렵다'라고 적극적으로 발을 뺄 재간도 없는 타입이다. 게다가 내가 오전 담당, 남편이 저녁 담당이라서 내가 좀 늦게 들어가도 아이들 케어에 큰 지장은 없다. 오히려 아이들과 남편은 엄마가 없는 이 저녁시간을 아주 자유롭고 느긋하게 보내겠지.


1차 회식을 끝낸 뒤 이어 들어간 아이스크림 가게에서 이야기 주제는 달갑지 않은 주제 '나이'였다. 누구는 몇 년 생이고 누구는 몇 년 생이고, 그리고 결국 내가 이 30명 가까이되는 부서에서 제일 연장자라는 것도 이제 더욱 뚜렷하게 공개하게 되었다. 물론 내가 입사하기 전부터, 경력도 많고 나이도 꽤 많은 분이 (심지어 부서의 최고책임자인 부서장보다도 나이가 많은 분이) 들어올거라며 이미 입소문이 났었을게다. 회사라는 곳은 매일 보던 얼굴 그다지 보고 싶지 않지만 또 봐야하고 식구보다 더 자주 겸상하는 곳이라, 재미난 이야깃거리는 늘 환영받는 장소다. 아마 '최고령자'라는 키워드는 내가 입사하기 전부터 꽤 흥미로운 토픽이었을 듯하다.


참고로, 이 회사는 직급이 없는 회사다. 서로 '님'으로 부르는 곳이다. 부서 전체를 총괄하는 부서장이 있고, 그 아래 작은 단위인 팀을 관리하는 팀장이 있다. 하지만 이런 타이틀을 붙여서 부르는 경우는 커피가 고플 때 또는 부서장의 생일 일 때뿐이다. 평소 호칭은 그냥 '님'이다. 나도 그 흔한 '님' 중 한 명이다. 물론 경력 년수 등에 따라 HR내부적으로는 좀 더 세부적인 레벨이 있지만 그건 큰 의미 없는 것 같다.


회식 자리에서 알고 보니 이 부서 사람들의 평균 나이는 30대 초반이다. 조금 시니어라고 하면 30대 후반. 그리고 그 시니어들은 이제 늙었다고 몸이 예전 같이 않다고 한탄한다. 이걸 듣고 있는 40대 중반은 어떻게 반응해야 하나 싶었지만 굳이 아무 말하지 않았다. 아직 그렇게 농담을 주고받을 정도로 친하지도 않고 내가 넉살이 좋은 아주머니 콘셉트도 아니다.


아무튼, 달콤한 아이스크림을 먹으며 씁쓸하게 나이 이야기를 끝내고 밖을 나서자, 2차 갈 사람들이 따로 모이기 시작한다. 애 엄마인 나와 술에 취미 없는 몇몇은 2차 그룹에게 인사를 하고 지하철역 방향으로 몸을 돌리려는 찰나였다. 2차 그룹의 선두에 속해있던 부서장이 갑자기 내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푹 숙이더니


'안녕히 들어가십시오!!'


하고 아주 큰소리로 인사를 한다. 심지어 90도로 몸을 꺾으면서.


서 설마 나.. 나한테 하는 건가?


그런가 본데?

지금 이 방향에 서 있는 사람들을 쓱 훑어봐도 다들 앳된 얼굴들이다. 아무리 봐도 나한테 하는 것 같다.


조직원을 30명 가까이 관리하고 있는 저 부서장이 지금 겨우 일개 '님'에게 저렇게 90도 폴더 인사를 했단 말이야? 나보다 겨우 1년 늦게 태어나신 저분이? 왜인지 모르겠지만 기분이 썩 좋지 않다. 나는 그의 폴더 인사에 당황하지 않은 척 얼굴에 웃음 스티커를 어설프게 붙이고는 보통의 인사를 하고 돌아섰다.


집에 오는 지하철 안에서 생각했다.


'아 나는 부서장 그보다 더 깊숙이 허리를 숙여 인사를 하고 왔어야 했나?'

'아예 바닥에 세배를 할걸 그랬나'


아니다. 이런 생각들도 괜한 자격지심인 거 같다. 술에 살짝 취해 그런 인사 정도야 웃으며 할 수 있는 거지 뭐 이런 걸로 곱씹고 그러나.


우리는 각자의 자리에서 각자 경력을 쌓아왔다. 부서장을 단 그 자는 그의 루트에서, 평범한 구성원으로 입사한 나는 나의 경력 루트에서 그냥 각자의 할 일을 하다가 만난 것뿐이다. 육아와 그리고 개인적인 이유로 경력 단절 없이 다니지 못했기에 부서장이라는 자리에는 올라가 보지도 못했지만 내가 너보다 더 잘하는 게 있고, 네가 나보다 더 잘하는 게 있을 뿐이다. 물론 그 사회적 가치가 너의 것이 더 비싸고 희소성이 있다는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다.


이렇게 어설픈 논리를 엮어 본다. 그래야 마음이 편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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