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참외맛식혜 Sep 06. 2023

처음 마음을 기억하기

영국에서 동성애인과 함께 하는 'Co-habiting'

무언가에 의지하고 싶을 때가 있다. 갑자기 하늘에서 정답이 뚝 떨어지면 좋겠다고 생각한다. “이건 이렇게 하고 너는 이렇게 될 것이다!” 풍의 그리스 예언이라도 듣는다면 머릿속 온갖 생각들이 정리되지 않을까. 


지난 5월부터 지금 8월까지, 나에게는 크게 3가지 문제가 있었고 있다. 6년 간 함께 사귄 애인과의 관계에 갑자기 권태기가 찾아왔고, 지금 집 계약이 만료되면 새로운 도시로 이동하고 새 집을 구하는 계획을 했으며, 3년 6개월 다닌 지금 직장에 대한 실망감과 거듭되는 실패에 회의가 찾아왔다. 이 문제들이 하나씩 텀을 두고 왔으면 조금이라도 나았을까. 한 번에 나를 덮친 고민들 틈에서 나는 깨달았다. ‘나에겐 이 문제를 한 번에 해결할 힘이 없구나.’ 그렇게 애인과 다투면서, 혹은 혼자 속으로 불안해하며 참 많은 시간을 보냈다. 


나는 걱정이 많은 사람이다. 그리고 슬프게도 이건 유전이라고 부모님께 우기고 싶다. 모든 것이 편안하고 안정적인 날에도 나는 길을 걷다가 벽돌이 떨어져 죽는 상상을 하는 등 무언가 크게 잘못될 것을 가정한다. 그러니 애인과 헤어저 혼자인 나를 그리거나, 면접을 앞두거나, 한시라도 빨리 새로운 집을 찾아야 할 때 나에게 밀려올 그 걱정의 정도는 굳이 말할 필요도 없을 것이다. 이렇게 걱정이 찾아올 때 명탐정 코난처럼 냉철하게 현실을 파악하고 내가 할 수 있는 것들에 집중해 차근차근 계획을 세운다면, 이런 글을 쓰고 있지 않겠지. 뭔가 심각하게 잘못된 나를 상상하는 건 괴롭지만 중독적이어서, 심장이 저릿한 그 기분에 잠식당할 때가 많다.


그렇다면 안정적인 대인관계, 도시, 직장을 선택하고 그것에 만족하면 어떠한가? 내가 구축한 세상을 보살피며 살면? 안타깝게도 세상은 그리 단순하지 않아서 이런 나에게 모험과 도전, 그리고 새로움은 큰 동력이 되고 나는 자극을 쫒는 사람이다. 그래서 ‘새로운 나라에 가고 싶다!’ ‘새로운 직장을 가지고 싶다!’라는 아이디어가 한번 머릿속에 박히면 밤낮으로 그 계획을 세우고 추친한다. 내가 3개월 만에 영국에 오는 준비를 마친 것도 그 덕분이다.


내가 이 문제로 괴로워할 때, 한국에 계신 나의 상담 선생님을 자주 물으셨다. “처음 영국에 가기로 했던 이유가 뭐죠?” 그러면 나는 답한다. “애인이랑 같이 있으려고요.”


2022년 1월 코로나 상황이 악화되며 다시 국경이 닫히는 모습을 보고 나는 어느 날 결심했다. ‘나는 이제 장거리 연애 한단다.’ 우리가 화면으로만 서로를 만난 지 약 2년이 돼 가는 시점이었다. 그렇게 나는 2개월 동안 애인을 한국으로 오게 했고, 그 이후에는 영국 워킹홀리데이 비자를 받아 이곳에 왔다. 다니던 회사가 좋았던 것도 있지만 다른 직장을 구할 엄두가 안 나서 전근 신청을 했고, 면접을 통과해 운이 좋게 영국으로 빠르게 직장을 옮길 수 있었다. 처음 맨체스터에 왔을 때 집을 못 구해 발을 동동 굴렀지만 기적적으로 도심 근처의 스튜디오를 구할 수 있었고 별 탈 없이 1년 간 그 좁은 공간에서도 잘 지냈다. 그러니까 나는 해외 살이를 경험하려고 좋은 직장을 가지려고 이곳에 온 것이 아니었다. 사랑하는 사람과 매일 함께 얼굴을 보고 밥을 해 먹고 가끔은 놀러 다니려고 이곳에 왔다. 


그리고 나는 이를 ‘처음 마음’이라고 부르기로 했다.


처음 마음을 인식하자 머릿속 안개가 조금은 걷히는 듯했다. 그것은 마치 안개가 뿌연 항구에서 등대가 보내는 한 줄기 빛이었다. 애인과의 권태기는 대화로 서서히 해결했다. 그 과정이 절대 매끄럽지는 않았지만 (한 명이 집을 나가는 사태까지 갔으니) 그동안 보지 않으려고 했던 우리 사이의 문제를 인식하고 각자에게 바라는 부분 그리고 노력했으면 좋겠는 부분을 며칠간 솔직한 대화로 풀어갔다. 결혼한 부부도 설거지로 싸우고 헤어진다는 말이 있는 것처럼 그 범위는 생각보다 방대했다. 누가 몇 시에 자고 밤에 불을 키는 것에서부터, 데이트를 하는 횟수, 외식하는 빈도, 그리고 서로 표현하는 방식까지 ‘00은 원래 그래’라며 넘어갔던 사소한 것들을 모두 풀어냈다. 그리고 눈물 한 바가지를 쏟았다. 그랬더니 마치 한 여름 소나기가 오고 날씨가 맑아지는 것처럼 이전보다 더 투명한 우리가 보였다.


도시와 집 문제는 좀 더 복잡했다. 애인으로부터 ‘영국 어디던 함께 가겠다’는 동의를 얻어냈지만 더 높은 직급으로 가고 싶다는 소망 때문인지 이동하는 것이 쉽지 않았다. 7월이 돼서는 마음이 조급해져서 런던, 글라스고, 바스 등 영국 어디라도 내가 하고 싶은 부서에 자리가 나면 지원했는데 2주 간 연락이 없다가 ‘새로운 기회에 관심을 가지고 지원해 주어서 감사하다는’ 즉 서류에서 탈락했다는 오토 메일을 받으며 절규했다. 더구나 도시가 정해지지 않으면 집을 구할 수가 없고 불편함을 감수하더라도 셰어 하우스에서 살다가 스튜디오를 알아봐야 하는 상황이 예상되었다. 


8월 나의 생일이 지나고 나서도 실마리가 보이지 않자, 나는 드디어 결심했다. “나 지금 집 계약 연장할래.” 그 말인즉슨, 불편한 침대에서 같이 자고 햇빛이 잘 들지 않는 이곳에서 또다시 일 년을 보내겠다는 결정이었다. 도시를 이동하지 않고 머물겠다는 것도 의미했다. 애인은 나만 괜찮으면 자기는 좋다고 했다. 이미 7월 초 부동산 업체가 전화했을 때 집계약 연장 제안을 거절했던 나였다. 나는 요가를 갔다 온 어느 이른 평일 아침 떨리는 마음으로 부동산에 전화를 걸었다. 


전화를 걸어 상대편의 응답을 듣는 일은 영국에서 굉장한 행운을 요한다. 몇 번을 걸어도 자동 응답으로 넘어가거나 아예 전화번호 없이 챗봇만 운영하는 회사들이 이미 많다. 그날 나는 30분 동안 계속해서 다이얼을 돌렸다. 전화기록에 한번, 두 번, 세 번 … 여섯 번, 일곱 번이 되자 상대편이 수화기를 들었다. 떨리는 목소리로 나의 상황을 속사포처럼 전했다. 당담부서 번호를 알려주겠다는 상대편의 대답. 조금 김 빠졌지만 어찌하리. 나는 틀리지 않게 번호를 적고 다시 다이얼을 돌렸다.


“해당 집은 이미 매물이 올라왔고 관심을 표한 고객들이 있는 것 같아요. 우선 집주인이랑 확인해 볼게요.” 나는 감사하다는 말만 반복하며 떨리는 손으로 전화를 종료했다. 커피와 아침이 눈앞에 있었지만 먹히지 않았다. 실시간으로 애인에게 소식을 전하는 와중에 다시 한번 전화가 왔다. “집주인이 월세 변동 없이 일 년 연장하시겠대요. 진행할까요?” 나의 워홀 비자는 5월에 만료된다. 1년을 연장하면 8월 말에 집 계약이 만료되고 최대 3개월 월세를 버려야 할 수도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안정감을 선택하기로 했다.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진행하겠다’고 말했다. 최근 내린 결정 중 가장 자신감에 찬 나를 발견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애인에게 전화를 걸었다. 월세가 오르지 않았으니까 다른 곳으로 이사 가는 것보단 손해가 없을 거라고 잘했다고 말했다. 바로 그 순간부터 주문한 아침 식사를 마치고 어느 때보다 안정된 마음으로 출근했다. 그래 나 잘했어. 


이제 나에게는 직장 문제만이 남았다. 3년 6개월 동안 몸 담근 이 조직에 대한 애착도 있고 인정받는 기쁨도 있다. 무엇보다 영국에 와서 나를 진심으로 아껴주고 함께해 준 사람들 모두를 이곳에서 만났다. 부서 이동을 신청해 두어 그 결과를 기다리고 있지만 전처럼 안절부절못하진 않다. 나는 처음 마음을 기억하고 있으니까. 생활에 지장이 없을 만큼 벌이가 보장되는 곳에서 행복하게 일하면 그것으로 목표를 이룬 거니까. 최선을 다해 준비하면서도 그 결과에 연연하지 않으려 한다. 이제는 어른의 마음으로 조금은 덤덤하게, 나를 내려놓을 줄 알게 되었다.         


덧붙이자면, 이 글을 포스팅하는 9월 기준 정말 가고 싶었던 팀에 가지 못하고 지금도 같은 자리에 있다. "면접을 잘 봤지만 더 경험 있는 사람을 원한다."는 매니저의 말을 받아들이는 게 쉽지 않았지만 뭐 어찌하리. 결과는 바꿀 수 없는 법. 후회가 남지 않을 만큼 열심히 임했고 좋은 경험으로 남기려고 한다. 지금은 내가 할 수 있는 다른 것들 그리고 내가 좋아하는 것들에 더 집중하려 한다. 얼마 전 회사 동료가 빌려줘서 닌텐도 3DS를 처음으로 만져봤다. 이십 대 후반에 퇴근하면 포켓몬 하는 재미로 살고 있다. 


Primrose Hill 프림로즈 힐 - 런던 사는 친구가 알려준 보석 같은 장소
이전 21화 “여기 자주 오세요?” - 펍에서 친구 사귀기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