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에서 동성애인과 함께하는 'Co-habiting'
혼자여서 힘들지만 혼자여서 할 수 있는 것들이 있다. 나에게는 혼자 하는 여행이 가장 대표적이다. 전날 분주하게 짐을 챙기고 이른 아침 씩씩하게 기차역으로 행할 때 만해도 가슴은 두근두근, 혼자서 뭐든 할 수 있을 것 같은 기분이 든다. 미처 살펴보지 못한 현지 식당들과 카페를 기차 안에서 검색하고, 오늘 일정을 자다 보면 마치 완벽한 하루가 이미 눈앞에 펼쳐진 것 같은 뿌듯함. 더구나 혼자라서 그 누구의 눈치도 보지 않아도 된다!
막상 여행지에 도착해서 지도를 켜고 목적지로 이동하지만 중간에 길을 잃거나, 고대하던 식당에 가서 주문을 할 때 입이 하나뿐이라 한 가지를 골라야 할 때. 그리고 공원을 산책하며 분주하게 사진을 찍다가 문뜩 심심할 때. 여행지에서 혼자라 아쉬운 순간들이다. 물론 그럴 때 나는 애인에게 메시지를 보내 내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보고 한다. 몇 번의 대화가 오가면 내가 혼자라는 사실을 잊고 잠깐 괜찮아지지만, 결국 함께 있는 것과는 다르다.
그래도 나는 혼자 여행하는 이 행위 자체를 하나의 수련이라고 생각할 때가 있다. 함께해서 기쁘고 각자의 취향을 나눌 때, 그리고 그게 서로의 맘에 쏙 들 때의 환희는 엄청나다. 하지만 가끔 나에 대한 물음에 선뜻 대답하게 어려운 순간들이 생긴다. “내가 뭘 좋아하지?”, “내가 뭘 먹고 싶지?”, “내가 뭐 하고 싶지?”. 이런 질문들이 생길 때 나는 짐을 챙겨 애인을 뒤로하고 훌쩍 떠난다. 혼자 하는 여행에서는 나 말고 의지할 사람이 없다. 나 스스로 이것저것 도전하고 부딪치다 보면, ‘아 내가 처음 가는 곳에서도 10분 만에 맘에 드는 카페를 찾을 수 있구나.’ 혹은 ‘배가 고파서 식당으로 직진하다가도 너무 예쁜 공원이 나오면 다 잊고 공원에 앉아 책을 읽을 여유가 있구나.’ 등을 깨닫게 된다. 숨겨진 나만의 슈퍼파워를 하나씩 발견하는 기분이랄까?
그리고 또 하나 알게 된 나의 슈퍼파워. 나는 여행지에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말을 거는 것뿐만 아니라, 심지어 친구로 만들 수 있다!
혼자 케임브리지에 갔던 때의 이야기이다. 케임브리지에 오래 거주했던 어머니의 친구분을 만나러 가는 게 주된 목적이었지만, 런던이 워낙 가깝기 때문에 한국 친구들을 볼 겸 두 도시를 3박 4일 일정으로 함께 묶었다. 맨체스터에 사는 지방러(?)로서 런던에 갈 때마다 깜짝깜짝 놀란다. 정말 사람이 너무 많다! 기차를 내리면 가장 가까운 튜브역에 갈 때까지 수 백명의 사람과 열을 맞춰 이동하게 된다. 튜브 안에도 사람이 가득. 거리에도 사람이 가득. 카페에도 사람이 가득. 굳이 센트럴 런던 만을 이야기하는 게 아니라 외곽으로 나가도 내가 맨체스터에서 하루 만나는 인파에 2배는 맞닥뜨리게 된다. ‘나 나름 서울 살았었는데…’ 이제 한국 가면 적응 못하겠네.
그렇게 복잡한 런던을 뒤로하고 케임브리지에 도착한 나는 기차를 탈 때부터 느껴지는 여유로움에 감탄했다. 물론 애매한 평일 오후라서 그랬겠지만 기차 안이 텅텅 비고 대부분 학생 혹은 점잔은 승객들이었다. 케임브리지에서 갈 만한 식당과 카페들을 좀 찾다가 인터넷이 너무 느려 책을 읽었다. 영국은 기차 안에 와이파이가 제공되지만 있으나 마나. 더구나 벌판을 지나면 데이터도 안 터진다. 허허.
조용하고 깔끔하고 점잔은 (영국에서는 이런 분위기를 포쉬 Posh 하다고 표현한다) 도시에서 여유로운 하루를 보냈다. 어머니의 친구분을 만나 한참 수다를 떨고 맛있는 점심을 얻어먹었다. 그리고는 도시 자체가 오래된 대학 건물로 둘러 쌓인 풍경에 감탄했다. 20-30분 정도면 한 바퀴를 돌 수 있는 작은 사이즈이지만, 박물관 하나를 보고 나오니 시간이 오후 4시. 모든 대학 건물들과 관광지가 문을 닫아버려 그 뒤로는 별 것을 할 수 없었다. 겉에서 아름다운 캠퍼스를 힐끗 보고 사진을 찍을 뿐. 캠브리지는 다시 와야겠다.
그렇게 케임브리지의 첫날이 급하게 마무리되고 나는 무거운 가방을 이끌고 숙소로 들어갔다. 내가 예약한 곳은 기차역 근처에 개인이 운영하는 작은 배드 앤 브렉버스트. 환한 얼굴로 나를 맞이한 주인 분은 런던에서는 보기 힘든 친절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작게 덧붙였다. “예약하신 방은 싱글 룸도 아니고, 작은 싱글룸도 아니고, 매우 작은 싱글룸이에요. 그러니까 놀라지 마세요.” 맞다. 개인 여행자인 나는 한 푼이라도 더 아끼기 위해 그 숙소에서 가장 작은 방을 예약했고 그 방에는 화장실도 딸려있지 않아 매번 계단을 타고 위로 올라가 별도의 화장실을 써야 했다. 뭐 그럼 어떠하리. 하룻밤 묶는 나에게는 깨끗하고 조용한 싱글 룸을 좋은 가격에 구할 수만 있으면 땡큐였다. 더구나 집에는 없는 티비도 볼 수 있다! (물론 막상 켜니 광고만 나오고 볼 게 없어 금방 껐지만.)
시간은 5시가 넘었고 여름이라 아직 숙소 창 밖으로 햇살이 비추고 있었다. 가방을 내려놓고 침대에 누워 ‘아직 못한 게 많은데…’라는 생각만 하며 좀처럼 뭘 해야 할지 몰랐다. 여행 왔는데 몸은 지쳤고 가게들은 이미 문을 닫았다. 잠깐 누워 에너지를 충전한 나는 이렇게 시간을 허비하기가 싫어 밖으로 나갔다. 가방만 내려놓았을 뿐인데 몸이 한결 가벼웠다.
숙소가 있는 동네는 도심과 조금 거리가 있는 주거지였다. 학생들로 추정되는 사람들이 여유롭게 자전거를 타고 다녔고, 길가에는 집으로 향하는 사람들이 보였다. 평일이었으니까 다들 고된 하루를 마치고 집에 가서 편히 쉴 생각을 하고 있었을 것이다. 그렇게 뚜벅뚜벅 걷다가, 나는 갑자기 웅성거리는 소리에 옆을 쳐다보았다. 그리고 그곳에는 펍이 있었다. 나는 깨달았다. ‘오늘 나의 하루는 저곳에서 마무리되겠구나.’
사람이 많아 보여 잠깐 머뭇거리다가, 딱히 주변에 갈 곳도 없다는 생각에 과감히 들어갔다. 규모가 꽤 있는 펍이었는데 다들 퇴근하고 술 한잔 하러 왔는지 사람들로 가득 찼다. 자리를 찾아 둘러보던 나는, 입구 쪽에 앉은 한 사람에게 눈이 갔다. 그는 4인 테이블에 피자를 먹으면서 혼자 신문을 읽으며 앉아있었다. 나랑 비슷해 보이는 나이라는 생각에 미치자, 여기서 맥주라도 마시려면 저기 앉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요동치는 심장 소리를 들으며 그에게 물었다. “혹시 일행이 없으면 여기 앉아도 괜찮아요?” 신문을 읽다가 나를 올려다본 그는 조금 놀란 듯했지만 괜찮다고 말했다. 그리고 나는 바에서 맥주를 한잔 시켜 그 테이블로 돌아왔다.
나는 책을 읽으며 맥주를 마실 심산이었고, 그도 마침 신문을 읽고 있으니 잘 됐다고 생각했다. 더구나 내가 이렇게 용기를 낼 수 있었던 건 맨체스터에서 친구들과 맥주를 마시던 어느 날, 한 커플이 빈자리에 앉아도 되냐고 물은 뒤 그들과 신나게 수다를 떨었던 기억이 있기 때문이다. 오늘 이 펍에서도 밑져야 본전. 얘기가 통하면 친구가 되는 거고 아니여도 책을 읽으며 맥주를 마시면 되는 것이다.
그렇게 한 10분 간 서로 아무 말 없이 앉아 맥주를 마셨다. 피자를 거의 다 먹어가는 그의 동태를 조금 살피면서 ‘저기 혹시’하며 말을 걸어도 될지 수 만 번 생각했다. 혼자 펍에 갔다가 친구를 사귀면 얼마나 멋질까 하는 생각이 점점 커졌다. 마침내 나는 용기를 내서 물었다. “여기 사람이 진짜 많네요. 혹시 자주 오세요?”
내가 말을 걸기까지 필요했던 용기가 무색하게 우리 둘의 대화는 물 흐르듯 이어졌다. 스코틀랜드 글라스고에 사는 그는 출장으로 케임브리지에 왔다가 저녁을 먹으러 이 펍에 왔다. 케임브리지를 가끔씩 오는데 그때마다 이 펍에 종종 들른다고 한다. 지난번에는 사람이 별로 없었는데 본인도 오늘 왔다가 깜짝 놀랐다고. 그렇게 우리는 서로가 사는 도시에 대한 이야기, 일에 대한 이야기, 각자의 애인에 대한 이야기 등등 여러 가지 주제로 끊임없이 대화를 나눴다. 원래는 맥주 한 잔 정도로 끝날까 싶었는데, 서로 맥주를 사주며 두 잔이나 더 마시게 되었다. 새로운 사람을 만나고 서로 알아가는 게 이런 느낌이었구나, 새삼스레 다가왔다. 그리고 내가 먼저 말을 걸었다는 게 놀라웠다. 역시 사람들이 왁자지껄한 펍에서 맥주를 마시면 용기가 생기는 걸까.
매튜와 나는 우연히 펍에서 만난 것치고는 공통점이 여럿 있었다. 나는 영국인 애인을, 그는 스웨덴 애인을 두고 있었는데 그래서 서로 각자의 국가를 방문하고 문화적 차이를 발견하고, 더 나아가 서로의 언어를 배우는 것에 대해 이야기했다. 스웨덴어를 조금씩 배우고 있다며 나에게 몇 가지를 알려주는 매튜를 보며 한국어를 배우는 나의 애인이 생각났다. 둘 다 외국어를 배우기에 가장 좋은 리소스를 두고 있으면서도 별로 활용하지 못한 다는 점도 비슷했다. 나는 계속하다 보면 언젠가는 잘하게 될 거라고 응원하면서도, 애인과 스웨덴어로 대화하는 연습을 해보라며 막상 못하는 약속을 권유했다. 나는 애인에게 한국어를 쓰려고 하면 온몸이 거꾸로 솟는 거 같이 부끄러워진다.
컴퓨터와 관련된 회사에서 근무하는 그는 이번에는 케임브리지 학생들에게 자사를 홍보하기 위해 이곳에 왔다고 했다. 나도 마침 컴퓨터와 관련된 업종에 근무하고 있어 3번째 맥주를 마시면서 우리는 업계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를 했다. 물론 그는 엔지니어고 나는 세일즈를 하기 때문에 어느 정도의 갭은 존재했지만, 컴퓨터에 관심이 없다면 나누기 어려운 깊은 이야기들을 할 수 있어 새로웠다. 더구나 그는 구글 안드로이드 폰을 사용하면서도 안드로이드를 신뢰하지 않아 커스텀 OS를 설치해서 쓰는, 조금은 괴짜였다. 그런 긱 Geek 한 모습이 재밌어 나는 구글 폰을 쓰지 않음에도 이것저것 물어봤다. 역시 조금만 시야를 넓이면 참 재밌는 사람들이 많다.
펍 스태프들이 이제 문을 닫아야 한다고 말할 때쯤 우리는 겨우 문을 나섰다. 서로의 번호를 주고받으면서 언젠가 일생에서 또 마주할 수 있기를. 그때까지 안녕하기를 빌었다. 개인의 공간을 중요시 여기는 영국이라고 생각했는데, 타인이 문을 두드리면 생각보다 쉽게 열고 환영해 준다는 것을 다시금 느낄 수 있었다. 언젠가 글라스고에 간다면 로컬 펍에 가서 다시 맥주 세 잔을 연거푸 마시며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