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에게서 나에게로. 나에게서 당신에게로.
영화 <인터스텔라>에서 쿠퍼와 그의 딸 머피를 이어준 것은 중력이다. 중력은 유일하게 시간과 공간의 제약을 받지 않고 존재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가 알다시피 중력은 수단일 뿐이며, 그 둘을 이어준 근원의 매개체는 바로 생이별한 부녀 간의 사랑이었다. 사랑은 어찌보면 중력보다 쉽게, 중력보다 강력하게 시공간을 초월하여 너와 나를 연결해주는 다리일 것이다.
작별하지 않는다.
하지만 작별하지 않기란 여간 힘든 게 아니다. 미지의 블랙홀 속으로 뛰어들어야 하고, 폭설이 내리는 야산을 올라야 하며, 어찌보면 죽음을 마주해야 하기도 한다.
그 모든 역경에도. 정신이 아득해지는 공포와 고통 속에서도 마침내 사랑으로. 사랑하는 마음으로 도달한 그곳. <인터스텔라>의 테서렉트일 수도, 인선의 공방일 수도 있는 그곳.
그곳에는 미처 눈길 주지 않은, 어찌보면 작별하고자 마음 먹은 기억들이 남아 있다.
휘날리는 눈발에 덮이는 기억들은 힘겹게 들춰내지 않으면 흔적조차 사라지고 만다.
노력하지 않으면 잊어버리고 만다. 애쓰지 않으면 작별하게 된다.
인선의 절단된 손가락. 신경이 끊어져 더 이상 통각도 느끼지 못할 수 있는 그 두 개의 손가락.
신경을 살리기 위해서는 3분마다 한 번씩 바늘로 손가락을 찔러 신경망을 자극해야 한다.
포기하면 편할까? 3분마다 바늘로 손가락을 쑤시는 고통은 상상조차 하기 싫다. 재활치료를 그만두면 손가락 두 개를 움직일 수도 감각을 느낄 수도 없겠지만, 더 이상의 고통도 느끼지 않을 것이다.
4·3 사건과 같은 역사를 들춰내보면 고통스러울 따름이다. 당위 없는 죽음. 다시금 사람의 문명이 얼마나 가식적인지 느끼게 되는 생물의 영역. 사람에서 인간으로 전락한 몸뚱아리들. 무수한 백골.
작별하지 않으려면 그런 아픔을 마치 3분 마다 한 번씩 찔리듯 느껴야 하는 것일까?
그렇다면 나와 같은 사람들. 역사적 비극과 맞닿은 부분이라고는 같은 나라에서 태어났다는 것밖에 없는 우리들. 우리들은 어떻게 고통을 감내할 수 있을까? 나는 정심의 얼굴도 본 적이 없는데. 나의 제주도는 휴양지일 뿐이었는데. 내가 설레는 마음으로 내딛은 발 밑에 인간의 몸뚱아리와 백골 잔해가 있는지도 몰랐는데.
그럼에도 나는 책을 읽으며, 마주해야 한다고 느꼈다. 잊지 않고 싶었다. 고작 나 하나일 수 있지만 인선과 같이 3분 마다 한 번은 아닐지라도 때때로 떠올릴테다. 작별하지 않을테다.
그것은 이 책을 사랑하게 되었기 때문일까. 혹은 파묻힌 그 몸뚱아리들 속에 나의 사랑하는 아내와 딸의 모습이 겹쳐보여서일까. 알 수 없다.
그럼에도 확실한 건 작별하지 않겠다는 다짐이며, 그것이 한강 작가가 책을 쓰는 마음이자 바람이지 않았을까 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