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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rl K Nov 11. 2021

행복한 아이로 자라게 해 주세요.

서로가 서로를 잘 몰라서


어느 날부턴가 매일 점심시간에 도서관을 찾는 아이가 하나 있었다. 튼튼한 체격에 넓은 어깨 그러나 어딘지 모르게 부드러운 얼굴에 수줍어 보이는 표정을 갖고 있는 남학생이었다.


처음엔 쭈뼛거리며 들어와 한쪽 구석에 조용히 자리를 잡았다. 곧 연습장을 꺼내 매일 열심히 무언가를 그렸다. 하루는 궁금해서 가까이 다가가 보았더니, 연습장 가득 그려진 건 순정만화에 나올법한 캐릭터들이었다.


   남학생들이 그림을 그리는 경우를 자주 보았지만, 주로 그리는 건 로봇이나 기계였기에 이 아이는 좀 특별하다고 생각했다. 순정만화 풍의 그림이 너무 예쁘다고 칭찬해 주었더니 주영이는 반색하며 기뻐했다. 그렇게 주영이는 매일 연습장을 그림으로 가득 채웠고, 그림을 그리는 내내 무척 행복해 보였다.


   바쁜 점심시간이 마무리될 때쯤 종종 나는 주영이가 앉은자리로 가서 새로운 그림 그린 것들을 구경하고, 칭찬과 격려도 아끼지 않았다. 그릴수록 조금씩 더 실력도 나아졌다. 주영이의 그림은 디테일하지는 않았지만, 순수함과 애정이 가득 담긴 작품이었다.


   언젠가부터 주영이의 표정이 점점 어두워져만 갔다. 신경이 쓰였지만 어떻게 물어봐야 할지 조심스러웠다. 아이들이 적게 온 날 기회를 잡아 그림을 그리는 주영이의 맞은편에 앉았다. 무슨 일이 있냐고 물었더니 머뭇거리며 대답을 망설였다.


   언제든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으면 말해달라고 하고 일어나려는데, 주영이가 내 팔을 잡았다. 사실은 계집애들이나 그리는 그림을 그린다고 허리띠로 맞았노라고 내게 말했다. 아버지가 군생활을 오래 하신지라 모든 것이 남자다운 주영이의 형과는 달리 순정만화를 그리는 취미를 가진 주영이를 이해하기 힘들어하시는 것 같았다.


   너무 놀라 말을 잇지 못하는 내게 주영이는 처음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하며 소리도 못 내고 울었다. 너무 안쓰럽고 안타까웠다. 그래도 아빠가 널 사랑하지 않는 게 아니라 너에 대해 잘 몰라서 그러시는 거라고. 괜찮다고, 네가 잘못된 게 아니라는 이야기를  해주었다.


   주영이는 그렇게 1년 내내 도서관에서 그림을 그렸고, 나도 자주 주영이와 그림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리고 다시 학교를 옮겨야 할 순간이 왔다. 방학이라 미처 인사도 못하고 떠난 것이 아쉬웠다. 가끔 생각이 나서 같이 근무하던 동료 샘에게 주영이의 소식을 물어보곤 했다. 다행히 잘 지내고 있다고 하셔서 안심이 되었다.

   

   새로운 학교에 적응하고 바쁘게 지내느라 시간은 금세 흘렀다. 1년 반쯤 지난 후에 중3이 되었을 주영이의 진학결과가 궁금해서 동료 샘에게 연락을 했다가 가슴 아픈 소식을 듣게 되었다.

   

   주영이는 계속되는 체벌로 인해 여린 마음이 힘들어하고 괴로워하다가 정신질환까지 발병했단다. 병원을 다녔지만 상태는 점점 심각해졌고 결국 해리성 인격장애와 정신분열증까지 진단을 받게 되었다고 한다.


   그때 주영이랑 같이 있어줬다면, 주영이가 마음을 털어놓을 곳이 있었다면, 좀 더 적극적으로 도우려 했다면 그런 상태까지는 안 되지 않았을까? 그 후회가 계속 내 마음을 괴롭혔다. 아무것도 해줄 수 없어서, 곁에 있어주지도 못 헤서, 내 탓인 것만 같아서 너무 미안한 마음에 자꾸만 눈물이 났다.


   결국 주영이는 입원을 하고 전문적인 치료를 받고 있다고 했다. 그다음부터 소식은 전혀 듣지 못해서 10년이 지난 지금도 가끔 주영이를 떠올릴 때면 미안한 마음이 먼저 올라온다. 어디에 있든 주영이가 하고 싶은 것을 하면서, 마음 편하게 살고 있길 기도할 뿐이다.


   아이가 정신적으로 그리고 정서적으로 아프고 난 후, 부모님은 얼마나 후회를 하셨을까. 그냥 서로가 서로를 잘 몰라서 일어나는 이런 일들이 더 이상은 어디에서도 벌어지지 않기를. 우리 아이들이 마음 편하게 하고 싶은 걸 헤도 괜찮은 세상이길.  '그대로 살 수 있게 해 주세요.' '각자가 행복한 아이로 자라날 수 있게 해 주세요' 하고 어른들에게 부탁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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