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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arl K Dec 03. 2021

열혈 소녀 전기

열정 넘치는 황소고집

페이스북 메시지로 반가운 진규의 청첩장을 받았다.


   진규는 내가 학교도서관에서 일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만난 여학생이다. 그녀의 청첩장을 받고 보니 세연이가 생각났다. 1학년 4반의 소풍 사진 속에 나와 함께 웃고 있는 네 명의 자그마한 여학생들.



   그중에서도 유난히 도서관을 제 집처럼 드나들던 두 아이가 있었다. 바로 진규와 세연이었다. 진규는 차분하고 진중한 성격으로 나이답지 않게 어른스러웠다. 반대로 세연이는 말투도 빠르고 하고 싶은 말도 많았다.


   같이 이야기를 하다 보면 진규와는 대화가 잘 이어졌다. 본인이 하고 싶은 말이 우선이던 세연이는 다른 사람의 말을 잘라먹기 일쑤였다. 세연이는 본인과 의견이 다르다 싶으면 목에 핏대를 세워가며 잘 따지는 편이기도 했다.


   그런 세연이의 기세에 눌린 같은 반 아이들은 두 가지의 반응을 보였다. 하나는 못 이기는 척 세연이의 말에 수긍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세연이와 더 이상 관계를 이어가지 않는 것이었다. 언제나 함께 다니던 진규도 세연이를 지지해 주는 걸 가끔 부담스러워했다.


   세연이도 의견이 달라 관계가 끊어진 친구들에 대해 나름대로 속상해했다. 그럴 때면 생각의 차이가 너무 커 어차피 친구가 될 수 없었다고 말하며, 스스로를 달래기도 했다. 그때도 진규는 항상 세연이 곁에서 중립을 지키려고 노력했다.


   세연이가 가진 절대적 자신감의 근거는 책에 있었다. 교사로 일하시는 부모님 덕분에 어릴 때부터 수많은 책들을 읽고 자란 아이였다. 세연이는 자신이 획득한 정보나 지식에 대해 거의 완벽에 가까운 신뢰와 믿음을 보였다. 사람들이 그것에 대해 부정하는 표현을 하려고 하면, 분노의 속사포 디스 랩을 쏘아대곤 했다.


   어느 날, 평소처럼 자신이 관심 있는 사회비평 분야의 책을 빌리러 왔던 세연이가 내게 한 가지 질문을 했다.


  “선생님! 저 궁금한 게 있어요.”

  “어, 뭔데? 물어봐”


  “우리 학교도서관에 인터넷 소설이 있나요?”

  “응. 인터넷 소설 있지. 귀여니가 쓴 건 거의 다 있을 거야.”


  “대체 그런 책은 왜 사는 거예요?”

  “나도 인터넷 소설을 별로 안 좋아하긴 해. 그래도 애들이 좋아하고 많이 신청하니까 안 사줄 수는 없지.”


  “애들이 좋아하고 많이 신청하면, 인생에 전혀 도움이 안 되는 책들도 사 주시는 건가요?”

  “전혀 도움이 안 된다는 건 네 기준이지. 그 책을 읽고 싶어 하는 다른 친구들도 있잖아.”


  “저는요. 인터넷 소설이 세상에서 제일 쓸데없다고 생각해요.”

  “그래? 그럼 세연이는 어떻게 하고 싶은데?”

 

  “인터넷 소설을 전부 다 불태워 없앨 수만 있다면, 도서관에 불이 나더라도 그 정도의 희생은 감수할 수 있을 것 같아요.”


   단호하게 확신에 차 말하는 세연이를 보며 나는 대답할 말을 잃었다. 본인이 싫어하는 한 가지를 위해 도서관 전체를 태워도 된다니.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는 건가 하는 생각에 조금은 위험하게 들렸다. 세연이를 다시 설득하려 했지만, 그녀는 “선생님은 그렇게 생각하지 않으시나 보네요.” 하고 도서관을 쌩~하니 나가버렸다.


   며칠 후 진규가 나를 찾아왔다. 세연이를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다고. 교실에서 열린 토론시간에 세연이가 자신의 의견만 강력하게 주장하다가 다른 아이들에게 대놓고 외면을 당했다는 것이다. 한 명의 아이가 세연이에 대한 불만을 터뜨렸고, 거의 모든 아이들이 세연이의 일방적인 태도를 싫어한다고 공개적으로 발언했다고 한다.


   그 얘기를 듣는데, 머리를 한 대 맞은 것만 같았다. 나 역시 그런 아이였기 때문이다. ‘책을 많이 읽어서 나는 다 알아’ 하는 근거 없는 자신감으로 은근히 잘난 척을 많이 했었던 것 같다.


그런 태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얼마나 편견에 사로잡히기 쉬운지 세연이를 통해 깨달았다. 어린 시절의 미성숙하고 철없는 내 모습으로 알게 모르게 주변에 끼쳤을 피해를 생각하니 나의 옛 친구들에게 몹시 미안해졌다.


   세연이는 진규가 말릴 새도 없이 울면서 교실을 뛰쳐나갔다고 했다. 마음이 아팠다. 나도 그랬던 것처럼 세연이가 겉으로는 센 척 하지만, 마음이 무척 여린 아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세연이는 남들 앞에서 미리 강한 척을 하는 아이였다. 자신이 약하다는 것을 들키고 싶지 않았던 것뿐이다. 어른스러운 진규에게 대신 세연이를 잘 다독여주라고 부탁했다.


   세연이를 통해 한쪽으로 치우친 사고에서 나오는 행동이 사람들을 얼마나 지치게 하는지 깨닫게 되었다. 세연이의 일을 통해 ‘나는 잘못이 없어. 괴롭힌 아이들이 문제야’라는 생각에서 벗어나, 학창 시절의 내 모습을 처음으로 반성하게 되었다. 덕분에 스스로를 돌아보고 조금은 성장하는 계기가 생겼다.


   진규와는 요즘도 SNS를 통해 가끔 소식을 전한다. 세연이의 소식을 물어보면 대학생 때 이후로는 연락이 잘 안 된다고 한다.


   세연이가 읽었던 수많은 책들을 잘 소화시켜, 자신의 삶에 골고루 적용할 수 있는 어른으로 성장했기를 소망한다. 어설펐던 내가 여러 경험을 통해 나를 반성하고 성장할 기회를 얻었던 것처럼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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