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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해헌 서재 Feb 23. 2018

<시(詩) 읽기 좋은 날>

“그날, 내 가슴속으로 들어온 시(詩)”

<시(詩) 읽기 좋은 날>

“그날, 내 가슴속으로 들어온 시(詩)”


                               강 일 송


오늘은 우리가 중고등학교 다닐 때 교과서에서 한 번씩 보았던 시들 중 저자가 엄선한 시

몇 편을 보려고 합니다.


저자인 김경민은 서울대학교 대학원 국어교육과에서 시 교육을 공부하고, 동일여자고등학교

에서 국어교사를 지냈다고 합니다. 시에 대해 남다른 애정을 가지고 있는 그녀는 이 책이

첫 번째 대중서라고 하네요.


시 몇 편을 함께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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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선운사에서

            최영미(1961~)


꽃이

피는 건 힘들어도

지는 건 잠깐이더군

골고루 쳐다볼 틈 없이

님 한 번 생각할 틈 없이

아주 잠깐이더군


그대가 처음

내 속에 피어날 때처럼

잊는 것 또한 그렇게

순간이면 좋겠네


멀리서 웃는 그대여

산 넘어가는 그대여


꽃이

지는 건 쉬워도

잊는 건 한참이더군

영영 한참이더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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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 번째 시는 요즘 한창 더 유명해진 <서른, 잔치는 끝났다>의 최영미 시인의 작품입니다.

선운사는 듣기만 해도 특별한 심상이 여럿 떠오르는 곳이지요. 동백꽃이 유명해서 동백꽃과

연관이 많은 곳이고, 이 시대 최고의 시인이라고 일컬어지는 미당 서정주의 고향인 고창에

있는 사찰이기도 합니다.


시인은 꽃과 사랑, 꽃과 그대를 대비하면서 짧게 선명하게 시를 이어갑니다.

꽃은 피는 건 힘들지만 지는 건 쉽더라고 합니다. 하지만 쉽게 졌지만 잊혀지는 것은

처음 피는 것처럼 어렵습니다. 특히 동백꽃은 한잎 한잎 지는 것이 아니라 효수당하듯이

뚝 하고 꽃송이 자체가 떨어지는 것으로 유명하지요.


이러한 동백꽃의 떨어짐과 사랑이 떠나감이 같음을 절묘하게 비유합니다.

핌과 짐의 미스매칭(mismatching)! 인생에는 이러한 것들이 참 많겠지요.


한 편 더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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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 원

       윤동주(1917-1945)


살구나무 그늘로 얼굴을 가리고, 병원 뒤뜰에 누워, 젊은 여자가

흰옷 아래로 하얀 다리를 드러내놓고 일광욕을 한다. 한나절이 기

울도록 가슴을 앓는다는 이 여자를 찾아오는 이, 나비 한 마리도

없다. 슬프지도 않은 살구나무 가지에는 바람조차 없다.


나도 모를 아픔을 오래 참다 처음으로 이곳에 찾아왔다. 그러나 나

의 늙은 의사는 젊은이의 병을 모른다. 나한테는 병이 없다고 한

다. 이 지나친 시련, 이 지나친 피로, 나는 성내서는 안 된다.


여자는 자리에서 일어나 옷깃을 여미고 화단에서 금잔화 한 포기

를 따 가슴에 꽂고 병실 안으로 사라진다. 나는 그 여자의 건강이-

아니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라며 그가 누웠던 자리에 누워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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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시>로 잘 알려진 윤동주 시인의 <병원>이라는 시입니다. 우리는 흔히 윤동주 시인을

순수하고 고뇌하는 젊은 지식인으로 알고 있는데, 부드러운 그의 성품이 아주 잘

나타난 것이 이 시가 아닌가합니다.


느릿느릿 돌아가는 무성영화를 보듯 장면은 펼쳐집니다. 병원 뒤뜰에 누워 일광욕을

하는 하얀 다리의 여자. 그 여자도 오래 가슴을 앓고 있고, 나도 오래도록 아픔을

가지고 이 병원에 온 것이지요. 동병상련의 감정과 함께, 요즘 말로 뭔가 약간의

썸을 탈것만 같은 팽팽함이 있습니다. 하지만 마음 약한 시인은 다가가 말을

걸지 못하고, 그 여자가 사라지자 가만히 그 자리에 몸을 누이기만 합니다.

그 여자의 건강이 빨리 회복되기를 바란다고 말하다가 자신의 마음이 들킬라 얼른

내 건강도 속히 회복되기를 바란다는 없는 말을 덧붙입니다.


이 시를 윤동주가 1940년에 썼다고 하니 벌써 80년이 다 되어 가는군요.

하지만 이 시 하나만 보아도 윤동주 시인의 마음이 얼마나 맑고 여리고 순수한지

그 마음이 느껴집니다.


마지막으로 한 편만 더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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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 시 (遠視)

        오세영(1942~)


멀리 있는 것은 아름답다.

무지개나 별이나 벼랑에 피는 꽃이나

멀리 있는 것은

손에 닿을 수 없는 까닭에

아름답다.

사랑하는 사람아.

이별을 서러워하지 마라.

내 나이의 이별이란 헤어지는 일이 아니라 단지

멀어지는 일일 뿐이다.

네가 보낸 마지막 편지를 읽기 위해선 이제

돋보기가 필요한 나이.

늙는다는 것은

사랑하는 사람을 멀리 보낸다는

것이다.

머얼리서 바라볼 줄을

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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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세영 시인의 이 시를 읽고 있노라면 자연히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끼게 됩니다.

딱히 회자정리(會者定離)라는 고사성어를 끄집어내지 않더라도, 사람은 누구나 누군가를

만나게 되고, 결국은 그 누군가를 떠나보내게 됨은 필연입니다. 그런데 시인은 이 슬픈

떠남을 서러워하지 마라고 위로합니다. 단지 이별은 헤어짐이 아니라 멀어지는 일이고

멀어지고 멀리서 바라볼수록 더 애틋하고 더 소중해지는 법이라고 말합니다.

무지개, 별, 벼랑 끝의 꽃은 모두 닿을 수 없지만 더 애타게 그립고 아름다운 존재들이지요.

갈수록 조금씩 더 멀리 볼 줄 알아야겠습니다.


오늘도 평안한 하루 되십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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