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학동네시인선 032, 박 준 시집”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문학동네시인선 032, 박 준 시집”
강 일 송
오늘은 요즘 서점가에서 핫(Hot)한 시집 한 권을 보려고 합니다.
저자인 시인 박준(1983~)은 서울에서 태어났고 경희대학교 대학원 국어국문학과를 나왔
습니다. 2008년 계간 실천문학 “모래내 그림자극”으로 등단하였고, 2013년 신동엽문학상
시부문 수상을 하였습니다.
뛰어난 감성을 지닌 젊은 시인의 시 몇 편을 함께 보실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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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
박 준
철봉에 오래 매달리는 일은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폐가 아픈 일도
이제 자랑이 되지 않는다
눈이 작은 일도
눈물이 많은 일도
자랑이 되지 않는다
하지만 작은 눈에서
그 많은 눈물을 흘렸던
당신의 슬픔은 아직 자랑이 될 수 있다
나는 좋지 않은 세상에서
당신의 슬픔을 생각하는 것은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처럼
아득하다
나는 이제
철봉에 매달리지 않아도
이를 악물어야 한다
이를 악물고
당신을 오래 생각하면
비 마중 나오듯
서리서리 모여드는
당신 눈동자의 맺음새가
좋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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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릇한 젊디젊은 나이의 시인은, 전혀 그의 나이답지 않은 감성의 그늘을 우리에게 전해주고
있습니다. 슬픔은 자랑이 될 수 있다고 말합니다. 어릴 때 철봉에 오래 매달리면 친구
들이 부러운 눈으로 쳐다보았지요. 하지만 이제는 이것이 자랑이 되는 나이가 아닙니다.
몸이 아픈 일도, 눈이 작은 외모도, 쏟아내었던 눈물도 자랑이 아니라합니다.
오히려 작은 눈에서 많이 흘렸던 당신의 그 슬픔이야말로 진정한 자랑이 될 수 있다합니다.
예전부터 울면 바보야, 라는 말이 있었지요. 이런 관점에 의하면 슬픔은 바보스럽고 자랑이
될 수 없지만 박준 시인의 시에서는 알맞게 자랑이 됩니다.
땅이 집을 잃어가고 집이 사람을 잃어가는 일은 참으로 슬픈 일입니다. 이에 이어져 사람이
사람다움을 잃어가고 인정을 잃어가겠지요. 시인은 이런 슬픔이 사람을 살리고 사회를
살리고 자연을 살린다고 느끼나봅니다.
꽃보다 사람이 아름답다는 안치환의 노래 가사처럼, 이런 사람냄새 물씬 풍기는 사람의
눈동자의 맺음새가 시인은 참 좋다고 말하고 있습니다.
다음 시를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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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
박 준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
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
는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야 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
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
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
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
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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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번 시는 이 시집의 제목으로 쓰인 대표시입니다. 시집의 제목에 오른 시는
시인의 마음에 가장 드는 시이거나, 시집의 시상 한가운데를 흐르는 무언가가 있어서
일것입니다.
시를 읽다보면 시인은 젊은 나이지만 많은 삶의 어려움을 통과해 왔음을 느낄 수
있습니다. 그는 간결한 생계의 수단을 가지고 있고, 주위에는 날씨를 흔쾌히
이야기해주는 새로운 동료가 있나봅니다.
얼굴도 모르는 이의 자서전을 써주고 생계를 이어가는 글쟁이는 쓰다보니 어쩔 수 없이
자신의 일기장과 닮은 글을 쓰게 됩니다. 당연한 이치겠지요.
이 시집을 관통하는 가장 핵심적인 문장은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일 것입니다. 아픈 사람은 보통 약을 지어 먹습니다.
하지만 시인은 당신의 이름을 지어서 하루도 아니고 며칠은 먹었다 하네요.
어떤 용한 약보다 당신의 이름은 나를 치유하고 나를 일깨우는 이름인가 봅니다.
내 이름이 이 세상 누군가에게 힘들 때 지어먹을 보약같은 이름이 된다면 참으로 기쁘고
감사한 일일 것입니다.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시인의 믿음처럼 나도 이 세상에서 만나는
만남 또한 모두 아름다웠으면 좋겠다는 마음입니다.
마지막으로 한 편 더 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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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억하는 일
구청에서 직원이 나와 치매 노인의 정도를 확인해 간병인
도 파견하고 지원도 한다 치매를 앓는 명자네 할머니는 매
번 직원이 나오기만 하면 정신이 돌아온다 아들을 아버지
라, 며느리를 엄마라 부르기를 그만두고 아들을 아들이라
부르고 며느리를 며느리라 부르는 것이다 오래전 사복을 입
고 온 군인들에게 속아 남편의 숨은 거처를 알려주었다가
혼자가 된 그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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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는 몇 줄의 문장 속에 우리 현대사의 아픔이 그대로 고스란히 드러나는 시입니다.
아들을 아버지라 부르고 며느리를 엄마라 부르던 할머니가 구청 직원이 오면 순식간에
정신이 돌아옵니다. 얼마나 평생에 걸쳐 뼈아픈 경험을 했으면 그러할까요.
사복을 입은 군인에게 거처를 알려줘 남편을 잃은 할머니의 그 긴 세월에 걸친 회환,
죄책감, 분노, 외로움은 그 누구도 상상하기 힘들 것입니다.
그러한 경험은 구청 직원이 오면 치매도 누르지 못하는 기억의 돌출을 만들어냅니다.
시는 힘이 강하다 합니다. 몇 줄의 시가 현대사의 아픔을 절절하게 전해줍니다.
마지막으로 시인의 말로 마무리하려고 합니다.
“나도 당신처럼 한번 아름다워보자고 시작한 일이 이렇게나 멀리 흘렀다.”
아름다운 당신이 있고, 그 아름다움을 따라하고자 하는 마음이 있는 한 세상은
줄곧 아름답지 않을까 생각해봅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