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음의 우선순위

어제의 일기

by 교우

아이가 어린이날 선물로 앨범을 고르면서 묻는다.

"엄마, 라일락색으로 할까, 민트색으로 할까? 엄마는 뭐가 좋아?"

아이가 가지고 싶은 물건을 사니 아이 맘에 드는 걸 사야지 싶기도 하고, 사실은 앨범이 라일락색이든 민트색이든 내 눈엔 그게 그거다 싶은 마음에, 성의 없는 답변을 한다.

"너 맘에 드는 걸로 사. 엄만 다 예뻐."

그래도 아이는 물러서지 않고 묻는다.

"아이 엄마, 그냥 골라봐."

나는 대화를 빨리 끝내고 싶은 마음에 말한다.

"민트색"

"씁. 라일락색으로 할래."

"아니, 어차피 네가 고를 거면서 왜 물어보는 거야?"

"엄마가 말해서 역시 싶으면 그게 내가 갖고 싶었던 거고, 좀 아쉬운데 싶으면 나는 다른 색을 갖고 싶었던 거야."

성의 없이 골랐다는 죄책감이 싹 가셨다. 애초에 아무거나 대답하면 됐던 것이다.


아이가 자기 취향과 선택의 힘을 길러 갈수록, 나의 판단력과 기억력은 점점 흐릿해 간다. 삼십 분 전에 세워둔 차가 어디 있는지 찾지 못할 때도 많다. 분명 차를 세우면서 주차장 기호를 눈에 꼭꼭 박았지만 그렇다. 오래된 기억들도 무섭게 소실된다. 부모님의 올해 연세를 모르는 건 당연지사요, 이러다가 부모님 존함도 깜빡할 판이다.


하지만 오래된 기억이 소실되지 않고 남아 계속 문득문득 떠오르는 경우가 있다. 헤아려보면 그게 꼭 인생의 기념비적인 일이어서 그런 건 아니다. 굉장히 사소한 순간인데 잊혀지지 않고, 계속 곱씹게 되는 그런 기억들이 있는 것이다. 왜 그런 기억들이 있을까. 사실 그것들은 사소하지만 내 본질을 이루는 것들이기에 기억되는 것이다. 괜히 아무렇게나 돌아다니다가 떠오르는 게 아니라는 말이다.


나에게는 현주가 그렇다. 그날은 6월의 어떤 날이었다. 나는 사법시험 2차를 앞두고 있었다. 그 공부를 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그때의 2차생은 눈코 틀새 없이 바쁘다. 남들 눈에는 하루 종일 책상에 앉아 책만 들여다보는 움직임 없는 무료한 존재이지만, 책상에 앉아 있는 자신은 책장 한 장이라도 더 넘기기 위해 전투적으로 눈을 놀린다.

그때 나는 저녁을 먹는다면서 학교 밖의 식당으로 나갔는데 휴대폰을 두고 갔다. 그렇지만 얼른 밥을 먹고 학교로 돌아갈 생각이었기에 휴대폰을 두고 나간 걸 개의치 않았다. 그런데 밥을 먹던 도중 6월의 장맛비가 갑자기 하늘에 구멍이 난 듯이 쏟아졌다. 우산을 사기 위해 근처 가게에 가는 동안에도 흠뻑 젖을 것 같아 비가 잦아들 때까지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비가 그치기를 기다리고 있는데 같이 있던 친구에게 연락이 왔다. 현주가 나를 만나려고 학교에 찾아왔다고.

현주는 나와 연락이 닿지 않자 연락처를 알고 있던 내 친구에게 연락을 전해 달라고 했고, 그 친구는 나와 같이 저녁을 먹을만한 또 다른 친구에게 연락을 전했는데 그 친구는 마침 나와 같이 있어서 연락을 전해주었다. 연락을 받고 부리나케 식당에서 나와 편의점에 들러 우산을 사고 학교 앞으로 가 현주를 만났다. 현주는 나를 보더니 시험 잘 보라면서 초콜릿을 줬다. 기다리게 해서 미안하다는 나에게 현주는 아니라면서, 미리 연락을 하면 부담스러울 것 같아 일부러 학교 근처에 와서 연락을 한 거라고 했다. 비는 계속 억수 같이 오고 있었다. 현주도 나도 이미 흠뻑 젖어 있었다. 나는 잠깐 커피 마시고 가라는 말이 입안에서만 맴돌았지, 입 밖으로 떨어지지가 않았다. 시험을 앞두고 마음이 급했는데 이미 비를 피하느라 시간을 허비한 데다 커피까지 마시면 저녁 공부를 날릴 것 같기도 했고, 이렇게 비를 뚫고 커피를 마시러 가려니 그게 너무나도 번거롭게 느껴졌다. 나는 입 밖으로 ‘고마워 잘 가, 연락할게’라는 말을 꺼냈고, 현주는 ‘응 시험 끝나고 봐’라고 말하고 돌아섰다.


그때 현주는 섭섭한 티를 내지 않았다. 나도 시험 끝나고 고맙다는 티를 크게 내면 될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리고 그때는 상황이 그렇게 됐을 뿐, 현주도 엄청난 성의표시를 할 생각으로 나를 찾아온 게 아니었고, 나도 야멸찬 거절 같은 걸 했다고 생각하지 않았다. 그런데 그 기억은 두고두고 한 번씩 나에게 떠올랐다. 아마도 사실 그때 나는 스스로가 부끄러웠던 것 같다. 내 계획과 내 상황에만 몰두해서 타인의 성의를 무시해 버렸던 순간이. 커피를 마시자고 말할까 말까 고민할 때 나는 그게 그렇게 중요한 고민의 순간이라고 생각하지 않았지만, 선택하고서 깨달은 것이다. 그 말을 안 한 나는 나 스스로에게 부끄러운 존재였다.


내가 그때 현주에게 '잠깐 커피 마시고 갈래?'라고 물었다면.

그때의 기억은 지금 나에게 남아있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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