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제의 일기
아빠의 기일이 다가온다.
올해는 엄마가 외국 출타 중이라 제사를 지내지 않기로 했다.
엄마는,
"얼마나 더 살지 모르는데 기회가 있을 때 외국에 가보고 싶어. 미국에 갈 일이 생길 줄은 몰랐는데 갑자기 생겼네"라고 했다.
나야 엄마가 그렇게 변명할 필요도 없이 찬성이다. 엄마 스스로 누리신다는데 내가 찬성하고 반대할 입장이 아니기도 하고. 엄마가 아빠의 제사를 챙기지 않고 외국에 놀러를 가는 것이라 해도 마찬가지다. 아빠는 세상을 떠난 지 꽤 오래되었다. 헤아려보니 그렇다. 엄마의 마음이 그만큼 희미해진다는 건 자연스러운 것이다. 나로써는 오히려 반가운 마음이다. 엄마가 매년 그렇게 슬픔에 잠겨 있는 것보다는 스스로의 여생을 누리는데 집중하셨으면 하는 바람이다. 엄마의 인생은 엄마의 인생.
이곳에 오고 나서 아빠의 기일에 맞춰 육지에 가는 건 나 혼자 해왔다. 그날 하루에 맞춰 온 가족을 움직이게 하는 게 미안하기도 하고, 아빠와 살붙이고 살았던 건 나뿐이기도 하기에 그렇다. 남편과 아이는 아빠가 돌아가시고서 나와 가족이 되었다.
그래도 아이가 제법 컸는지 이제는 할아버지의 존재를 궁금해하게 되었다. 그러면서 할아버지의 제사에 자기도 가 보기를 원했다. 그래서 올해는 데려가겠다 약속했는데 어떻게 또 제사를 지내지 않게 되었다.
"그러면 할아버지가 계신 곳에라도 가면 안 돼? 할아버지는 어디 계신데?" 상황을 알려주는 나에게 아이가 묻는다.
"내년에 가자. 내년에도 거기 그대로 계시니까."
"할아버지는 어디 어떻게 계신데?"
할아버지는 화장을 해서 납골당에 계시다는 설명을 한다. 납골당은 설명하기 어려운 단어다. 죽은 육신을 불에 태우고 뼛가루를 모아서 두고 있다는 설명이 아이에게 충격적이지 않을까 걱정이 되어, 아이 눈치를 보면서 설명을 한다. 그런데 아이는 곧이곧대로 받아들인다.
"할아버지가 죽으면 그렇게 해달라고 그랬어?"
"아니, 할아버지는 갑자기 돌아가셔서 엄마하고 인사도 못했어. 그래서 할아버지한테 물어보지를 못했네."
"엄마는 어떻게 해줄까?"
아이는 거침없이 묻는다. 아이에게 죽음은 두렵고 어려운 것이 아닐지도 모른다. 그래. 볼드모트도 아닌데 말하지 못할 게 뭐 있나.
"엄마? 엄마는 태워서 아무 나무 밑에 묻어주라."
"나는 승마장에 묻어줘. 나 말 좋아하니까."
"그래"
"엄마, 그런데 사람이 죽은 건 어떻게 알아?"
"의사 선생님이 알려주셔. 숨을 쉬는지, 심장이 뛰는지, 뇌 속이 움직이는지, 그런 걸 보고 알려주는 거 같더라."
"엄마. 혹시 모르니까 나는 죽어도 바로 태우지 말고 하루나 이틀 정도 두고 보다가 태워줘. 혹시 안 죽었을지 모르잖아?"
우리 아이의 혹시 모르니까 병. 나로부터 물려받은 성격이다. 내 성격은 어디로부터 왔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