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현의 Day4
눈을 뜨기도 전에 아침인 걸 알 수 있었다. 침대 앞, 옆으로 들어오는 쨍한 햇살 때문에 눈은 감고 있어도 쉽게 아침인 것을 알 수 있었다. 눈을 뜨자마자 보이는 침대 앞 테라스 쪽 모습이 너무 아름다웠다. 귀여운 테라스 문 사이로 초록색 논이 쫙 펼쳐진 광경은 영화에서나 볼 법한 모습이었다. 이런 아침을 맞이할 수 있구나
대충 옷만 껴입고 조식을 먹으러 갔다. 조식 역시나 범상치 않았다. 외부 키친이라 화려한 햇살을 그대로 받고 사방으로 초록빛으로 둘러진 자리에서 우리는 조식을 먹었다. 아침밥을 먹지 않아 따뜻한 커피 한잔으로 시작했다. 은희와 밥을 먹고 있는데 땅에 닿은 은희의 로브가 흔들리기 시작했다. 숙소 고양이가 은희 로브를 장난감으로 생각하고 이리저리 장난을 쳤다. 은희가 로브를 걷어 올려 피하자 고양이는 이내 은희 의자 위로 껑충 올라왔다. 귀여운 아침 맞이이다.
밥을 다 먹고 숙소에서 약 15분 정도 떨어진 요가 하우스로 향했다. 논 중턱에 있는 아늑한 요가 하우스다. 요가 초보자 클래스를 들었다. 선생님은 발리 사람이었다. 아이러니하게도 발리에서는 현지인 요가 선생님을 많이 찾아보기 힘들다. 대체로 외국인 선생님들이 많아 발리 선생님이 무척 반갑게 느껴졌다. 요가는 20대 초반에 다이어트를 목적으로 많이 했었다. 운동 신경이 나쁘지 않은 탓에 동작 따라 하기는 그리 어렵지는 않았지만 요가를 그만두었던 것은 세 가지 이유였다. 1. 다이어트 포기 2. 다한증으로 인해 자꾸 미끄러지는 것. 3. 호흡. 동작 따라 하기보다 호흡인 언제나 어려웠다.
어린 시절 수영장에서 숨 참기 연습을 할 때도 10초 이상 버티는 게 힘든 나였는데 갑자기 요가를 한다고 쉬워질 리 없었다. 하지만 원래 몸을 움직이는 것도 좋아했고, 열렬한 은희의 요가 사랑 때문에 같이 다시 해보면 좋을 것 같아 부지런히 은희를 따라다니며 요가를 한다. 요가 선생님은 요가는 모든 것의 레시피라고 했다. 요가는 우리가 바라는 모든 것을 약속한다고 했다. 그러면서 우리는 행복해질 수 있다고 환한 웃음을 지었는데, 문득 저런 환한 웃음을 짓는 게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입을 가로로 활짝 벌려 억지로 큰 웃음을 지으려고 했으나 웃는 것도 연습이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은희가 한 수업 더 듣는다고 하여 잠시 기다리다가 다시 숙소로 돌아왔다. 어서 씻고 우리는 기다리던 바비 굴링을 먹으러 갈 채비를 했다. 여행 오기 전부터 은희 남편 Jay가 인도네시아에 가면 아기 돼지 바비큐를 꼭 먹어야 한다고 강력 추천을 했다. 먹고 싶었지만 짱구에서는 로컬 음식집을 쉽게 찾을 수 없어 우붓에서 먹기만을 기다렸다.
숙소에 도착하자마자 Wayan에게 물어봤던 게 바비 굴링 맛집이었다. 처음에는 관광객들이 잘 가는 집을 말해주었으나, 우리가 관광객들이 없는 로컬 집으로 알려달라고 했더니, 와얀이 찰떡같이 이해한 듯‘Oh~ Local , Local!’이라고 말하며 리얼 로컬 맛집을 알려주었다. 참고로 ‘로칼, 로칼’이라고 두 번 말하는 건 발리 여행 내내 우리의 마법 단어가 되었다. 어디든 현지 음식이나 현지인들이 자주 가는 장소를 묻고 싶을 때, ‘로칼, 로칼’이라고 연달아 말하면 어느 발리인이든 찰떡같이 알아듣고 잘 추천해준다.
와얀이 추천해 준 곳은 오후 3시만 되면 닫는 곳이기에 지금 딱 가야 했다. 친절한 와얀은 바로 그 집에 갈 수 있도록 오토바이를 섭외해주었다. 오토바이를 타고 시원한 바람을 가르며 유명한 로칼 로칼 바비 굴링 집을 갔다. 처음에는 아기 돼지 바비큐라고 해서 통돼지 바비큐 구이 같이 고기가 다 나오고 자르면서 먹는 줄 알았다. 그러나 밥 위에 맛있게 구운 돼지 부위별로 일부 잘라서 올려주는 한 접시 음식이었다. 껍데기, 간, 살코기 등 다양하게 나왔다. 발리 사람들은 매운 음식을 많이 먹는지 식당을 갈 때마다 spicy?라고 물어봤다. 매운 걸 좋아하면 고추와 토마토를 같이 빻아 음식의 맛을 한껏 더해주는 소스를 같이 준다. 매운걸 잘 못 먹는 나는 먹으면 좀 힘들었지만 그래도 엽기적인 매운맛이 아니라, 개운한 매콤함이라 점점 여행 막바지에는 자주 찾게 되었다.
가게에 손님은 우리밖에 없었다. 가족들이 하는 가게 인지 왠지 며느리, 시어머니, 그리고 손녀딸로 보이는 세명의 여자들이 있었다. 할머니는 우리 음식을 가져다주더니 너무 자연스럽게 우리 옆에 앉았다. 그러더니 자연스럽게 며느리 같아 보이는 아주머니가 오더니 두 분이 우리 앞에서 아무렇지도 않게 이야기했다. 마치 우리가 그 대화에 끼어서 밥을 먹는 것 같았다.
각자 한 접시를 먹었지만 고기가 아쉬워서 고기만 더 달라고 했다. 며느리가 툭하고 고기를 무심하게 내려놓고 갔다. 먹으면서 며느리가 일하는 모습을 보았다. 과일주스 단체주문이 들어왔는지 능숙하게 생과일을 그 자리에서 듬성듬성 잘라 누구보다도 빠르고 체계적으로 음료를 만들었다.
음식을 다 먹고 가려는데 우리는 뚜벅이 신세라 걸어갈 수가 없어 혹시 오토바이로 데려다줄 수 있는 사람이 있냐고 물어봤다. 며느리는 잠시만! 하더니 이리저리 수소문하는 듯했다. 잠시 후 딸이 탄 오토바이가 도착했고, 직접 데려다준다고 했다. 오토바이가 한대라 우리 2명이 같이 타야 된다고 했다. 아무 문제없다며 사라스와라티 사원으로 데려가 달라고 했다. 사실 우리가 가고 싶은 곳은 처음 우붓에 들어왔을 때 보았던 사원이었다. 그랩 기사 아저씨가 사라스와티라고 알려줘서 그곳으로 알고 있었는데 너무 아무렇지도 않게 오토바이가 그곳을 지나쳐갔다. 우리가 사라스와티사원 맞아?라고 물어보니까, 며느리가 잠시 갸우뚱하더니 쿨하게 오토바이를 세우고 아무 가게 아줌마한테 뭐라고 물어보았다. 그러더니 툭하고 오토바이 마스크를 내리며 맞다고 했다. 우리는 의아했지만 우선 가보기로 했다.
오토바이가 멈추고 이곳이라고 했다. 우리가 본 곳 과는 너무 달랐지만 우선 알겠다고 했다. 얼마냐고 하고 지불을 하는데, 갑자기 누구보다 츤데레 같던 며느리가 너무 선한 표정으로 미안하다고 했다. 각자 태워줬어야 했는데 우리 2명을 한꺼번에 태웠다는 게 그 이유였다. 우리는 아니라고 괜찮다며, 너무 고맙다고 하고 돈을 지불했다. 왜인지 모르겠지만 이 며느리는 내 머릿속을 떠나지 않았다. 너무 쿨했던 그녀였는데, 울먹이는 듯한 얼굴로 미안하다고 하는 모습이 무언인가 짠했다.
시내 한가운데 있는 사와스라티 사원이었다. 이곳을 보고 싶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이왕 왔으니 들려보자며 들어갔다. 규모는 작지만 화려했다. 화려하고 섬세한 조각들, 주황색, 금빛 등이 어우러진 강렬한 색감, 거기에 파란 하늘, 사원에 곳곳에 서있는 풀과 나무들. 하지만 사원은 우리의 마음을 크게 사로잡지는 못했다. 작은 사원을 휙 둘러보고 은희 명상 사진을 하나 찍고 다시 나갔다.
발리에서 요가복을 사기 위해 몇몇 알아둔 샵이 있었다. 그 요가복 가게를 찾으려 걸었는데, 쉽게 보이지 않았다. 날도 더워 지치는데 마침 배도 너무 아파 결국 우선은 요가반이라는 곳에 그냥 가서 좀 화장실도 가도 좀 쉬다 가자고 했다. 요가반은 발리에서 요가 성지라 불리는 곳이다. 들어갔는데 이곳은 거의 요가 리조트 수준이었다. 요가 수련을 하는 요가원들 뿐만 아니라 카페, 마사지샵 등이 어우러져있었다. 감탄도 잠시, 후다닥 볼일을 보고 나와 음료 한잔씩 마시며 우리는 뭘 할까 고민했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야시장(sayan night market)을 다녀오고 저녁 8시 티베트식 싱잉 볼 수업을 들을까 했는데 애매해진 시간과 지쳐버린 몸 때문에 갈 곳을 잃어버렸다. 이내 여기는 발리고 우리는 어디서든 마사지를 받을 수 있다는 생각이 문득 떠올라 근처로 마사지를 받으러 갔다.
발리식 마사지를 받았다. 발리식 마사지는 구석구석 정성스럽게 온몸을 풀어준다. 스트레칭과 강한 압력이 특징인 타이 마사지와는 다르다. 타이 마사지도 좋아하지만 타이 마사지에 비해 꼼꼼하고 세심한 발리식 마사지가 어딘지 모르게 더 좋았다. 보통 마사지를 받을 때 잠이 들지 않는데, 언니의 다정한 손길과 피곤함 때문인지 이내 잠이 들었다.
마사지가 끝나고 나니 쨍하던 햇빛은 없어지고 이내 저녁이 되었다. 은희와 나는 가뿐한 몸으로 다시 요가반으로 향했다. 수업을 들으려고 신청하러 온 사람들이 몰려왔다. 러시아에서 단체 관광을 왔는지 요가 수업에 어울리지 않는 화려한 원피스를 입은 언니들이 대거 떠들고 있었다. 요가반은 관광지가 된듯했다. 이곳은 수련을 하러 오기보다는 보통은 관광의 목적으로 방문하는 사람이 많은 듯했다.
8시가 되고 수업이 시작되었다. 우리가 신청한 수업은 티베트식 싱잉 볼 수업이다. 승복을 우아하게 걸친 인스트럭터가 각자 가지 앞에 준비된 매트에 누우라고 했다. 이래서 러시아 언니들이 저렇게 화려하게 입고 왔구나 했다. 어차피 누워서 잘 테니까. 미리 가이드가 이 수업은 어차피 누워서 하는 수업이라 상관없다고 말해준 것 같았다.
차분히 눕고 인스트럭터가 우아하게 싱잉볼을 치기 시작했다. 싱잉볼 한 가지만 있는 것이 아니라 짐 같은 큰 것부터 작은 심벌즈 같은 종류의 다양한 싱잉 볼이 있었다. 인스트럭터는 리드미컬하게 싱잉 볼을 연주했다. 나는 초반에 갑자기 목이 건조해져서 기침이 계속 나와 어쩔 수 없이 수업을 뛰쳐나가 목을 다시 가다듬고 들어왔다.
그 사이 은희가 잠이 들었는지 코 고는 소리가 나왔다. 일정하게 골았다. 은희는 싱잉볼을 사고 싶다고 할 정도로 명상과 싱잉볼을 좋아해서 이 수업에 대한 기대가 매우 컸는데, 큰 기대감이 무색하게 곧 잠이 들었다. 나는 싱잉볼 소리보다는 은희의 코 고는 소리에 집중했다. 그녀의 코 고는 소리가 싱잉볼과 같았다. 인스트럭터는 마치 그녀를 깨우기 위해 우리 쪽에서만 치는 것 같았지만, 은희는 끝내 깨지 않았다. 수업이 마무리되고, 우리는 차분하게 아무 일도 없다는 듯 요가반에서 나왔다.
배가 고파서 무엇을 좀 먹고 들어가자고 했다. 택시라고 쓰인 팻말을 들고 있는 기사한테 말해 택시를 잡았다. 사실 그들은 전문 택시 기사는 아니고 개인 자동차를 이용해서 돈을 버는 사람들 같았다. 차에 타고 은희가 우리의 매직 단어를 말했다. ‘로칼, 로칼 한 밥집 아니?’ 택시 기사는 찰떡같이 알아듣고 우리는 그곳으로 데려다주었다. 내리자마자 알 수 있었다. 저곳이구나. 저곳이 ‘로칼, 로칼'이다.
들어가자마자 모두 우리를 쳐다보았다. 우리는 그런 시선마저도 즐거웠다. 이 가게는 식재료를 맛있게 불에 구워서 밥이랑 약간의 야채랑 같이 주는 곳이다. 우리는 오징어, 치킨, 가지 볶음을 시켰다. 음식이 나왔다. 이거네, 이거야를 외쳤다. 오징어, 치킨, 가지 볶음은 사실 구우면 맛이 없을 수 없기는 하다. 하지만 간이 딱 맞게 구워져, 발리의 필수 소스 칠리과 토마토가 섞인 spicy를 조금씩 첨가하면서 먹었다. 분위기도 너무 흥겹고 음식은 너무 맛있고, 우리는 굶주려있어서 고등어도 시켰다. 언제나 그랬든 왜 그렇게 많이 시켜하는 눈치지만 우리는 배고프니까라고 합리화하면 맛있게 먹었다. 정말 ㅋㅋㅋ 가 나올 정도로 즐겁고 맛있었다.
식당에서 일하는 직원들을 봤는데 나이 때가 비슷한 또래 젊은 청년들 같았다. 핸드폰으로 비디오도 보고, 음식도 만들면서 자기들끼리 즐겁게 일하고 있었다. 발리 사람들은 항상 그래 보인다. 소박하지만 즐겁고 정성스러우며 친절하다. 이렇게 또 따뜻한 마음과 함께 하루가 저물어 간다.
은희의 Day 4
닭들이 우는 소리에 알람 없이 7시쯤 일어났다. 창밖으로 펼쳐진 평화로운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보다가 이런저런 글 도쓰고 여러 생각들을 정리하며 하루를 시작했다. 8시쯤 은현을 깨워 숙소에서 제공하는 간단한 조식과 커피를 먹고 걸어서 약 10분 거리에 있는 우붓 요가 하우스로 향했다. 요가 하우스에서 9시 반에 시작하는 케투 선생님의 비기너 클래스와 바로 그다음 클래스인 젠틀 정글 요가를 듣기로 했다.
우붓에 여러 크고 작은 요가 스튜디오들이 있지만, 요가 하우스는 논밭 한가운데에 위치하고, 발리 사람들이 인스트럭터로 있는 것이 특히나 마음에 들었다. 요가 하우스 입구로 들어서자마자 큰 나무가 보였는데 망고가 주렁주렁 달려있었다. 망고를 정말 좋아하는데, 망고나무는 태어나 처음 보았다. 집 앞에 망고나무를 기를 수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하고 생각했다.
리셉션에서 수업을 등록하고, 숲으로 둘러 쌓인 정자로 만들어진 수련원에서 수련을 시작했다. 케투 선생님은 수업 전에 자기의 요가 철학을 간단하게 나눠주었다. 우리의 몸이 자동차라면, 우리의 마음은 드라이버, 그리고 우리의 소울은 패신저라고 했다. 패신저, 즉 소울이 즐겁고 편안한 드라이브를 할 수 있도록 우리의 몸과 마음을 수련하는 것이 자기가 생각하는 요가라고 했다. 지난 1년 넘게 요가 수련을 하면서 수련의 시간이 쌓여 내 몸을 변화시키고 변화된 몸이 어떻게 마음을 변하게 만들었는지 경험을 해봤기에 케투 선생님이 한 이야기들이 마음에 와 닿았다.
케투 선생님은 기본적인 요가 자세를 정확하게 하나하나 짚어가며 베이식 수업을 이끌어나갔다. 그러면서도 즐겁게 할 수 있도록 'Joy'를 계속해서 일깨워주었다. 특히 힘든 자세를 할 때마다 "자 여러분 웃어요! 힘들지만 웃으며 이 자세를 해봐요"라고 했다. 지금까지 요가 수련을 하면서 늘 '진지하게', '열심히' 수련을 했어서인지, 즐기며 한다는 것을 잊고 있었던 것 같았다. 유쾌한 농담을 섞어가며 진행하는 케투 선생님의 수업이 너무 즐거웠다. 그리고 수련원 앞으로 펼쳐진 아득한 숲과 계속해서 들려오는 새소리들이 마음을 평온하게 만들어주었다. 요가도 결국 나의 행복을 위해서 하는 것인데, 앞으로는 조금 더 즐기며 요가를 해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요가 수업이 끝나고 숙소로 돌아와 씻고 와얀이 알려준 로컬 바비굴링 스폿을 가기로 했다. 와얀에게 30분 이후에 출발할 테니 모터바이크를 불러 달라고 했다. 나와 은현은 와얀의 최애 바비굴링 스폿을 가볼 생각에 잔뜩 신이 났다. 와얀도 그런 우리를 보며 흐뭇하게 웃는 듯했다.
숙소에서 스쿠터로 약 10분 정도 떨어져 있는 바비 굴링 북 아리(Babi Guling Buk Ari)라고 하는 바비 굴링 집에 도착했다. 인도네시아는 발리를 제외하곤 대부분 무슬림 섬이라 돼지고기를 먹을 수가 없는데, 발리는 힌두교라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었다. 인도네시아를 2달 넘게 여행을 했던 남편에게 발리에 가서 뭘 할까?라고 물었더니 다른 건 모르겠고 바비 굴링을 꼭 먹으라고만 했었다.
3대가 모여 함께 운영하는 듯 한 이 가게에는 메뉴도 바비 굴링 딱 한 가지밖에 없었다. 바비 굴링 두 접시를 시키니 밥 위에 바삭한 껍질을 포함한 여러 돼지고기 부위와 매콤한 소스가 함께 나왔다. 정신없이 바비 굴링을 해치우고 있는데 할머니가 우리 테이블 앞에 앉아 손녀뻘 되는 우릴 흐뭇하게 쳐다보셨다. 한 접시를 뚝딱 해치우고서도 모자란 듯하여 은현에게 고기만 더 시키자 해서 추가로 주문한 고기도 후다닥 해치웠다. 나는 원래도 돼지고기를 엄청 좋아하는데, 와얀이 추천을 해주어서인지 정말 기억에 남을 만큼 맛있었다. 이름도 너무 귀여운 바비 굴링.
바비 굴링을 먹고 우붓 타운 쪽으로 가야 하는데 동네 가게다 보니 와이파이도 없어 어떻게 오토바이를 부르지 고민하다가 그냥 주인아주머니께 물어보았다. 그랬더니 자기 딸이 돌아오면 금방 태워주겠다고 했다. 굳이 그랩을 사용하지 않아도 물어보는 사람마다 우리의 드라이버가 돼주었다. 아주머니가 운전을 하고, 은현과 나 둘이 뒷자리에 낑겨타고 사라스와 띠까지 갔다. 아주머니는 엄청 쿨하고 시크한 분이셨는데, 사라스와 띠에 내려 둘이서 끼여서 타고 오게 하여 미안하다며 미소를 건넸다. 얼마를 드리면 되겠냐고 했더니 알아서 달라고 했다. 은현과 나는 큰 소리로 "마카 시 마카 시" 몇 번이고 인사를 하고 아주머니와 헤어졌다. 다부지게 살림을 하고 가족을 이끌던 멋진 바비 굴링 아주머니는 우리가 발리에서 만났던 사람들 중에 손에 꼽히게 기억이 남는 사람이다.
사라스와띠 사원에 아주 잠깐 들렸다가 요가 반 스튜디오가 있는 쪽으로 걸어갔다. 생각보다 날이 덥고 멀어서 꽤 지쳤다. 원래는 수업 등록만 해두고 나이트 마켓을 갈까 했었는데 시간이 어정쩡하게 붕떠서 요가반 근처에 있는 마사지를 받고 듣고 싶었던 8시 티베트 사운드 볼 수업을 듣기로 했다.
우연히 들어간 마사지샵은 생각보다 너무 좋았고, 오랫동안 걷고 지친 몸이 녹아내리는 듯했다. 마사지를 받다가 스르르 잠이 들었다. 마사지를 마치고 나니 어느덧 어둑어둑해졌다. 우리는 요가반의 수업을 듣기 위해 발길을 옮겼다.
얼마 전 발리에 다녀온 다른 친구는 요가반이 너무 좋았다고 했었는데, 내가 경험했던 날의 요가반은 요가 디즈니랜드 같은 느낌으로 계속해서 불편했다. 미리 예약해둔 티베트 볼 사운드 수업을 기다리고 있는데, 아주 화려한 복장을 한 러시아 단체 관광객들이 수업을 기다리며 엄청 시끄럽게 떠들어댔다. 마사지받고 릴랙스 한 마음을 티베트 볼 사운드 수업을 들으며 정화하고 싶었는데, 옆에 있는 은현에게 계속 투덜댔다. 수업 시간이 다 되어 정자의 2층 공간으로 올라갔다. 어둑어둑한 넓은 대청마루에 중앙에 촛불 몇 개를 켜 두고 그 앞에 티베트 볼들이 놓여있었다. 매트 위에는 모포도 준비되어있었고, 약 80명이 빼곡히 대청마루 위에 누워 수업을 기다렸다. 티베트 승려처럼 보이시는 분이 돌아다니며 사람들 위로 물방울을 뿌리고 티베트 볼 연주를 시작했는데, 은현이 나를 툭툭 쳐서 깨보니 수업이 다 끝나 있었다. 정말 듣고 싶은 수업이었는데, 거의 수업 시작하자마자 숙면을 취한 것 같았다.
러시아 관광객들 때문에 엄청 투덜대더니 코를 골며 잠을 자는 내가 너무 웃기다며 은현이 엄청 웃어댔다. 마사지를 받고 티베트 볼 사운드 수업을 하는 동안 너무 숙면을 취해서인지 다시 태어난 듯 너무 개운했다.
요가반을 나와서 조금 걷다가 "택시 택시"하는 소리에 홀려 그냥 그 택시를 탔다. 딱히 목적지도 없었기에, 택시 기사분께 택시 기사님의 "로칼 로칼" 레스토랑으로 데려다 달라고 했다. 와얀이 우리에게 "로칼 로칼"을 알려준 뒤부터 "로칼 로칼"은 우리의 마법의 주문이 되었다. 로칼을 한 번외 치면 안 되고 반드시 두 번을 외쳐야 하는 것이 핵심이었다. 택시 아저씨는 약간 혼란스러운 듯 보였다. 처음에 어떤 레스토랑 앞에 세워주셨는데 우리가 생각하던 로칼 로칼이 아니라서, 넥스트라고 외쳤더니 조금 더 달려 인적이 드문 곳에 빛이 나는 어떤 식당 앞에 세워주셨다. 인도네시아 음악이 시끄럽게 흘러나오고 5명의 젊은 발리 청년들이 운영하는 로컬 가게였다. "그래! 여기다!" 은현과 나는 또 신이 났다.
싱싱한 야채에 토마토와 고추를 넣어 만든 삼발소스 그리고 그릴 요리를 같이 파는 라라 판 (LALAPAN) 가게였다. 그중에 눈에 띄는 아얌(닭고기)과 몇 가지 메뉴를 시켰다. 언제나 그랬든 사람 수 보다 많은 메뉴를 시켰다.
은현은 바다에서 자유롭고, 나는 정글에서 자유롭다. 은현은 닭고기를 좋아하지만 나는 돼지고기를 더 좋아한다. 그리고 은현은 피곤하면 발이 붓지만 나는 어깨가 뭉친다. 여러 가지 다른 점들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비슷한 점들도 많았는데 그중 한 가지는 둘 다 '언어'를 굉장히 좋아한다는 것이다. 불문과를 나온 은현과, 독문과를 나온 나는 둘 다 유럽 어문학을 전공으로 배웠고, 회사에서 만난 친구지만 알고 보니 대학교도 같은 대학을 졸업했다. 언어를 좋아하는 둘이 같이 여행을 하다 보니 여행 3-4일쯤이 되자 조금씩 여러 단어들과 표현들이 익숙해졌다. 어설프게나마 메뉴판도 어림잡아 추측으로 읽을 수 있고 사람들과 조금씩 인도네시아어로 소통을 할 수 있었다. 물론 인도네시아어가 알파벳을 사용해서 조금 더 빨리 친숙해졌던 탓도 있다.
어설픈 단어들이지만 인도네시아어로 인사를 건네는 우리에게 발리 사람들은 더 따뜻하게 대해주는 것만 같았다. 특히 은현과 내가 가장 좋아하는 인도네시아 단어는 감사하다는 인사에 대답으로 천만에요라고 하는 "사마 사마". 은현과 내가 "트리 마카 시"하면 세상 따뜻한 웃음으로 "사마 사마"라고 답하는데, 그 웃음이 너무 따뜻하고 좋아서 은현과 나는 가는 곳마다 크게 합창으로 "트리 마카 시"를 외치고 다닌다.
식당은 늦은 시간임에도 정말 바빴다. 많은 사람들이 테이크 아웃으로 음식을 사 갔다. 신나는 음악에 맞춰 손이 안 보일 정도로 빠른 속도로 토마토를 큰 접시에 계속 갈고 있는 청년들과, 끊임없는 주문에 맞춰 즐겁게 굽기를 반복하는 청년들, 자기들의 룰에 따라 신나게 일을 하고 있었다. 일을 하면서 저렇게까지 신나 보이는 사람들을 보니 나도 덩달아 신이 났다. 나오는 순서대로 음식을 후다닥 해치우고, 늘 그랬듯 한 접시를 더 시켰다. 유쾌한 청년들과 함께 사진을 찍고, 불러진 배와 즐거운 마음으로 식당을 떠나 숙소로 돌아왔다. “사마 사마” 하는 따뜻한 얼굴들이 벌써부터 그리워질 것 같은 마음과 함께 밤이 저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