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도 영성 고전] 2
오래된 노트를 펼쳤다. 첫 페이지에 적힌 메모. 《분도 영성 강좌, 제1강 (2011.4.9.)》 꽃피는 봄날에 방문했던 전남 화순의 수도원 모습이 아련한 그리움으로 떠올랐다. 그 기억 속으로 떠나는 여행은 언제나 행복한 추억의 여정이다. 수도원 순례기를 쓰면서 다시 그 노트를 꺼냈다.
순례 체험에 곁들여 수도원의 역사와 수도승 영성을 적절히 버무려 넣고 있다. 실은 다 어느 분께 배운 내용이다. 태반은 그분의 강의와 저술에 있는 내용이다. 이 글이 논문이거나 학술 서적이라면 당연히 정확한 인용 표시를 달았을 것이다. 그러나 나는 수도원을 순례하면서 떠오른 생각을 메모했다가 내키는 대로 쓰고 있다. 그 첫 느낌을 기억했다가 다시 풀어낼 뿐이다. 인용 표기는 최소한으로 그친다. 다만 감사의 마음만은 밝혀 두고 싶다.
사람들은 그분을 ‘허무 신부님’으로 부른다. 허무는 ‘허 로무알도’의 줄임말이다. 그분의 수도명(修道名)이 로무알도이다. 허무는 ‘덧없음’이라는 뜻 외에 ‘비어 있음’이라는 의미도 지닌 말이다. 수도승의 별칭으로는 꽤 괜찮아 보인다. 그렇게 부르는 사람들은 아마 존경과 사랑의 마음도 담았을 것이다. 어쩌면 신학교 강의 시간에 허무 개그를 몇 번 내놨다가 그런 별명이 붙었는지도 모르겠다.
나는 그분을 책으로 처음 만났다. 10여 년 전, 부끄러운 책을 한 권 쓸 때, 수도원과 수도승에 관한 책이라면 빼놓지 않고 읽었다. 그렇게 공부에 목말라 있을 때 수도 영성에 관한 탁월한 저술이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책은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공식 출판물이 아니었다. 『수도승 영성』이라는 제목으로 나온 비매품 도서였다. 편저자는 베네딕토회의 허성석 신부로 되어 있었다. 이 책은 프랑스 시토회 수도승의 강의록을 편역했다고 소개했다. 단순 번역이라기보다는 편저자의 학문적 소양을 바탕으로 상당한 정리와 보완, 재구성의 과정을 거친 역작으로 보였다. (나중에 『수도 영성의 기원』이라는 제목으로 공식 출판되었다.)
그때부터 나는 허무 신부의 팬이 되었다. 마음속의 스승으로 모시고 그분의 저작물을 탐독했다. 스승이라는 말은 과하지 않다. 그분은 사제이거나 학자이기 이전에 베네딕토회의 수도승이었다. 미국 뉴멕시코주에 있는 사막 수도원에서 고독과 침묵 속에 3년 동안 수행에 전념하기도 했다. 학문적으로도 고대 수도승의 영성과 신학을 소개하는 데 천착해 왔다. 영적 지혜가 가득한 에바그리우스나 카시아누스의 저술은 그분의 번역과 강의가 아니었다면 아마 이해할 기회가 없었으리라 생각한다.
그즈음에 허무 신부는 베네딕토회 화순수도원의 원장을 맡고 있었다. 나는 공부를 핑계로 그분을 찾아갔고, 학문이 아닌 살아있는 영성에 흠뻑 젖어들었다. 서울에서 전남 화순까지 주말에 차를 몰고 가는 길은 만만치 않았다. 여름휴가철이나 연휴와 맞물릴 때면 속절없이 애를 태우곤 했다. 그래도 수도원 주변의 아름다운 풍광과 샘물처럼 시원한 영성 강의에 빠져들어 힘든 줄 모르고 다녔다. 돌이켜 보면 참 은혜롭고 감사한 시간이었다.
그분은 저술과 강의 외에도 짧은 묵상의 글을 꾸준히 쓰신다. 수도 생활을 하면서 겪는 이런저런 일들과 떠오른 단상을 기록한 맑고 아름다운 글이었다. 수도승의 일기처럼 쓴 그 글을 가끔 주변 지인들과 공유하기도 했다. 그때마다 선물을 받은 듯 감사한 마음으로 읽었다. 그 글을 모아 『수도원에서 온 편지』라는 제목으로 비매품 책을 만들었다. 선물로 한 권 받아서 보물처럼 간직하고 있다.
마음이 어수선할 때면 꺼내서 한두 편씩 읽어본다. 우리의 내면에서 일어나는 어리석은 생각의 뿌리를 거울처럼 비춘다. 내 마음속의 거짓과 교만, 헛된 영광을 꿈꾸는 속된 욕망이 여지없이 드러난다. 더 겸손하고 더 사랑해야 한다. 그런 가르침을 늘 받는다. 더러는 너무나 인간적인 수도원의 일화에 미소를 머금기도 한다. 유머와 해학 역시 수도 생활의 한 부분임을 일깨운다.
사막은 수도승의 고향과 같다. 뜨거운 열정과 치열한 수행의 땅이다. 사막은 수도승을 단련하고, 수도승의 이상은 사막에서 꽃을 피운다. 뉴멕시코주 사막 수도원에 도착했을 때, 허무 신부는 시 한 편으로 부푼 기대를 드러냈다.
누가 사막을 황폐한 불모의 땅이라 했던가!
이곳은 또 다른 생명이 움트는 곳
하느님 현존이 깃든 곳
멀어진 임께 되돌아가는 곳
뉴멕시코 북서쪽
아름다운 계곡에 위치한 사막
이곳은 온갖 생명이 꿈틀거리는 곳
형언할 수 없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드러내는 곳
그 어떤 호화로운 궁전도 부럽지 않네.
고요하고 적막한 사막
세상을 뒤로하고 모여든 바보들
그 한가운데 똬리를 틀었네.
그들의 우렁찬 찬미 소리
깊은 고요와 침묵을 가르고
사막의 계곡에 메아리치네.
그리고 3년 수행 뒤 사막을 떠나던 날엔 이런 소회를 남겼다.
사막 한가운데서도 세속 한복판처럼 살 수 있고 세속 한복판에서도 참된 사막을 찾고 고독과 침묵을 살 수 있다고 확신합니다. 참된 고독과 침묵은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보장해 줄 수 없습니다. 그것은 오로지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습니다. 참된 사막은 내적 사막, 마음의 사막입니다. 이 사막은 바로 우리 일상 안에서, 우리 내면에서 매일 만나게 될 것입니다.
허무 신부는 사막에서 돌아온 뒤 화순수도원과 왜관수도원의 원장을 지냈다. 지금은 교구 본당의 주임으로 봉직하고 있다. 『수도원에서 온 편지』의 내용 중 일부는 나중에 『바닥 친 영성』이라는 제목의 책으로 나왔다.
아름다운 글을 쓰는 사람은 많다. 옳고 바른 글을 쓰는 사람도 적지 않다. 그러나 삶으로 감당할 수 있는 글을 쓰는 사람은 매우 드물다. 대부분의 글은 삶을 웃돌고 삶과 괴리되어 있다. 그런데 때로는 치열한 삶에서 우러나온 글을 쓰고, 글이 미처 삶을 다 담아내지 못하는 경우도 있다. 수도승의 글은 담백하고 과장이 없다. 그 글에는 내면의 유혹과 싸워온 깊은 성찰이 담겨있다. 글은 결코 삶을 앞서지 못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