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05-02 수도원의 밤

by Peregrinante in Spem

수도원의 하루는 기도로 시작해 기도로 끝난다. 하루를 마감하는 끝기도는 밤 9시였다. 어둑한 조명 아래 세 분의 수녀님이 마음을 다해 시편을 읊는다. 귀로는 그 소리를 들으며 눈으로는 휴대폰 앱에서 한국어 시편을 찾아 읽는다. 끝기도의 시편은 4, 91, 134편이다.


제 의로움을 지켜주시는 하느님

제가 부르짖을 때 응답해 주소서.

곤경에서 저를 끌어내셨으니

자비를 베푸시어 제 기도를 들으소서. (시편 4,2)


당신 깃으로 너를 덮으시어

네가 그분 날개 밑으로 피신하리라. (시편 91,4)


이제 주님을 찬미하여라, 주님의 모든 종들아

밤 시간에 주님의 집에 서 있는 이들아. (시편 134,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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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대 위에 켜 둔 촛불이 고요히 일렁이고 있었다. 은총과 평화가 분향처럼 피어올라 공간을 가득 채웠다. 창밖에 어둠이 깃들고, 거룩한 신성이 날개처럼 도시를 덮고 있는 듯했다. 마음 깊은 곳에서 감사와 감동이 솟아올라 가슴을 적셔왔다.


날마다의 끝 순서에

이 눈물 예비하옵느니

남은 세월 모든 날도

나는 이렇게만 살아지이다

깊은 밤 끝 순서에

눈물 한 주름을

주님께 바치며 살아지이다

(밤기도(부분) _ 김남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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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기도의 끝에는 특별히 성모 찬송가(Maria Antiphon)를 부른다. 모두 4곡을 시기에 따라 바꿔가며 부른다. 너무나 아름다운 곡인 데다, 매일 부르다 보니 라틴어 가사를 그대로 암송해서 부르는 경우가 많다. 귀 기울여 들어봤지만, 라틴어인지 이탈리아어인지 알 수 없었다.


Salve Regina, mater misericordiae

Vita, dulcedo et spes nostra, salve

여왕이시며 사랑에 넘친 어머니,

우리의 생명, 기쁨, 희망이시여,


밤 9시 30분쯤 성당의 불이 꺼졌다. 기도와 찬미로 하루를 봉헌한 수녀승들이 퇴장했다. 나그네도 제 방으로 돌아왔지만, 좀처럼 잠이 오지 않았다. 낯선 땅의 낯선 수도원, 허물 많은 나그네가 오래전 어느 수녀승이 지냈던 방에서 밤을 맞고 있구나. 성무일도 끝기도의 마지막 구절을 다시 읊조리며 잠을 청했다.


전능하신 천주여, 이 밤을 편히 쉬게 하시고, 거룩한 죽음을 맞게 하소서. 아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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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새벽의 독서기도는 5시 반, 아침기도와 미사는 7시 반이었다. 미사에는 관광객과 주민 몇 분이 더 참석했다. 작별의 시간이 왔다. 미사를 마친 뒤 수녀원 가족에게 인사를 드렸다. 아쉬운 마음을 감추고 씩씩하게 말했다. “수녀님 오래오래 건강하세요.” 노 수녀승이 손을 꼭 잡으며 말한다. “우리를 위해 기도해 주세요.” 그 말속에 애써 눌러둔 무언의 단어들을 무심한 나그네가 어찌 헤아릴 수 있으랴.


“당신께 바친 몸이오니, 지켜주소서. 당신께 의지하오니, 이 종을 구원하소서.” (시편 86,2)


순례를 마치고 돌아왔다. 경박하고 사랑이 부족한 내게도 기도할 일이 생겼다. 늦은 밤에 인자하신 어머니를 떠올리며 눈을 감는다. “수녀님, 언제나 건강하셔서, 천 년을 이어온 기도의 촛불을 오래오래 지켜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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