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을 바꾼 저녁의 공통점
지난 글에서 우리는 한국의 두 인물을 이야기 했었다. 여의도의 펀드매니저였던 전석재와 월급 180만 원을 받던 PD 주언규였다. 두 사람 모두 퇴근 후의 작은 루틴을 수년간 반복한 끝에 삶의 방향을 통째로 바꾸었다.
이쯤에서 이런 의문이 들지도 모른다. '한국이라서 가능했던 특수한 사례는 아닐까?' '시장의 빈틈을 운 좋게 선점한, 아주 특별한 운의 결과는 아닐까?'
그래서 이번에는 시선을 조금 멀리 옮겨보려 한다. 1970년대 미국 메인주의 젊은 영어 교사와 1990년대 플로리다에서 팩스기를 팔던 영업사원의 이야기다. 시대도, 환경도, 직업의 종류도 다르지만 두 사람의 삶에는 놀라울 만큼 닮은 구조가 존재한다.
1971년, 미국 메인주 햄든. 스물네 살의 스티븐 킹은 고등학교 영어 교사로 첫발을 내디뎠다. 첫해 연봉은 6,400달러. 교사라는 직업이 안정을 가져다줄 줄 알았으나 실상은 빠듯했다. 여름방학이면 수입이 끊겨 산업용 세탁소에서 식당 식탁보와 병원 시트를 다루는 험한 일을 병행해야 했다.
아내 타비사 역시 가계를 돕기 위해 일했지만, 부부와 두 아이가 머무는 곳은 낡은 트레일러였다. 전화가 끊기고 차가 고장 나는 일이 일상일 만큼 형편은 녹록지 않았다.
그럼에도 킹은 저녁이면 늘 같은 자리로 향했다. 트레일러 안, 세탁기와 건조기 사이의 비좁은 틈새였다. 그는 그곳에 작은 작업대를 두고 낡은 타자기를 올렸다. 몸을 제대로 펴기조차 힘든 공간이었지만, 그는 매일 밤 그곳에 앉아 글을 썼다.
그의 글은 이따금 잡지에 팔려 생활비에 보탬이 되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거절의 연속이었다. 그는 편집자들의 거절 편지를 버리지 않고 벽에 못 박아 모아두었다. 거절의 무게가 날카롭게 가슴을 짓눌러도 그는 다음 날 다시 타자기 앞에 앉았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쓰다 만 원고를 포기한 채 휴지통에 던져버렸다. 사춘기 소녀를 주인공으로 한 이야기였는데, 도저히 끝맺을 자신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때 원고를 다시 건져 올린 사람이 아내 타비사였다. 그녀는 남편에게 "이 이야기는 끝을 봐야 한다"며 격려했다.
그렇게 다시 이어진 원고가 바로 전설적인 데뷔작 《캐리》다.
이 작품은 더블데이 출판사와 계약하며 2,500달러의 선인세를 받았고, 얼마 후 페이퍼백 판권이 40만 달러에 팔리는 기록을 세웠다. 그제야 그는 학교를 떠나 전업 작가의 길을 걸을 수 있었다. 사람들은 훗날 그를 세계적인 거장이라 불렀지만, 그 위대한 세계의 출발지는 화려한 서재가 아닌 세탁기 옆 좁은 틈새였다.
1990년대 후반, 미국 플로리다. 스물일곱 살의 사라 블레이클리는 팩스기 판매 회사 '단카(Danka)'의 영업사원이었다. 아침마다 정장을 입고 빌딩 숲을 누볐지만, 돌아오는 것은 싸늘한 문전박대와 냉소뿐이었다.
그녀의 이력은 화려함과는 거리가 멀었다. 로스쿨 진학은 시험 낙방으로 좌절되었고, 디즈니월드에서 일하던 시절에도 원하는 배역을 얻지 못했다. 삶은 늘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비껴가는 듯했다.
아이디어는 아주 사소한 불편함에서 싹텄다. 흰 바지를 입을 때 속옷 자국이 드러나는 것이 고민이었던 그녀는 팬티스타킹의 발 부분을 잘라 입어보았다. 거울 속 매끄러워진 실루엣을 본 순간, 그녀의 머릿속에 섬광이 스쳤다. '이거, 분명히 제품이 된다.'
중요한 것은 그 이후의 태도였다. 그녀는 곧장 사표를 던지지 않았다. 낮에는 팩스기를 팔고, 밤과 주말에만 이 아이디어에 매달렸다. 당장 월급과 건강보험이 필요한 현실을 무시한 채 무모하게 꿈만 쫓는 것은 그녀의 방식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날 이후 그녀의 저녁은 180도 달라졌다. 퇴근 후에는 도서관에서 특허법을 독학했고, 비용을 아끼기 위해 서류를 직접 준비했다. 제조업체를 찾기 위해 수많은 공장의 문을 두드렸고 수없이 거절당했다. 하지만 낮 동안 영업 현장에서 단련된 '거절에 무너지지 않는 마음'과 '상대를 설득하는 감각'은 밤의 작업에서 강력한 무기가 되었다.
그녀는 준비가 완벽해질 때까지 주변 사람들에게조차 비밀을 유지했다. 설익은 아이디어가 타인의 걱정 섞인 참견에 흔들리는 것을 경계했기 때문이다. 마침내 시제품이 완성되었을 때, 그녀는 바이어를 찾아가 화장실에서 직접 제품을 시연하는 대담함을 보였다. 그 용기가 첫 입점으로 이어졌다.
그렇게 탄생한 기업 '스팽스(Spanx)'는 첫해에만 수백만 달러의 매출을 올리며 급성장했다. 그녀는 외부 투자 없이 오로지 본인의 힘으로 회사를 키워낸 전설적인 창업자가 되었다. 안정적인 본업이라는 기반 위에서 저녁 시간을 이용해 새로운 길을 닦아낸 덕분이었다.
시대도, 나라도, 직업도 달랐다. 그러나 네 사람의 저녁에는 같은 구조가 흐르고 있었다.
그들은 낮의 자리를 지켰고, 저녁의 시간을 포기하지 않았다. 그 짧은 찰나를 몇 년이고 반복했다. 그들은 안정을 버리고 꿈을 좇은 이들이 아니었다. 오히려 안정이라는 토양 위에서 꿈을 길러낸 사람들이었다.
그들에게 먼저 있었던 것은 화려한 재능도, 기적 같은 운도 아니었다. 다만 매일 밤 같은 자리로 돌아가는 지독한 성실함이 있었다.
"오늘 저녁 당신에게는 매일 밤 당신을 위한 그런 시간 마련되어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