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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peter shin Jun 19. 2016

죽기로 맘먹은 베로니카

@dora keogh.toronto

유난히  긴 토론토의 겨울이다. 올해는 눈도 적당히 내리고 겨울답게 영하 20도, 바람이 심하면 체감기온 영하 40도까지 내려간다. 그래서 맥주 생각도 별로 나질 않고 그저 집에서 한잔 정도 하는 것으로 마는데, 작년 여름 무자게 더웠을 때 시내에 있는 9홀 컨트리클럽에서 운동을 마치고 나서 차를 부랴부랴 몰아 도라 키오에 헐레벌떡 뛰어 들어와 들이키던 너무나 시원하고 맛있었던 맥주 생각이 난다.

시원한 것이 필요할 때는 기네스 보단 역시 황금색 라거가 제격인데 독일 맥주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홀란드 산이었던 그로쉬가 갈증 해결사였다. 미끈한 그로쉬 전용 글라스에 맺힌 차가운 이슬의 촉감을 즐기며 벌컥벌컥 들이켜고 나서 몇 초 후면 후줄근했던 온몸의 감각들이 촘촘히 일어서 옮을 느낄 수 있다. 그리고 한몇 분 지나면 운동으로 피곤했던 근육들이 다시 살짝 노곤해지기 시작하는데, 바텐더들을 잘 아는 단골 술집이라면 이때 허리를 세우고 팔짱을 끼고는 의젓한 자세를 유지한 채 잠시 눈을 붙이고 졸아도 좋다.

.. i was beginning to enjoy the sun again, the mountains, even life's problems, i was beginning to accept that the meaning of life was no one's fault but mine. i wanted to see the main square in Ljubljana again, to feel hatred and love, despair and tedium.. all those simple, foolish things that make up everyday life, but that give pleasure to your existence.
.. 'Veronika decides to die'.. Paulo Coelho

당시 난 파울로 코엘료의 신작 '죽기로 작정한 베로니카'를 거의 다 읽고 있었던 것 같다. 재색을 겸비한 소위 엄친딸이었던 베로니카가 어느 날 갑자기, 모든 일상이 재미가 없군, 너무 시시해.. 하며 잠에 빠지는 약을 깨어나지 못할 만큼 먹고 침대에 누우면서 시작되는 이야기 다. 며칠 후 베로니카가 눈을 뜬 곳은 지옥도 천당도, 또 연옥도 아닌 정신 병원이었다. 사회로부터 격리되어 살아가는 병원의 많은 사람들과 접하면서 베로니카는 '소통의 문제'를 본다. 병동에 수용된 개개인의 삶의 이야기들은 다들 진지했고 순수한 것 들이었지만 남녀 간에, 부모와 자식 간에, 그리고 사회와 개인 간의 프로토콜이 극단적으로 배치되는 경우들이었고 결국 자신의 생각이나 의지가 너무 강했거나, 너무 약했던 그 개인들은 이제 이 정신 병동이라는 그들만의 공동체 속에서만 살아갈 수 있는 것이었다. '정신 병동'이라는 상황은 진지한 작가들에게는 단골 소재이긴 하지만 코엘료 개인이 몸소 경험한 적이 있어서인지 정신 병동이라는 전체 시스템과 그 공동체의 구성원들인 의사와 간호사 및 환자들에 대한 이야기가 꽤 담백하게 그려진다. 자살 시도의 후유증으로 며칠밖에 살지 못한다는 진단을 받은 베로니카. 정신병동에서 그녀의 남자 친구와 시내로 탈출을 감행한 후 이제 죽어야 할 마지막 날의 이브가 되고.. 그런데 베로니카의 진료를 맡았던 의사는 "환자에게 거짓으로 죽음이 임박했다고 하면 삶에의 의지가 마구 용솟음칠 거다.."라는 황당한 혹은 나름 그럴듯한 가설 하에 실험을 하고 있었던 것인데.. 다음날 시내의 성곽 밑에서 부드러운 아침 햇살에 잠에서 깬 베로니카는 깨어난 곳이 역시 지옥인지 천당인지 또 한 번 헷갈리게 된다. 전후 상황을 파악하고 난 베로니카는 새삼스레 삶에의 희망과 기쁨으로 차오르기 시작하고 소설은 다음과 같은  문장으로 독자들에게 대반전을 기분 좋게 선사하며 끝을 맺는다.

.. 난 다시 태양을 보며 기뻐할 수 있게 되었다. 산들도, 그리고 내 문제까지도.. 난 루블리야나 광장을 다시 보고 싶었고, 사랑과 미움의 감정도 다시 일깨우고 싶었다. 절망과 지루함 조차도. 그 자잘하고 바보 같기도 한 그 일상들 말이지. 하지만 우리 존재에 대한 기쁨 그 자체이기도 한.

영화로 만들어져 2010년 주요 도시 몇 군데서 특별 상영전을 한 모양인데 서울도 그중 하나였으니 한국에서도 이 영화를 본 분들이니 많을 터인데, 아마도 한국어로 번역된 책도 출간되었으리라 짐작된다. 코엘료의 감각이 돋보였던 것은 젊고 시크한 동구권 여성 베로니카의 눈으로 그려지는 이야기들이 매우 쿨하다는 것이다. 정신 병동을 소재로 한 소설에서 흔히 보이는 과장된 진지함이나 부조리에 대한 지나친 확대 해석, 아님 개인이 처한 현실에 대한 과도한 피해망상적 스토리 전개 등이 별로 없이 마치 수도원과 같은 분위기로  일견 고요한 가운데 behind the scene에서 벌어지는 에피소드들을 차분히 그려갔다는 것이다. 그리고 더군다나 우아한 척, 현학적이거나 별 영양가 없는 교훈적 이야기를 늘어놓지도 않는다는 거다.



stay cool while you are still al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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