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동민 Jun 29. 2019

한밤중의 대화


"얼마나 긴 이야기를 듣고 싶어?"


그날 자기 전에 내가 그 질문을 캐시에게 던진 것은 순전히 그녀의 입장을 배려하기 위함이었다. 그래서 캐시의 대답을 기다리며 내가 그녀 쪽으로 돌아 누웠을 때 돌아온 그녀의 말에 나는 놀라지 않을 수 없었다. 


"토미, 네가 굳이 다 말하지 않아도 난 오늘 네가 찾아간 그 사람이 너를 어디까지 몰아세웠는지 알 수 있어. 늘 그렇듯이 네가 얼마나 실망스러운 하루를 보냈을지 난 이미 다 알 수 있다고. 그러니까 다시 길게 설명하려 하지 않아도 돼."


그녀는 잠시 몸을 비트는가 싶더니 침대 옆 램프의 줄을 당겨 불을 껐다. 


" 네가 직접 그 교수의 연구실 문을 노크하지는 않았겠지. 너는 분명 연구실 옆 창문의 블라인드를 올렸다 내렸다 하고 있어서 지나가던 학생이 너를 발견했다면 복도의 채광을 조절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을 거야. 하지만 너는 너의 모든 감각을 닫힌 연구실 문에 집중하고 있었을 거야. 문틈 사이로 너의 스니커즈를 밀어 넣을 수 있을 만큼의 빛이 새어 나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겠지. 그래서 그 교수의 지도학생이 연구실의 문을 열고 나오는 순간 너는 그 학생에게 달려가 잽싸게 인사했겠지. 너답지 않게 큰 소리로 말이야. 그리고 궁금하지도 않은 안부를 물었겠지. 행여 연구실 문이 다시 닫힐까봐 넌 한 손을 문 위에 올려놓았을 거야. 그 자세가 꽤 어색했을 거라는 건 보지 않아도 너무 뻔해. 넌 알아채지 못했겠지만 교수는 이미 알고 있었을 거야. 네가 다음에 어떤 행동을 할 것인지 다 알고 있었을 거라고. 넌 그때 오늘 일이 크게 잘못될 것이라는 것을 눈치챘어야 했어. 너의 그 부자연스러운 제스처 하나하나가 상대방에게 어떤 영향을 주고 있는지 그런 것쯤은 알아챌 수 있어야 했다고, 토미!"


그다음 순간 나는 캐시에게 어떤 대답을 해야 할지 몰라 입을 닫았다. 어둠 속에 흩어져 있던 침묵의 알갱이들이 한 데 뭉쳐 내 얼굴 위로 떨어지는 게 느껴졌다. 나는 조금 전 캐시에게 '얼마나 긴 이야기를 듣고 싶은지' 질문하던 내 모습을 되짚어 보았다. 그때 내가 캐시에게 돌아 눕지 않고 천장에 시선을 고정한 채 대화를 시작했다면 캐시의 대답은 달라졌을까. 캐시에게 얼마나 긴 이야기를 듣고 싶어 라고 묻는 대신에 오늘은 네가 너무 피곤해 보이는데 라고 얘기했어야 했을까. 아니면 아무 말하지 말고 캐시의 팔을 살짝 만져줬더라면 어땠을까. 나는 내가 되지 못했던 몇 분 전 나의 모습을 계속해서 떠올렸다. 


이전 09화 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brunch book
$magazine.title

현재 글은 이 브런치북에
소속되어 있습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