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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민 May 16. 2019

사랑한다는 말로도 위로가 되지 않는


"이제 와서 이 노래를 다시 듣는 이유가 뭐죠. 나는 정말이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요. 정말 지긋지긋하다고 밖에 지금 상황을 뭐라 달리 말할 수 없군요. 잊을 만하면 꺼내 듣고 기억이 사라졌다고 믿으면 어김 없이 이 음악이 흘러나오죠. 그럼 당신은 다시 또 무거운 이불 속으로 들어가겠죠. 당신이 그렇게 애착하는 검정색 이불 말이에요. 그 밑에 몸을 숨기고 들릴 듯 말듯한 소리로 한숨을 내쉬겠죠. 그러고는 언제 끝날지도 모르는 침묵 안에서 지낼 거예요. 이것 봐요. 그 이불 밑에 있으면 내가 아무것도 못 느낄 거라 생각하나 본데, 난 모든 걸 보고 들을 수 있다고요. 오히려 당신이 이불 속에 있는 동안 내 감각은 뭐라 말할 수 없을 만큼 예민해져요. 당신의 어깨가 조금 들썩이는 것만 느껴도 내 기분이 어떻게 변하는지 당신은 알아야 해요. 당신 옆에서 당신을 보고 있는 나를 좀 생각해 봐요. 당신이 나에 대해 작은 애정이라도 갖고 있다면, 아니 당신 옆에서 견디고 있는 나를 조금이라도 의식한다면, 결코 이런 행동을 다시 반복하려 들지 못할 거예요. 그러니 이 지겨운 노래를 당장 끄는 게 좋겠어요."


"당신이 무언가를 오해하고 있나 본데 지금 내가 이 노래를 다시 트는 이유는 당신이 말한 일련의 행동과는 전혀 관련이 없는 것이오. 나는 그저 이 사람의 목소리를 듣고 있소. 힘주어 부르고 있지는 않지만 무언가를 말하려고 애쓰고 이 사람의 목소리 말이오. 누군가는 이런 목소리를 듣고 싶어 하지 않을 거요. 당신이 꼭 그렇다는 것은 아니오. 당신이 이 노래를 경멸하는 이유가 이 사람의 목소리 때문은 아니라는 것 정도는 나도 알고 있소. 그렇다고 이 사람의 목소리를 당신이 좋아할 거라 생각하는 것도 아니라오. 내가 그 정도로 판단력이 없는 사람은 아니지. 사실 이 사람의 목소리가 당신의 타입은 아니라는 건 알고 있소. 거기 묻어 있는 담담함을 당신은 아마 오해하고 있을 거요. 노래하는 사람이 자신이 없어서 그런 것이라 생각하겠지. 하지만 조금만 더 귀 기울여 들어보면 말이오. 그러니까 이 사람이 노래 속에서 문장을 어떤 톤으로 마무리하는지, 그리고 그 후에 오는 공백을 어떤 맘으로 대하고 있는지 그런 부분에 집중할 수 있다면 이 사람의 태도를 당신도 이해할 수 있게 될 거요. 그건 전혀 어려운 일이 아니지. 우리 에이든도 쉽게 알아챌 수 있을 정도라오. 문제는 당신이 얼마나 이 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하느냐 하는 것에 달려있소. 슬쩍 지나가는 광고 정도로 이 노래를 취급해서는 절대 노래하는 사람의 태도를 읽어낼 수가 없소. 그건 노래를 만든 사람에게도 아주 무례한 일이오. 아무튼 내 말은 누구나 이해할 수 있는 것을 당신은 좀처럼 시도해 보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오. 굳이 얘기하자면 한 곳을 지속적으로 바라보는 연습, 지금 당신에게 필요한 것은 그런 것이 아닌가 싶소."


"또 그 연습 얘기군요. 연습이란 게 도대체 뭐죠. 당신이 말하는 시시한 것들을 계속 반복하라는 얘긴가요. 아무도 관심 없는 것들에 내 소중한 시간을 허비하라는 거겠죠. 그리고 작은 방 안에서 의자를 들었다 놓았다 하는 것과 같은 행위를 끊임없이 계속하라는 말이군요. 그러다 보면 내 몸은 그 패턴에 익숙해져 지겠죠. 그뿐인가요. 내 생각도 모조리 작은 방 쓸모 없는 의자에 사로잡히겠죠. 의자를 올렸다 내렸다 하는 것 말고는 나는 아무 사고도 하지 못하게 될 거예요. 내 머리가 그렇게 딱딱해 지길 원하나요. 당신이 말하는 연습이라는 것은 스스로를 경직되게 하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당신은 알아야 해요. 그래서 당신은 다음에 뭘 하자는 거죠. 내가 편협한 사람이고 더 이상 타협할 여지가 없는 사람이 된 것을 축하해 줄 건가요. 지나가는 사람들을 붙잡고 내 옆에 있는 이 사람도 마침내 나와 같은 사람이 되었소, 신념이 확고한 사람 말이오, 이렇게 자랑하고 다닐 건가요. 내가 다시 얘기하지만, 정말 몇 번째 똑같은 말을 하는 건지 모르겠군요. 사람들은 당신의 어처구니 없는 행동을 비웃을 거예요. 당신은 당신 스스로가 확신을 가질 때 짓는 표정이 어떤지 모를 거예요. 굳게 다문 입 때문에 입술이 잘 보이지 않을 때 말이죠. 그 때 당신 얼굴은 비참해지거든요. 당신은 거울을 좀처럼 보지 않는 사람이니 아마 잘 모를 테지만."


"내가 원래 거울을 잘 보지 않았다고 생각하나 본데, 그렇다면 그건 당신이 나를 너무 모르고 있기 때문일 거요. 당신의 부유하는 시선으로는 날 면밀히 관찰하기 힘들었을 테지. 나는 원래 거울을 매일 아침 보는 사람이었소. 거울을 보면서 하루의 일과를 미리 그려보곤 했지. 냉장고에 양배추를 넣어 놓을 장소에서부터 퇴근할 때 차를 세울 곳까지 난 하루를 빠르게 머릿속으로 훑어보곤 했다오. 그러다 내 표정이 중요한 역할을 하게 될 어떤 대목이 떠오를 때면, 예를 들면 루시를 산책시키고 있는 메이어 씨를 해질 무렵 공원에서 만났을 때 어떤 상냥한 미소를 건넬지 난 거울을 보며 연습하곤 했지. 그건 메이어 씨가 고된 하루에서 보람을 느낄 수 있느냐에 지대한 영향을 끼칠 수 있는 순간이기 때문에, 내가 도움이 되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연습했던 거요. 하지만 난 어느 때인가부터 거울 앞에서 하루를 준비하는 행위를 할 수 없을 거라는 걸 알게 되었소. 굳이 자세히 그 이유를 말하고 싶지는 않군. 당신도 우리 집 그 거울 앞에 서보면 알 수 있을 거요. 내가 지금 말할 수 있는 것은 내가 거울을 잘 보게 되지 않게 된 이유가 거울의 상태와 관련이 있다는 정도라 할 수 있겠소. 그건 누구나 거울 앞에 서서 주의를 기울여 거울을 보면 쉽게 알 수 있는 사항이라오. 당신은 사소하다고 생각할지도 모르겠지만, 난 그로 인해 생활의 패턴이 완전히 바뀌어 버렸소. 하루를 준비하는 행위를 다른 곳에서 보충해야만 했지. 뭐 내 나름대로의 방법을 찾아내긴 했지만 그건 여간 성가신 일이 아니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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