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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민 Oct 06. 2020

안락사 프로토콜



실험용 생쥐들은 와이즈만 연구소 맨 위층에서 사육되고 있었다. 내일이면 실험실 생활도 끝이야. 빙웬은 화물용 엘리베이터 7층 버튼을 눌렀다. 문이 닫히자 빙웬은 방금 출력한 종이를 얼굴 높이까지 들어 올려 그 위에 적힌 생쥐들의 번호를 위에서부터 아래까지 눈으로 훑었다.  오늘 이 쥐들을 모두 죽이고 나면 정말로 끝인 거야. 이제 다시 이 곳에 와야 할 이유는 없어. 빙웬은 종이 귀퉁이를 잡고 있던 그의 가느다란 검지 손가락으로 아직 가시지 않은 출력물의 온기를 느꼈다. 순간 빙웬의 손가락에 힘이 들어가는 바람에 종이 아래쪽 모서리가 살짝 구겨졌다. 그리고 비릿한 프린터 잉크 냄새. 누군가의 향수처럼 엘리베이터 벽을 따라 퍼져 나갔다.


5층에서 엘리베이터가 멈추고 문이 열렸다. 갈색으로 그을린 피부에 청록색 면 스크럽 슈트를 입은 중년의 사내가 올라탔다. 파블로였다. 그는 동물실 관리인이다. 윗옷을 하의 안으로 집어넣은 탓에 그가 걸을 때마다 허리를 동여 메고 있던 흰색 면 고무줄의 매듭이 배꼽 밑에서 달랑거렸다. 그는 빙웬을 보더니 활짝 웃으며 마치 엘리베이터 안이 소란스럽기라도 했던 것처럼 큰 소리로 인사를 건넸다. “이봐, 브라더. 또 생쥐 호텔에 올라가시나. 애들 밥은 우리가 잘 챙겨주고 있으니 걱정 말라고.” 파블로의 목소리와 담배 냄새가 한데 뒤섞여 빙웬에게 전해졌다.


와이즈만 연구소에서 그렇게 우렁찬 소리로 인사하는 사람은 파블로뿐이었고, 빙웬을 브라더라고 부르는 사람도 그가 유일했다. 연구원들은 엘리베이터에서 가볍게 눈썹을 들어 올려 인사했고, 교수들은 내릴 때까지 구두 앞코를 내려다보고 있곤 했다. 빙웬은 파블로의 탁한 발성과 필리피노 억양이 마음에 들었다. 파블로가 의미를 알아차리기 힘든 슬랭을 섞어 말할 때면 빙웬은 마음속 불안이 사라지는 것 같았다.   


‘카이저 병원 예약 안내: 1월 30일 오후 3시. 9층. 후안 에르난데스.’ 와이즈만 연구소 7층 가운 룸의 스틸 벤치에 앉아 하늘색 덧신을 신고 있을 때 빙웬에게 문자가 왔다. 우울증 상담 예약. 빙웬은 덧신과 같은 색깔의 부직포 헤드캡을 머리에 썼다. 그리고 수납장에 개켜진 미디엄 사이즈 가운을 하나 꺼냈다. 꿉꿉한 연보라색 면 가운에서 향긋한 다우니 냄새가 났다. 목 뒤와 허리 뒤에서 가운의 끈을 졸라 맨 뒤 빙웬은 라텍스 장갑 박스들 앞에서 잠깐 머뭇거렸다. 스몰과 미디엄. 어느 것도 빙웬의 손에 꼭 맞지 않았다. 빙웬은 박스에서 미디엄 장갑 두 개를 뽑아 손에 꼈다. 상아색 라텍스 장갑은 빙웬의 손가락 끝에 조그만 에어 포켓을 남겼다. “너 라텍스 장갑 무지 좋아하는구나?” 언젠가 스테파니가 빙웬의 실험대 위에 쌓여 있는 장갑 박스들을 가리키며 킥킥 웃었다. 상아색, 하늘색, 그리고 보라색까지 반쯤 뽑아 쓰다가 만 장갑들이 크리넥스 티슈 갑 모양을 한 박스들 안에 남아 있었다. 박스들 중 절반은 옆면에 대문자 S가, 나머지에는 M이 쓰여 있었다. 빙웬은 스테파니에게 아무런 대꾸도 하지 않고 한쪽 입고리를 올려 싱긋 따라 웃었다. 마스크를 써야 할까. 가운 룸을 나서기 전 빙웬은 고민했다. 생쥐들이 풍기는 암모니아 냄새와 자신의 식도를 타고 올라오는 마늘 냄새 중 어느 것도 불쾌하기는 마찬가지였다. 그는 자신의 입을 가리는 편을 택했다. 표정은 숨기면 숨길 수록 더 안전한 법이니까.


이른 아침이라 그런지 해부실에 나와 있는 사람은 칭링뿐이었다. “이야, 오늘이 그날이구나!” 그녀는 생쥐의 복강에 아베르틴 마취제를 주사하다 말고 케이지를 잔뜩 실은 카트를 밀고 들어오는 빙웬을 향해 소리쳤다. 그녀의 손 위에서 마취제를 한방 맞은 생쥐가 끽하고 바둥거리는가 싶더니 노란 오줌을 몇 방울 지렸다. 칭링은 빙웬에게 눈웃음을 지어 보이면서 스티로폼 블록 위에 생쥐를 살포시 내려놓고 끼고 있던 장갑을 벗었다. 상아색 장갑이 가리고 있던 칭링의 손등에서 흐릿한 검버섯이 나타났다. 그녀는 수술용 가위와 주사 바늘이 담긴 주석 도구함 옆에 있는 박스에서 새 장갑을 한 짝 꺼냈다. 엑스 스몰.


“빙웬, 그거밖에 안 먹어서 되겠어? 더 먹어야지!” 그녀는 대나무 찜기에서 샤로웅바오 하나와 슈마이 두 개를 젓가락으로 집어서 빙웬의 앞접시에 올려 주었다. “그렇게 복초이만 먹으니까 살이 안 찌지. 넌 고기가 들어간 걸 먹어야 된다고!”


빙웬은 그런 칭링의 잔소리가 싫지 않았다. 빙웬이 미국에 온 이후로 그녀 말고는 빙웬의 외모나 식습관을 지적하는 사람이 없었다. 실험실 회식이 있을 때면 빙웬은 칭링의 옆자리나 앞자리에 앉았다. 그 자리는 항상 테이블의 끝자리여서 옆자리 동료에게 양해를 구하지 않고 언제든지 화장실에 갈 수 있었다. 여차하면 먼저 일어나 집에 돌아가도 눈치채는 사람이 많지 않았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빙웬은 그 자리에선 시답잖은 대화에 낄 필요 없이 미각에만 집중할 수 있어 좋았다. 아직도 빙웬은 사람들이 어떻게 꽥꽥 소리를 질러대고 고개를 젖히고 깔깔 웃어 대면서 밥을 먹을 수 있는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칭링 옆에서는 그런 마구잡이식 대화를 억지로 할 필요가 없었다. 메뉴를 고를 때는 가격이 적당한지를 얘기하고 음식을 먹을 때는 딤섬 안에 뭐가 들어있는지만 말하면 그만이었다. “지난주에 우리가 교배하려고 브리딩 케이지에 넣어 둔 그 암놈 기억나지? 내가 어제 그 녀석 꼬리를 잡고 들어 올려 봤는데 말이야. 배가 아주 제대로 부풀어 올랐더라고. 여섯 마리는 족히 나올 것 같아!” 자리를 뜨고 싶을 때면 칭링은 그렇게 그들의 ‘일’에 대해 얘기했다. 그러면 빙웬은 짐짓 놀라는 체하다 말고 미간을 찌푸리며 심각한 표정을 지었고, 곧바로  “그럼 얼른 가서 확인해 보는 게 좋겠네요.” 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후안. 후안 에르난데스는 어떤 사람일까. 그와 삼십 분 상담한다고 달라지는 게 있을까.


9년 전 교내 대학원생 상담 센터에서 만났던 정신과 의사를 떠올리며 빙웬은 자기 키만 한 이산화탄소 탱크의 밸브를 오른쪽으로 돌렸다. 쉭 하는 짧은 소리와 함께 동그란 계기판에 빨간 바늘이 시계 방향으로 삼십 도 정도 휙 움직였다. 가스탱크에 이산화탄소가 있는 걸 확인한 빙웬은 다시 밸브를 잠갔다. 그 백인 의사는 스티브 잡스 같은 차림에 얼굴도 살이 조금 더 쪘다는 것 말고는 잡스와 다른 점을 거의 찾을 수가 없었다. 그는 바퀴가 달린 허먼 밀러 의자에 등을 기대고 스니커즈를 신은 오른발을 왼쪽 무릎에 올려놓고 있다가 빙웬이 들어오는 것을 보고 그의 희고 까칠한 턱수염을 만지면서 인사했다. 빙웬을 상담실로 안내해 주었던 호박색 눈동자를 가진 간호사가 문을 닫고 나가자 잡스는 턱을 만지던 그의 손으로 이마를 한번 문지르는가 싶더니 손을 머리 뒤로 넘겨 그의 목덜미를 주무르며 “무슨 일이야?” 하고 물었다. 순간 빙웬은 뭐라고 대꾸해야 할지 생각이 나지 않아서 의자를 당기며 자세를 고쳐 앉았다. 그가 앉아 있던 플라스틱 스툴이 콘크리트 바닥을 긁으며 드르륵 소리를 냈다. 그 바람에 방금 전까지 빙웬의 눈가에서 글썽이는 눈물이 다시 그의 눈 안으로 쏙 들어가 버리는 것 같았다. 지금 여기서 내가 무슨 말을 할 수 있을까.  


설치류 안락사 프로토콜. 반드시 이 절차를 따라 하십시오. 실험동물 관리 위원회. 해부실 벽에 붙은 그 안내문 밑에는 이산화탄소 탱크와 밸브로 연결된 투명한 아크릴 상자가 있었다. 빙웬은 전자레인지 크기 정도 되는 상자의 뚜껑을 열었다. 프로토콜에 포함된 것은 아니었지만 빙웬에겐 쥐들을 안락사시키기 전 그 아크릴 상자를 소독용 알코올로 깨끗이 닦는 버릇이 있었다. 에탄올 스프레이를 안쪽 벽면과 뚜껑 아랫면에 골고루 뿌린 다음 구석구석 닦았다. 상자 바닥에 동물의 털이 떨어져 있거나 용변 자국이 남아 있으면 페이퍼 타올로 말끔하게 지웠다. 암모니아 냄새가 나는가 싶더니 이내 소주 같은 냄새가 코를 찔렀다. “얘네들은 소독약 냄새 맡으면서 죽는 거 안 좋아한다니깐.” 옆에서 스티로폼 블록 위에 올려진 마취된 생쥐의 발바닥을 손가락으로 꼬집어 보고 있던 칭링이 끼어들었다. “익숙한 냄새 맡으면서 편하게 가게 내버려두어. 축축한 지푸라기 냄새, 지저분한 항문 냄새, 친구들 털 냄새. 얘네들은 이런 걸 맡아야 안전하다고 느낀 대도 그러네. 내가 이 일만 벌써 삼십 년 가까이하고 있어요. 그거 하나 눈치 못 챘을라고. 그리고 알코올로 닦는 거, 그거 안락사 프로토콜에도 없는 거 너도 알지?” 그녀가 활짝 웃는 것이 보였다. 마스크를 쓰고 있지 않아서 칭링의 노르스름한 앞니가 드러났다. 그녀의 손은 이제 마취된 생쥐의 사지를 바늘로 찔러 고정시키고 수술용 가위로 내장을 덮고 있는 피부를 절개하고 있었다. 생쥐의 간과 횡격막이 보이는가 싶더니 팥알 만한 심장이 팔딱이는 게 보였다. 칭링이 펌프의 스위치를 올리자 유리병에 담겨 있던 식염수가 윙 하는 소리를 내며 고무 튜브를 따라 흐르더니 고무 튜브 끝에 달린 작은 나비침으로 또로록 흘러나왔다. 칭링은 잽싸게 나비침을 생쥐의 심장 오른쪽에 찔러 넣고 동시에 가위로 심장 반대편 표면에 흠집을 냈다. 칭링의 손은 숙련된 테크니션답게 정확했고 거기엔 불필요한 동작이 하나도 없었다. “실례하겠습니다.”그녀는 그 말을 알 수 없는 민요 멜로디를 붙여 콧노래처럼 흥얼거렸다. 붉은 피가 생쥐의 심장에서 새어 나와 간 주변에 고이는가 싶더니 열린 피부를 타고 몸 밖으로 흘러내렸다.


빙웬은 카트에 쌓인 케이지 하나를 집어 이제 더 이상 필요 없게 된 생쥐 식별 번호가 적힌 태그를 떼어 냈다. 사료가 올려져 있던 케이지 덮개를 들어 올리자 덮개의 철망 사이로 사료를 갉아먹고 있던 검은 생쥐 한 마리가 바둥거리다가 케이지 안으로 톡 떨어졌다. 하나, 둘, 셋, 넷, 다섯. 빙웬은 케이지 안에 있는 동물의 수를 세었다. 다섯 마리의 쥐들은 일제히 하던 동작을 멈췄다. 오줌을 지리는 쥐는 한 마리도 없었다. 빙웬은 아크릴 상자 안에 생쥐 다섯 마리가 든 케이지를 넣고 상자 뚜껑을 닫았다. 그가 이산화탄소 탱크의 밸브를 돌리자 다시 쉭 하는 소리가 났다. 생쥐들이 바빠졌다. 케이지 속 이곳저곳으로 뛰어다니고 코에 달린 수염을 움찔거리고 일어섰다 앉았다 하기를 반복했다. 안락사 프로토콜. 숨을 멈출 때까지 기다리라. 빙웬은 생쥐들의 마지막 움직임 하나하나를 눈에 담았다.


“그렇게 해서 어느 세월에 다 하려고. 그냥 검은 놈이든 갈색 놈이든 다 한꺼번에 넣어 버려!”


관류 작업을 마친 칭링이 엄지 손가락 만한 생쥐의 목을 가위로 자르면서 말했다.


“오늘은 하나씩 천천히 하려고요. 이제 내가 더 해야 할 실험이 남아 있는 것도 아니잖아요.”


이전까지 웃고 있던 칭링은 그 말을 듣고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녀는 동물의 두개골을 감싸고 있는 피부를 도려내고 끝이 기울어진 작은 가위로 두개골을 잘라 열고 새끼손톱만 한 스테인리스 주걱으로 생쥐의 뇌를 떠냈다. 칭링은 핏물이 빠진 살구색 연한 뇌를 포름알데히드 고정액이 담긴 동그란 유리병 속으로 퐁당 빠뜨렸다.


“그동안 고마웠어요, 칭링.”


빙웬은 그다음에 무슨 말이라도 더 하고 싶었지만 할 수가 없었다. 덕분에 이 많은 쥐들도 키워보고 라는 말이 떠올랐다가 멍청한 소리 같다는 생각에 웃음이 날 것만 같았다. 빙웬은 지난 수년 동안 동물실에서 있었던 일들을 떠올렸다. 생쥐를 잡을 땐 목덜미를 잡아야 한다고 칭링이 시범을 보여 주던 날을 생각해도 웃음이 났고, 생쥐 목구멍으로 물에 탄 치료제를 밀어 넣다가 약지를 물린 날을 생각해도 웃음이 났고, 어미 쥐가 새끼를 낳자마자 먹어 치워서 새끼의 잔해만 발견했던 날을 생각해도 웃음이 났다. 빙웬은 하마터면 입을 벌리고 억 하는 소리 지를 뻔했다. 그는 지난 9년 남짓한 시간 동안 자신과 그 모든 순간을 함께 지켜봤던 칭링을 바라보았다. 칭링은 아직도 웃고 있지 않았다. 그녀의 얼굴은 오히려 슬픔으로 약간 일그러지는 것 같았다. 그녀는 계속 포름알데히드 속에 가라앉은 살구색 뇌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러다 곧 유리병 마개를 닫고 자갈처럼 갈려진 얼음 속에 유리병을 쑥 밀어 넣었다.


아크릴 상자 속 생쥐들은 이제 미동도 하지 않았다. 미세하게 오르락내리락하던 가슴 근육도 이젠 움직이지 않았다. 모두 비스듬히 누워 있었고, 모두 눈을 지그시 감고 있었다. 얼굴에 고통스러운 표정은 없었다. 프로토콜은 잘 작동하는 것이 분명하다.


안락사의 마지막 단계. 빙웬은 질식한 생쥐들을 꺼내 테이블에 가지런히 눕혔다. 배가 바닥을 향하게. 그는 오른손에 쥔 수술용 가위의 뭉뚝한 옆면으로 생쥐의 뒷목을 꾹 누르고 왼손으로는 엄지와 검지로 생쥐의 머리를 쥐고 앞쪽으로 부드럽게 잡아당겼다. 오드득. 동물의 경추가 분리되는 소리가 빙웬의 손끝에 전해졌다. 빙웬은 또렷이 들을 수 있었다. 작은 생물이 평온하게 생을 마감하는 순간에 외치는 비명 소리를. 두 번째도, 세 번째도, 네 번째도, 다섯 번째도 다르지 않았다. 빙웬은 그것들을 쓸어 담아 바이오해저드 마크가 인쇄된 빨간 봉투에 담았다. 빙웬은 카트 위에 남은 열일곱 개의 케이지가 모두 사라질 때까지 열일곱 번의 안락사 사이클을 반복했다. 사체는 모두 아홉 개의 빨간 봉투에 나누어 담았다. 검은 쥐, 갈색 쥐, 머리털이 빠진 쥐, 피부염이 있는 쥐, 어린 쥐, 늙은 쥐, 돌연변이 유전자를 가진 쥐, 돌연변이의 대조군이 되는 쥐, 치료제를 주사한 쥐, 플라시보를 주사한 쥐, 야윈 쥐, 뚱뚱한 쥐, 정체를 알 수 없는 쥐, 그냥 쥐. 모두 빨간 봉투에 담겨 바이오해저드 스티커가 붙은 냉동고로 향했다. 아홉 개의 빨간 봉투가 하나씩 냉동고 안으로 던져졌다. 그때마다 그 안에 얼어있던 다른 사체들과 부딪혀서 툭 하고 둔탁한 소리를 냈다. 바이오해저드 스티커 밑에 붙은 안내문에는 사체는 별도의 검열 과정을 거친 후 샌프란시스코 동물원에 맹수들의 먹이로 기증될 것이라고 쓰여 있었다. 아, 끝까지 알찬 인생. 아니 자생(子生).


“그래서 빙웬, 이다음엔 대체 뭘 할 계획이야?”


키프니스 교수가 물었다.  빙웬이 와이즈만 연구소의 키프니스 교수 실험실에 들어온 뒤 몇 해가 지나자 교수는 적어도 일 년에 한 번은 빙웬에게 같은 질문을 했다. 빙웬은 매번 다르게 대답했다. 2015년에는 바이오텍을 창업할 것이라 했고, 2016년에는 과학 전문 기자가, 2017년에는 다큐멘터리 제작자가, 2018년에는 소설가가, 2019년에는 아무래도 미대에 진학하는 편이 낫겠다고 대답했다. 2010년 처음 키프니스 교수와 만났을 때를 빼고는 빙웬은 한 번도 과학 연구를 계속하고 싶다는 얘기를 키프니스 교수에게 하지 않았다. 실험만 아니면 무엇이든 해도 좋다고 생각했다. 하지만 동료들이 모두 실험실을 떠나는 10년에 가까운 시간 동안 빙웬은 자신이 말한 일들 중 아무것도 지키지 못했다. 그는 키프니스 교수의 실험실을 떠나지 않았다. 2020년, 키프니스 교수는 빙웬에게 더 이상 같은 질문을 하지 않았다. 대신 본인이 와이즈만 연구소를 떠나게 됐다고 했다. 자신은 늘 이스라엘로 돌아가고 싶었는데 그쪽 연구소에서 마침 좋은 자리를 제안했다며. 그렇게 교수가 떠났다.


카이저 병원은 와이즈만 연구소 바로 맞은편에 있었다. 병원이라기보다는 스타트업 오피스에 더 잘 어울릴 법한 10층짜리 유리 건물이었다. 1월의 샌프란시스코 하늘을 덮은 회색 구름이 병원 유리창을 잿빛으로 바꿔 놓았다. 현관으로 드나드는 사람은 많은데 유리창 안은 한적해 보였다. 빙웬이 듣기로는 입원실이 없고 진료실만 있는 병원이라고 했다. 입원 환자도 없는데 왜 이렇게 병원이 크고 높아야 하는지. 빙웬은 이해가 되지 않았다.


미국의 의료 시스템에 대해서라면 그는 아직도 아는 게 별로 없었다. 빙웬은 한 번도 병원에 가지 않았다. 와이즈만 연구소가 연구원들에게 카이저 병원을 이용할 수 있는 의료 보험을 제공해 주긴 했지만 빙웬은 좀처럼 쓸 일이 없었다. 내일 연구소를 그만두면 보험은 한 번 써보지도 못한 채 없어지고 만다. 빙웬은 아깝다고 생각했다. 그 날 오후 병원 예약도 그런 취지에서 잡아 본 것이었다. 그동안 자신이 마땅히 누릴 수 있는 것들을 누리지 못했다는 생각. 그는 퇴사 전에 자신에게 마지막 선물을 주고 싶었다.


물론 선물을 얻어 내기까지는 약간의 노력이 필요했다. 빙웬은 카이저 병원에서 자신을 그의 주치의라고 젠체하며 소개하는 글래드웰 박사를 만나고, 혈액 검사를 위해 자신의 팔뚝을 고무줄과 주사 바늘로 무장한 간호사의 뚱뚱한 손에 수차례 내어주고, 지금 삶이 얼마나 많은 절망으로 둘러싸여 있는지 병원에서 일하는 이 사람 저 사람에게 구구절절 설명해야 했다. 글래드웰 박사는 마침내 가엽다는 표정으로 빙웬이 카이저 병원의 정신 건강 증진 센터에서 상담을 받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이제 곧 크리스마스고, 연초에는 여기 의료진이 파업을 할 예정이라 당장은 힘들 겁니다. 내가 필요한 조치를 취해 놓을 테니 연락을 기다리세요.”


빙웬은 자신이 운이 좋다고 생각했다. 1월 말까지 잡을 수 없을 것 같던 상담 예약이 거짓말처럼 연구소를 그만 두기 하루 전인 1월 30일에 잡혔다는 연락을 받았던 것이다. ‘후안 에르난데스. 9층’ 카이저 병원 엘리베이터 앞에서 빙웬은 오전에 받은 문자를 다시 열어 보았다. 후안. 에르난데스. 빙웬은 천천히 그의 이름을 작게 소리 내어 읽었다. 빙웬은 그 이름에서 묘한 안도감을 느꼈다. 하지만 엘리베이터가 팅 소리를 내며 빙웬 앞에 도착하자 그는 이내 초조해졌다. 오늘은 무슨 얘길 할 수 있을까. 그런다고 뭐 달라지는 게 있을까. 나에게 주어진 시간은 고작 삼십 분뿐인 걸. 괜한 짓을 하는 건 아닐까. 빙웬의 손에서 땀이 배어 나왔다. 빙웬은 손에서 미끄러질 뻔한 핸드폰을 다시 꽉 쥐고 엘리베이터에 올라탔다.


카이저 병원의 9층은 비어 있었다. 아무 소리도 나지 않았고 아무 냄새도 나지 않았다. 조명은 모두 꺼져 있었고 큰 유리창으로 들어오는 햇살이 대기실로 보이는 넓은 공간을 반쯤 비추고 있었다. 자작나무 패널로 마감한 벽을 따라 옅은 회색 패브릭 쿠션이 부착된 벤치가 있었다. 흰색 아크릴로 만들어진 등록 데스크는 오후의 햇빛을 받아 번뜩거렸고, 등록 데스크 뒤쪽 벽에는 금문교, 케이블카, 바다사자, 자이언츠 구장이 초현실적으로 뒤섞여 그려져 있었다. 빙웬은 병원의 그런 모던한 인테리어가 어딘가 모르게 와이즈만 연구소 로비와 닮아 있다고 생각했다. 어느 것 하나 잘못된 것은 없었지만 서로 어울리지도 않는 것들.


벽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있다가 빙웬은 자신의 바로 앞에 한 여성이 앉아 있다는 사실을 깨닫고는 깜짝 놀라 뒤로 물러났다. 등록 데스크의 카운터 바로 뒤에 머리 끝만 겨우 보일 듯이 앉아 있던 그녀를 빙웬은 미처 발견하지 못했다.


“예약하셨나요?”


검은 머리를 뒤로 묶어 올리고 작은 민들레 패턴이 박힌 베이지색 유니폼을 입은 그녀가 빙웬을 올려 보지도 않고 퉁명스럽게 물었다. 빙웬이 뭐라고 대답하기 전에 그녀는 “거기 카드 리더기에 카이저 카드 긁으세요.” 라며 흰색 아크릴 카운터 위에 있는 까만 플라스틱 리더기를 손가락을 가리켰다. “아, 네. 미안합니다.” 빙웬은 자기가 왜 갑자기 사과를 했는지 알지 못했지만 얼른 그의 지갑에서 와이즈만 연구소 배지 뒤에 넣어 두었던 카이저 병원 카드를 꺼냈다. 재작년에 DMV에서 발급받은 주황색 종이로 된 임시 면허증이 카드 뒷면에 붙어서 딸려 나왔다. 민들레 유니폼을 입은 여자는 자신의 앞에 있는 모니터를 쳐다본 채로 20불을 결제하겠다고 했다. 빙웬은 그 가격이 싼 것인지 비싼 것인지 감이 오지 않았다. 아, 저는 카이저 의료 보험이 있습니다만 이라고 얘기를 꺼내려다가 “저기 앉아 계세요.”라는 그녀의 단호한 말에 입을 열지 못하고 돌아섰다.


대기실을 서성거리던 빙웬은 진료실 쪽으로 통하는 것으로 보이는 문을 열고 키 작은 남자가 자신을 향해 걸어오는 것을 보았다. 둥그스름한 얼굴을 한 그는 삼 대 칠 정도로 가르마를 타 단정히 빗어 넘긴 검은 머리를 갖고 있었다. 그의 큰 눈에는 짙은 쌍꺼풀이 있었고 그의 송충이 같은 콧수염이 깔끔하게 손질되어 있었다. 그의 다부진 상체에 착 달라붙은 남색 스웨터에는 붉은 사슴 실루엣과 하얀 눈꽃송이가 수놓아져 있었고, 스키니 핏의 고동색 코르덴 바지는 복숭아 뼈 위로 말아 올라가 있어 아가일 무늬가 있는 카키색 양말을 드러내고 있었다. 그리고 모카신 구두. 그 구두가 빙웬 앞에서 멈춰 섰다.


“빙웬 씨 맞으시죠? 후안입니다. 기다려 주셔서 감사해요. 이쪽으로 오시죠.”


후안이 그의 큰 눈망울로 빙웬을 올려다보며 자신이 방금 나왔던 문을 손 끝으로 가리켰다. 순간 빙웬은 이야기를 나누고 있는 남성이 자신보다 키가 작다는 사실에 놀랐다. 후안은 빙웬보다 반걸음 앞서 사뿐사뿐 걷다가 금색 손잡이를 돌려 문을 열었다. 문 안쪽에 있는 복도 양 옆으로 진료실들이 줄지어 있었지만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아직 파업이 안 끝났어요.”


후안은 소리 내지 않고 멋쩍은 웃음을 지었다. 그의 코 밑에 달린 송충이도 같이 가늘게 늘어지는 바람에 빙웬은 킥킥 웃음이 나올 것 같았다. 적어도 후안은 안전한 사람이야. 빙웬은 그렇다고 느꼈다.   


“저처럼 응급 상황을 다루는 사람들만 출근하고 있죠.”


응급 상황. 빙웬은 지금 자신이 처한 상황에 대해 생각해 보았다. 심각한 것인지 아닌지 도무지 갈피가 잡히지 않았다. 글래드웰 박사에게 자신이 한 말 중에 응급에 가까운 말은 가끔 죽고 싶은 생각을 한다는 것뿐이었다. 그게 그렇게 위험한 말이었을까. 문득 빙웬은 어린 시절 교회 주일학교에서 리춘 선생님이 자신의 손을 꼭 잡으며 해주신 말씀이 생각났다.


“죽음의 문제를 생각하지 않는 사람은 비겁한 사람이란다.”


복도의 끝에서 코너를 돌자 유리창 너머로 자이언츠 구장이 보였다. 경기가 없는 날의 야구장이 분화구처럼 보였다. 수백 년 전 거대한 폭발이 있었던 곳. 붉은 용암이 흘러나오던 곳. 지금은 차갑게 식어버린 곳. 후안은 분화구가 보이는 상담실의 유리문 손잡이를 당겼다.


후안은 밤색 쿠션이 놓인 바퀴가 달린 사무용 의자를 가리키며 빙웬에게 편히 앉으라고 했다. 그리고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갈색 가죽으로 된 서류가방을 바닥에 내려놓고 모니터 앞에 앉았다. 그는 자신이 필요한 정보를 입력하는 동안 잠시 기다려 달라고 빙웬에게 양해를 구했다. 상담실은 빙웬이 밖에서 보았을 때 느꼈던 것보다 비좁았다. 유리창과 유리문으로 둘러싸여 넓어 보였지만 막상 후안과 자신이 들어와 보니 둘만으로도 꽉 차는 느낌이었다. 기다리는 동안 빙웬은 방을 둘러보았다. 합판으로 된 책장은 거의 비어 있었다. 맨 위 칸에 꽂혀있는 미국 정신의학 협회에서 발간한 저널 몇 권과 <진료의 정치학: 동성애와 미국 정신의학>이라는 제목의 단행본 한 권이 전부였다. 빙웬이 앉은 의자 옆에는 모서리 한쪽의 민트색 도장이 벗겨진 철제 티테이블이 있었다.  그 위에는 아기 주먹 만한 선인장 화분이 하나 놓여 있었고 선인장 바로 옆에는 표면에 모조 다이아몬드가 박힌 해골이 활짝 웃고 있었다. 산타 무에르테. 거룩한 죽음의 어머니가 웃고 있다. 타닥타닥 키보드를 치는 후안의 동글동글한 손. 그 손과 빙웬 사이에 있는 책상 위에는 연두색 목걸이가 달린 신분증이 올려져 있었다. 신분증에 있는 사진 속 후안은 콧수염이 없었고 눈썹까지 내려온 앞머리를 하고 침울한 얼굴로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사진 밑에는 후안 에르난데스, LMFT라고 쓰여 있었다. 그 글자가 아니었더라면 빙웬은 그것이 다른 환자가 놓고 간 신분증이라고 여겼을 것이다. 그런데 LMFT는 무엇일까. 내색은 하지 않았지만 빙웬은 적잖이 당황했다. 그 자리에 MD가 쓰여 있어야 하는 게 아닐까. 그렇다면 이 사람은 의사가 아닌 걸까. 그는 아직 모르는 게 너무 많았다.


빙웬은 타이핑을 하고 있는 후안의 얼굴을 올려다 보고 다시 신분증 사진 속 콧수염이 없는 후안을 내려다보았다. 빙웬은 어쩌면 후안이 자신이 처음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젊은 사람일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빙웬 자신과 비슷한 나이일 수도 있겠다고. 어쩌면 더 어릴 수도.   


타이핑을 마친 후안은 빙글 의자를 움직여 빙웬 쪽으로 돌아 앉았다. 그는 글래드웰 박사에게 전해 받은 빙웬의 상황에 대해 정말 안타깝게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의 목소리는 원래 여린 하이 톤이었지만 그는 이제 그의 목소리를 반 옥타브 정도 낮춰서 말해 보려고 애쓰는 듯했다. 후안은 빙웬을 효과적으로 돕기 위한 질문을 몇 가지 하겠다고 했다. 그가 빙웬에게 물어본 것은 잠은 충분히 자는지, 식욕은 있는지, 걸음걸이가 느리지 않은지 따위의 자질구레한 것들로 빙웬이 글래드웰 박사에게 써낸 우울증 설문지의 내용과 별반 다를 바가 없었다. 스무 개 정도의 질문에 빙웬이 답을 하는 동안 후안은 계속 저런, 그랬군요, 이해합니다라는 말을 반복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어떨 때는 빙웬이 대답하기도 전에 고개를 끄덕이거나 말이 끝나기도 전에 그랬군요 라며 공감을 표현하기도 했다.  후안은 마지막 질문으로 빙웬에게 최근 자살에 대해 생각해 본 적이 있는지에 대해 물었다. 빙웬은 대답을 하는 대신 눈을 감고 입은 닫은 채 가벼운 미소를 지었다. 후안은 다시 한번 고개를 끄덕이더니 자신의 모니터에 몇 개의 단어를 더 쳐 넣었다.


모니터에서 다시 빙웬 쪽으로 몸을 돌렸을 때 후안의 표정은 한층 더 심각해져 있었다. 그의 미간은 가까워지는가 싶더니 그의 큰 눈동자가 양 옆으로 미세하게 흔들렸다. 곧이어 그가 입술을 앙다무는 바람에 그의 송충이 같은 콧수염이 파르르 떨렸다. 그의 얼굴에서 느껴지는 그 모든 긴장감에도 불구하고 빙웬은 왠지 후안이 아주 편안해 보인다고 생각했다. 빙웬은 지금 그의 앞에 있는 후안의 얼굴이 이제 책상 위에 놓인 신분증 사진의 얼굴과 비슷해졌다고 느꼈다. 카메라 렌즈를 들이 대면 나오는 얼굴. 그런데 그게 후안에겐 가장 자연스러운 얼굴 같았다.


빙웬은 잠시 할 말을 찾고 있었다. 아직 나의 진짜 이야기를 꺼내지도 못했다. 사실 내가 죽음을 자주 생각하는 이유는 주일학교 리춘 선생님의 말씀 때문만은 아니다. 내 안에 무언가가 죽어버린 것 같다. 그 실험실에서. 오랜 시간을 두고 피어나는 푸른 곰팡이처럼 불안이 나의 이상을 서서히 잠식해 나갔다. 나는 이제 어떤 선택도 할 수가 없다. 빙웬은 마음속으로 몇 개의 문장을 골라보려고 애썼지만 모두 터무니없는 얘기처럼 느껴졌다.


딸깍 하는 소리와 함께 후안의 모니터에 새하얀 창이 나타났다. 은은한 분홍빛이 도는 요가복을 입고 곱슬곱슬한 금발 머리카락을 가진 여성이 손을 모으고 눈을 감은 채로 앉아 있었다. 그 사진 아래에는 동그란 하늘색 플레이 버튼이 있었다. 후안이 마우스를 움직여 다시 딸깍 하고 그 버튼을 눌렀다. 그러자 차임벨 소리가 나는가 싶더니 곧 새소리와 물소리를 배경으로 사진 속 여성의 목소리인 듯한 내레이션이 흘러나왔다. 그 목소리는 이어지는 오 분 동안 신비한 주문을 외워 대는 것 같았다. 빙웬은 눈을 감았다. 주문은 숨소리를 제외한 모든 것을 사라지게 했다. 후안도 사라지고 빙웬 자신도 사라졌다. 코로 들어가는 들숨. 입으로 나오는 날숨. 천천히. 더 천천히.


“하루에 두 번씩 그대로 따라 해 보세요. 시간과 장소를 정해 놓으면 더 도움이 될 겁니다.”


후안은 오분 간의 주문이 끝나자 마치 우주의 거대한 비밀을 빙웬에게만 알려준다는 듯 그에게 속삭이며 말했다. 암흑 속에서 빙웬은 아크릴 상자 안에서 평온하게 죽어 가던 생쥐들이 떠올랐다. 후안의 말에 눈을 뜨자 그가 자신을 보며 연신 고개를 끄덕이고 있어서 빙웬은 키득 하고 웃음을 터뜨릴 뻔했다.


후안이 아직 신비한 여운이 채 가시지 않은 인터넷 창을 닫자 그의 모니터에는 체크 리스트로 채워진 문서가 나타났다. 문서의 가장 위에는 빙웬의 이름과 그의 카이저 보험 회원 번호가 나란히 쓰여 있었다. 후안 에르난데스가 체크 리스트 중 명상이라는 단어 왼쪽에 있는 하얀 네모 칸을 클릭하자 금세 네모 칸이 까맣게 채워졌다.


3시 23분. 빙웬은 멍하니 모니터를 바라보고 있다가 데스크톱 한쪽 구석에 있는 시계가 있는 것을 알아차렸다. 7분의 시간. 빙웬은 놀라지 않았다. 그는 일이 이렇게 흘러갈 것을 알고 있기라도 했던 것처럼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마터면 바보 같은 말들을 꺼내 놓을 뻔했어. 죽음이니 실험실이니 이상이니 하는 것들.


“빙웬 씨는 상담을 통해 얻고자 하는 게 있나요? 다음 상담 시간을 준비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서요.”


책상 다리 옆으로 삐져나온 코르덴으로 감싼 후안의 도톰한 무릎이 위아래로 미세하게 흔들렸다. 빙웬은 입을 떼기를 망설였다. 후안의 큰 눈망울을 보고 있기가 어색해서 시선을 돌렸다. 후안이 등지고 앉은 유리창 너머로 다시 자이언츠 구장이 눈에 들어왔다. 그 식어버린 분화구 위를 한 무리의 갈매기 떼가 맴돌고 있었다. 빙웬은 작년 여름 실험실 동료들과 자이언츠 게임을 보러 갔을 때가 떠올랐다.  “얘네들도 때를 아는 거지. 언제가 골든 타임인지를.” 게임이 끝나자 빈 관중석을 향해 날아드는 수십 마리의 갈매기를 보며 칭링은 그렇게 말했었다. 한겨울 눈이 소나무 숲 위를 덮는 것처럼 하얀 갈매기 떼들이 초록색 관중석 이곳저곳에 내려앉았다. 영리한 눈꽃송이 부대들은 청소부들이 자신의 먹이를 빼앗아 가기 전에 그들의 미션을 수행하느라 여념이 없었다. 파슬리와 올리브유로 범벅이 된 갈릭 프라이.  클램 차우더가 묻은 사워도 조각. 칠리 라임 소금이 가미된 카르네 아사다. 이것들이 녀석들에겐 최고의 전리품이었다. 골든 타임. 빙웬이 잠시 추억에 잠겨 있는 동안 빈 경기장을 돌던 갈매기들은 체념한 듯 샌프란시스코 베이 위의 작은 점들이 되어 사라져 갔다.


빙웬은 그의 가느다란 검지 손가락으로 책상에 묻은 먼지를 떼어내며 후안에게 말했다. “사실 이번 상담이 처음이자 마지막이 될 것 같은데요.” 빙웬은 후안이 끼어들기 전에 계속 말을 이어 나갔다. 자신이 다니던 연구소를 내일 그만두게 된다고. 그래서 이병원에 올 수 있는 보험도 내일이면 사라지게 된다고. 일이 이렇게 갑자기 마무리 되게 되었지만 어쨌든 고마웠다고.


후안은 이번에도 고개를 끄덕였다. 후안의 표정이 잠시 일그러질 것이라고 예상했던 빙웬은 후안이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시종일관 지었던 표정과 같은 동정 어린 얼굴을 하고 있어서 흠칫 놀랐다. 혹시 방금 한 자신의 말을 잘못 알아들은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지만 후안은 이미 모니터로 돌아 앉아서 다음 단계를 진행하고 있었다. 몇 초 지나지 않아 프린터에서 위잉하는 롤러 돌아가는 소리가 났다. 출력된 종이에는 지도와 그 아래 십 여개의 주소가 적혀 있었다.


“저런, 그랬군요. 괜찮습니다. 이걸 가져가세요. 빙웬 씨에게 도움이 될 겁니다.”


빙웬은 후안이 건넨 따끈한 종이를 받았다. 지도에는 샌프란시스코 랜드마크들이 표시되어 있었고 군데군데 작은 점들이 번호가 매겨진 채로 찍혀 있었다. 사려 깊고 효과적인 치료를 저렴한 가격으로 제공합니다. 빙웬은 멍하니 이탤릭체로 기울어진 그 문장을 바라보았다. 순간 종이를 찢어버리고 싶은 충동에 휩싸였지만 빙웬은 그럴 용기가 없었다. 대신 그 아래 적힌 주소들의 상호명을 하나하나 다 읽어볼 참이었다. 1번 성 프란시스 카운슬링, 2번 골든 게이트 커뮤니티 센터, 3번 시티 미션 심리 치료 클리닉 ……  진부한 이름들. 빙웬은 이름들을 작은 소리로 읽어 나갔다. 달의 궁전. 목록의 마지막에서 그 이름을 발견했다. 17번. 달의 궁전 테라피. 한번 더 소리 내어 그 이름을 읽은 후 빙웬은 짧게 소리 내어 웃었다. 그는 지도에서 17번을 찾아보았다. 골든 게이트 파크 아래 선셋 디스트릭트를 지나 슬롯 대로를 따라 내려오던 그의 시선이 샌프란시스코 동물원에서 멈췄다. 17번. 동물원에서 멀지 않은 곳에 점이 찍혀 있었다. 작고 까만 예쁜 점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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