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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민 Oct 17. 2020

Ghost Writer


내가 쓴 소설이 구멍 난 고무보트처럼 침몰하기 시작한 것은 앳킨슨 부인의 집에 투숙할 때의 일이었다. 처음부터 앳킨슨 부인을 의심했던 것은 아니었다. 런던에서 그 사건이 있기 전, 쓰고 있던 소설이 중반부쯤에 이르렀을 때 독자들을 약속의 신대륙으로 실어 나를 만한 동력이 내 글에는 없는 것을 깨달았고, 그런 생각에 이르자 나는 어떻게든 그 이야기를 돛단배로라도 만들어서 바다에 띄워 봐야겠다고 작정했다. 그땐 이미 그린우드 출판사의 편집장 리치가 하루가 멀다 하고 전화기 너머로 우리의 계약서 조항을 읊어 대던 때였다. 그는 연말 휴가를 다녀올 때까지 자신의 책상 위에 내 소설의 초고가 올려져 있지 않으면 그 계약서는 있으나마나 한 부도 수표, 이혼한 커플의 결혼 증서와 다름없는 서류가 될 것이라고 엄포를 놓았다. 나에겐 다른 선택지가 없었다. 이미 내 탄띠에 들어있던 총알을 거의 다 허공으로 쏘아버린 뒤였고 남은 한두 발이 또다시 과녁을 빗나가게 내버려 두기에는 서른을 넘긴 나이가 결코 적지 않게 느껴졌다.  


2019년의 마지막 달이 시작되자마자 나는 전투지로 향하기 위해 더플백에 한 달 정도를 버틸 수 있는 필수품들을 챙겨 넣고, 토니 아저씨에게 새해에도 베이글을 굽고 크림치즈를 바를 사람이 필요하면 연락을 달라는 때 이른 크리스마스 카드를 남기고 전장으로 떠날 수밖에 없었다. 단순 노동이긴 했어도 하루에 열두 시간씩 토니 아저씨의 베이글 가게에서 일하고 집에 돌아와 불 꺼진 주방에서 매일같이 글을 쓰는 일은 아직 나 같은 훈련되지 않은 풋내기 작가가 감당하기에는 턱없이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물론 아난과 루디, 그 머저리 같은 룸메이트들만 아니었더라면 가능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 놈들이 밤에 하는 일이라고는 바닥까지 내려앉은 거실 소파에 누워 모니터 안에서 서로에게 총을 쏘고 수류탄을 던지는 부대원들을 조종하는 일밖에 없어서, 그들의 게임에서 터져 나오는 폭발음에 맞서 글을 쓰고 있노라면 내가 포탄이 빗발치는 전쟁터에 맨 손으로 뛰쳐나간 소년이 된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보다 더 괴로운 사실은 아난과 루디 곁에서 그들을 지켜보면 볼수록 나도 아난과 루디와 하등 다를 바 없는 쓸모없는 인간이라는 사실, 그들 만큼이나 머리에 든 것이 없으며 세상을 향해 뭔가를 말할 자격은 더더욱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다는 것이었다. 그들과 나 사이에 유일한 차이점이 있다면 나는 세상에 별 도움이 안 되는 인간이라는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아직도 더 유리한 조건에서 싸울 수 있는 곳이 있다고 믿으며 존재하지도 않는 전장을 찾아 헤매고 있다는 점일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한 달 내내 눈과 비가 쏟아지는 12월의 런던보다는 더 호의적인 도시를 택할 수도 있었다는 생각이 들긴 하지만, 그때에는 글쓰기를 방해하는 온갖 잡음에서 벗어나고 싶은 간절함 밖에 없었고 도피성을 감싸고 있는 하늘에서 축축한 것들이 좀 떨어진다고 해서 크게 문제 될 것은 없을 것 같았다. 오히려 그때 나는 샌프란시스코의 따분하기만 한 겨울에 싫증이 난 상태였다. 심지어 눈이나 비가 자아내는 약간의 멜랑콜리가 소설을 완성하는 데에 한몫을 해줄 수 있지 않을까 은근히 기대하기까지 했다.  


앳킨슨 부인의 집을 한 달 동안 머물 베이스캠프로 정한 것은 순전히 싼 가격 때문이었다. 런던의 다른 집들이 기본 체류비와는 별도로 청소를 포함한 관리비를 추가로 받는 것과는 달리, 앳킨슨 부인의 게스트룸은 따로 관리비를 청구하지 않는 그녀의 전략 덕분에 숙박 시장에서 여행자들에게 한층 더 매력적인 선택지가 될 수 있었다. 앳킨슨 부인에게 연락하여 청소 비용을 받지 않는 것이 내가 매일 청소기를 돌리고 침대 시트를 갈고 수건을 빨아야 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인지 물었을 때에도 그녀는 그것은 외부 업체를 고용하지 않고 자신이 직접 방을 청소하기 때문이라고 친절하게 대답해 주었다.  


런던 히스로 공항에 유나이티드 항공의 여객기가 착륙할 무렵 내 옆자리에 앉은 뚱뚱한 중년의 백인 남성과 어깨를 부딪힐 정도로 기체가 잠시 흔들리긴 했지만, 이내 여객기는 런던을 흠뻑 적셔 놓은 겨울비 덕택으로 부드럽게 활주로에 미끄러지듯이 착륙했다. 어떤 승객들은 박수를 치기도 했고 그중 몇몇은 손을 입술에 대고 휘익하는 흥을 돋우는 소리를 내어 품격의 도시로의 입성을 자축하기도 했다.  


처음에는 모든 것이 순조로워 보였다. 내가 머물게 될 방은 작았지만 내 키보다 큰 빅토리안 양식의 창문이 있었고 그 옆에는 노트북과 종이 원고들을 올려놓기에 충분한 나무 책상이 하나 있었다. 방 안 대부분의 공간을 차지하는 침대는 그 위에 걸터앉거나 자세를 바꿀 때마다 삐걱거리는 소리를 내긴 했지만 나 혼자 여행 온 것을 잠시 후회하게 만들 정도로 넓고 편안했다. 발치에는 고풍스러운 벽난로가 있었고 그 옆에는 테두리를 따라 포도 넝쿨이 양각으로 새겨진 아르누보 스타일의 전신 거울이 있어서, 그 게스트룸이 단순히 돈벌이를 위해 되는대로 구색만 맞추어 놓은 버려진 방이 아니라, 여차하면 오랜 친구나 귀여운 조카들에게 내줄 수도 있는 낸시 앳킨슨 부인 집의 어엿한 일부라는 사실을 알려주고 있었다.  


직접 만나 본 앳킨슨 부인은 생각했던 것보다 나이가 더 많은 것처럼 보였다. 원래는 몸을 누이고 글을 쓸 수 있는 조용한 공간만 있으면 다른 것은 아무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었다. 집주인이 백발인가 아닌가 얼굴에 주름이 얼마나 잡혀 있나 하는 문제는 애초에 관심사 밖이었다. 하지만 어쨌든 같은 지붕 밑에서 생활하는 처지가 되다 보니 그녀를 피해 다닐 수는 없었고 그녀의 외모나 행동거지가 눈에 들어오지 않을 수 없었다. 이를테면, 주방에 물을 한 잔 마시러 나갔다가 코 끝에 돋보기안경을 걸친 앳킨슨 부인이 미간을 한껏 찌푸리며 약병에 쓰인 글씨를 읽는 데 애를 먹고 있는 광경을 보게 된다거나, 새벽에 소변을 보러 가는 길에 그녀가 목욕 가운을 입은 채로 욕실에서 나오는 바람에 그녀의 옷깃 사이에서 탄력을 잃고 턱 밑으로 적나라하게 축 늘어진 피부를 보게 된다거나 하는 식이었다. 오랜 호스팅 경험 덕분이지 그녀는 그런 사적인 영역을 내게 보이는 것에 별 거리낌이 없어 보였다. 이 모든 관찰의 결과로 미루어 나는 그녀의 나이가 적어도 육십 대 초반, 경우에 따라서는 예순대여섯 살일 수도 있겠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그녀는 여전히 군더더기 없는 날씬한 몸을 유지하고 있어서 우아하고 기품 있는 구석이 없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그 나이대에 있는 대부분의 여성들이 그렇듯이 앳킨슨 부인도 수다스러웠고 모든 행동에 거침이 없었다. 그녀는 나 같은 낯선 사람을 대하는 일에도 전혀 두려움을 느끼지 않는 듯했고 가끔씩 에티켓이라는 우리 모두가 알고 있는 암묵적으로 그어 놓은 보이지 않는 선을 넘는 무례도 서슴지 않았다.  


앳킨슨 부인의 집에 도착한 날, 그녀는 내가 묻기도 전에 아침 식사가 매일 여덟 시에 준비될 것이며, 대단한 건 아니지만 그래도 잉글리시 브렉퍼스트라는 말이 괜히 있겠느냐며 내가 아침 금식에 대한 신념이 있는 사람이 아니라면 영국식 아침 식사를 경험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그녀의 집을 찾아간 것은 어디까지나 글을 쓰기 위해서였으므로 글쓰기에 도움이 되는 일이라면 아무리 사소한 시도라도 해 볼 작정이었다. 매일 같은 시간에 아침을 먹음으로써 일정한 리듬을 만들어 나가는 것도 그러한 측면에서 괜찮은 선택 같아 보였다. 그녀에게 아침 메뉴가 무엇인지를 묻는 대신, 그 식사가 나 혼자만을 위한 식사라는 점, 다시 말해 그녀와 한 식탁에 마주 앉아 먹는 일은 일어나지 않을 것이라는 점을 거듭 확인하고 나는 그녀의 호의를 받아들이기로 했다.

그러나 다음날부터 내 결정이 얼마나 사려 깊지 못한 것이었는지, 미처 좌우를 살피지 않고 길을 건너는 것과 같은 얼마나 어리석기 짝이 없는 선택이었는지를 깨닫고 후회하기 시작했다. 그녀의 말대로 앳킨슨 부인은 나와 한 식탁에서 식사를 하지는 않았지만, 내가 아침을 먹는 동안 주방을 서성거리며 커피를 내린다든지 냉장고에 기대어 텔레그래프 신문을 읽는 척한다든지 괜히 있지도 않은 싱크대의 물기를 행주로 닦는다든지 하면서 말을 걸어오는 바람에 그녀의 말동무가 되는 일을 도무지 피할 수가 없었다. 그녀는 한번 입을 열면 비스킷이나 쿠키와 같은 영국과 미국에서 서로 다르게 사용되는 영어 단어들에서부터 보리스 존슨 총리가 일부러 금발 머리를 헝클어뜨리고 다니는 이유, 전 남편 프랜시스 앳킨슨 씨와의 이혼 서류에 서명하면서 자신이 그에게 퍼부었던 마지막 욕지거리에 이르기까지 종잡을 수 없이 생각나는 대로 떠들어 댔다. 그것은 그녀가 차려 놓은 매일 똑같은 영국식 아침 식사—벽돌 같은 토스트, 눅눅한 그래놀라, 누린내가 가시지 않은 베이컨—를 대하는 것 이상으로 괴로운 일이어서 나는 그녀의 말에 장단을 맞추는 시늉만 하다가 식사가 끝나는 대로 얼른 자리에서 일어나곤 했다.  


 “그러니까 찰리, 당신이 말한 그 ‘베이커리’에서 하는 일이라는 게 팔팔 끓는 물에서 구멍 뚫린 밀가루 덩어리를 건져 내는 그런 일이란 말이죠?”


앳킨슨 부인의 집에 도착하고 이틀째 인가 사흘째 되는 날 아침, 그녀는 이렇게 말하고 손바닥으로 식탁을 탁 치면서 방금 내가 한 얘기가 세상에서 제일 웃기는 얘기라도 되는 것처럼 큰 소리로 웃었다. 그녀가 내가 무얼 해서 먹고 사는 사람인지 꼬치꼬치 물어오는 통에 적당히 둘러 댈 생각으로 처음에는 레스토랑, 다음엔 베이커리에서 일한다고 말했었다. 그러자 그녀는 반색하며 그거 정말 대단한 걸요, 그럼 지금 내 앞에 앉아 있는 파티셰께서는 어떤 빵을 전문으로 만드시나요 하고 눈을 크게 치켜뜨면서 물었다. 마른 체구를 가진 나 같은 동양인 남성이 베이커리에서 일한다는 사실에서 발견한 의외성이 갑자기 그녀의 호기심을 자극한 건지, 아니면 그녀도 한때 제빵에 열정을 품었던 터라 반가운 맘이 든 건지 도무지 알 수가 없었다. 어쩌면 그녀가 단순히 먹는 것을 좋아해서 그러는지도 몰랐다. 어쨌든 나의 직업과 관련한 주제에 대해 더 이상 그녀와 이러쿵저러쿵 떠들어대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 더군다나 토니 아저씨의 베이글 가게에서 일하는 것은 그야말로 먹고 살기 위한 어쩔 수 없는 수단, 작가라는 종착지에 다다를 때까지의 여비를 비축하기 위한 임시방편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니었다. 그건 현실을 받아들이는 방법, 땅에서 발을 떼고 떠오르기 전까지는 하늘이 아닌 땅 위의 법칙을 따라야 한다는 점을 인정하는 삶의 태도와 관련이 있는 것이지, 새로 알게 된 사람에게 나를 소개할 때 제일 먼저 내뱉을 만한 소재와 관련된 것은 아니었다.  


어떻게든 화제를 돌려볼 요량으로 손에 닿는 대로 식탁 위에 있는 물건을 집어 들었는데 공교롭게도 내 손에 들려진 것은 오렌지 마말레이드를 반쯤 바르다 만 식빵이었다. 순간 앳킨슨 부인은 영국산 오렌지 마말레이드가 얼마나 훌륭한가에 대해 설교를 늘어놓는가 싶더니 다시 고삐를 돌려 빵 얘기로 돌아왔다. 그녀는 이제 나를 캘리포니아에 온 파티셰 선생 찰리라고 부르며 내가 보유한 비법이 무엇인지를 알려달라고 사정하기까지 했다. 상황이 그쯤 되자 빠져나갈 쥐구멍을 찾는 일을 포기했다. 앳킨슨 부인에게 내가 만드는 빵은 베이글이며 건포도를 박아 넣거나 퍼피 시드를 묻히기도 하지만 본질적으로 모든 베이글의 풍미는 구멍이 뚫린 밀가루 반죽을 끓는 물에서 언제 건져내야 하는지를 정확히 아는 것에 좌우된다고 말했다. 나는 최대한 당당하게 권위가 느껴지는 목소리로 마치 밀푀유나 마카롱과 같은 정교한 페이스트리를 만드는 비법을 전수하듯 말하려고 애썼지만, 곧 밀려오는 자기 연민으로 그 기세가 꺾이지 않을 수 없었다. 베이글이라는 말을 듣자 앳킨슨 부인은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있다가 곧이어 내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식탁을 치면서 깔깔대고 웃었다. 그 바람에 앞에 놓인 우유를 담은 유리잔과 토스트가 올려진 접시가 쨍 소리를 내며 부딪혔다. 한바탕 천둥 같은 우렁찬 웃음소리가 지나가자 앳킨슨 부인의 얼굴에는 실망의 그림자가 드리워졌고, 나는 그것이 베이글이 연상시키는 평범하고 특색 없는 이미지와 무관하지 않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날 아침 우리 대화는 그걸로 끝이었다. 유리잔에 남은 우유를 한 모금 들이키고 바로 자리에서 일어나 방으로 돌아왔다.  


그날부터 아침에 눈을 떠서 한 일은 가급적 짧은 시간에 아침 식사를 마치고 방으로 돌아와 책상에 앉아 쓰던 이야기를 절정으로 밀어붙이는 것이었다. 그때까지 나는 에밀리 첸과 제이 킴 두 젊은이를 샌프란시스코 외곽의 버려진 집에 몰아넣는 데 성공했었다. 그 폐가는 한때 사람이 살았지만 지금은 비어있는 건물로, 이제 두 주인공이 그 집에서 어떤 일을 벌이는지 지켜볼 작정이었다. 소설 속 무대 장치를 위해 창문에 커튼을 치고 천장에 구멍을 뚫어 달빛이 새어 들어오게 했고 매트리스, 재떨이, 육포 부스러기, 도색 잡지들을 바닥에 흩어 놓았으며, 테이블 위에는 도난당한 것으로 보이는 한 무더기의 여권들을 올려놓았다. 나는 갖가지 버려진 물건들을 주인공 제이 주변에 둠으로써 그가 일종의 평안을 느끼길 바랐고, 그가 경험한 마음의 평화가 그날 처음 만났던 에밀리에게 자신의 깊고 어두운 곳을 열어 보여줄 수 있는 용기로 이어지길 기대했다. 나는 이야기가 다음 단계로 나아가기 위해 내가 해야 할 일을 알았고, 그것은 제이가 자신의 밑바닥에 자리 잡은 지하실로 내려갈 수 있도록 내 보잘것없는 단어들로 계속 계단을 만들어 주는 일이었다.  


그렇게 앳킨슨 부인 집에서 보낸 처음 며칠을 이야기 속 버려진 집의 구석구석을 자질구레한 물건들로 채우면서 보냈다. 나의 유일한 관심사는 연말까지 제이와 에밀리에게 일어난 사건들을 끝맺음 짓는 것이었고, 앳킨슨 부인에게서 나 자신을 보호할 수만 있다면 소설이 정해진 기한까지 어떤 곱씹을 만한 울림을 남기며 마무리되는 것까지도 기대해 볼 수 있겠다고 여겨졌다. 런던에 있는 동안 그것 외에는 별다른 계획이 없었다. 특별히 가야 할 곳도 없었고 예전에 알고 지내던 친구가 있던 것도 아니었다. 대부분의 시간을 앳킨슨 부인의 그 방에서 글을 쓰거나 가지고 갔던 책 몇 권을 읽으면서 보냈다.  


유일하게 앳킨슨 부인의 집 밖으로 외출하는 시간은 오후 세 시 무렵이었는데, 주변에 아는 곳이 없었으므로 발길 닿는 대로 한 시간 정도를 무작정 걷곤 했다. 첫날은 집에서 나와서 오른쪽으로 걷고 다음날은 왼쪽으로 그다음 날은 도로 맞은편으로 건너가 보고 하는 식이었다. 걷는 행위에 정해진 방향이나 목적 따위는 존재하지 않았고 거기에 유일한 법칙과 같은 것이 하나 있다면 이전 날과 같은 길을 가지 않는 것뿐이었다. 그런 방식으로 예기치 못한 새로움이 끊임없이 내 머리를 관통할 수 있게 내버려 두었고, 그 덕택에 소설에서 막다른 골목을 발견할 때마다 나는 뒤로 돌아 나오지 않고도 통과할 수 있는 통로를 발견할 수 있었다.  


배터시 파크 도서관이 앳킨슨 부인의 집에서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 있다는 것을 알게 된 것도 오후의 산책을 통해서였다. 그날 나는 코렐리 선장의 이탈리안 레스토랑에서 저녁에 먹을 돼지고기 라구 뇨키를 사서 나오다가 맞은편에 있는 2층짜리 벽돌 건물이 공공 도서관임을 알아차렸다. 그다음 날부터 나는 찰리의 산책 법칙에 예외 조항을 하나 만들어서 매일 새로운 길을 걷되 앳킨슨 부인의 집에 돌아오기 전에는 배터시 파크 도서관에 들를 수 있도록 했다. 그렇게 무리를 하면서까지 도서관에 간 이유는 미국에서는 구할 수 없었던 영국 문학의 희귀본을 찾는다거나 배터시 파크 주변에 거주하는 영국인들의 애독서를 파악한다거나 하는 일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곳에서 매일같이 했던 일은 당일에 추가로 작성한 소설의 원고를 출력하는 일, 앳킨슨 부인의 작은 방에서 내가 만들어 내고 있는 진보를 날마다 손으로 만져보고 확인하는 의식이었다. 책상 위에 쌓여가는 출력물을 보면서 나는 글이 노트북 속에만 존재할 때와는 다른 성취의 감각을 느낄 수 있었다. 덕분에 축조가 불가능해 보였던 성벽이 실제로 눈 앞에서 올라가고 있는 것을 보았고, 이 경험은 성곽의 완성이 막연하게 먼 미래에 일어날 일이 아니라 가까운 시일 내에 이루어질 구체적인 사건임을 상기시켜 주었다. 앳킨슨 부인에게 부탁을 하여 거실에 있는 프린터를 빌려 씀으로써 얼마간의 시간을 아낄 수도 있었지만 나는 그러지 않고 돌아가는 길을 선택했다. 그 이유는 앞서 이미 몇 번 언급했으니 여러분도 어렵지 않게 이해할 수 있을 거라 믿으며 이제 보다 중요한 얘기를 해볼까 한다.  


불행한 사실은 내가 이루어 내었던 성취에서 만족감을 느낄 수 있었던 날들이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는 점이다. 12월이 중순으로 접어들자 절정으로 치닫던 소설은 예기치 못한 난관에 봉착했다. 난관은 이전에는 경험했던 장애물들과는 전혀 다른 종류의 것으로 자세히 보려 하지 않는다면 인지하지 못하고 지나쳐 버릴 수도 있을 정도의 미묘한 요철이었다. 어디가 잘못되었다고 콕 집어 얘기할 수는 없었지만 눈에 보이지 않는 곰팡이처럼 그 오류는 내 원고 속에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어서 원고를 읽으면 읽을수록 무언가가 어그러지고 있다는 음습한 느낌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예를 들면 이런 식이었다. 나는 몇 번의 벽을 뚫는 경험을 통해 이야기를 진전시켰고 마침내 그날 밤 버려진 집에서 제이가 자신의 과거에 일어났던 끔찍한 경험들 하나하나를 에밀리에게 털어놓게 만드는 데 성공했다. 제이가 그런 대화를 꺼내기까지 집 안 곳곳에 흩어 놓은 사연을 담은 잡동사니들이 한몫을 했음은 물론이고 에밀리의 캐릭터도 큰 역할을 했다. 그녀의 대담하지만 사려 깊은 태도, 닫힌 공간에서 젊은 남녀가 갖기 마련인 이성에 대한 끌림을 적절히 절제하면서도 표출하여 긴장감을 유지하는 능력과 같은 것들이 복합적으로 어우러져 상황을 끌고 나갔다. 소설이 절정에 이르면서 두 주인공은 우연과 필연이 팔과 다리를 교차하며 추는 댄스에 점점 그들의 몸을 맡겼고 마침내 제이와 에밀리가 신자와 사제의 역할을 맡아 달빛이 스미는 그들만의 고해소에서 과거의 상처들을 털어놓기 시작했을 때, 그들은 그 어떤 커플보다 아름다운 블루스를 출 수 있었다. 아니, 나는 적어도 일이 그렇게 되어가고 있다고 믿었었다.  


하지만 하루아침에 모든 것이 달라졌다. 12월 13일인가 14일 오후에 산책을 마치고 돌아와 출력한 원고를 읽었을 때 나는 그 글이 맥 빠진 이야기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차렸다. 전날까지 에밀리 첸과 제이 킴 사이를 연결하던 로맨틱한 공기는 온데간데없었고 그들의 대화는 다 끝나버린 이야기를 억지로 전개하기 위해 꽥꽥 거리는 성가신 아우성처럼 느껴졌다.  


처음에는 대수롭지 않게 생각했다. 그러한 변화는 단지 대낮에 나를 지배하는 것은 감정이 아닌 이성이라는 당연한 사실을 가리키는 것에 불과한다고 여겼다. 감정이 지배하는 밤에 원고를 읽는다면 원래 글 속에 심어 놓으려 했던 복잡 미묘한 감정의 드라마가 다시 형체를 드러낼 것이라고 믿었다. 그러나 해가 진 후의 멜랑콜리에 기대어 원고를 읽어보아도 달라지는 것은 없었다. 내 글이 불러일으키는 감정이 있다면 그것은 실망뿐이었다. 그 후로 며칠은 허물어지는 집을 보수하는 작업으로 채워졌다. 오후 외출 시간 전까지 원고 속에서 발견한 홈을 메우고 칠이 벗겨진 곳을 빠짐없이 페인트로 칠하기 위해 안간힘을 썼다. 그럴 때마다 이야기는 원래 가지고 있던 영롱한 빛을 희미하게나마 찾아가는 듯했지만 밖에 나갔다가 돌아오면 소설은 다시 제자리, 손 봐야 할 곳을 다 헤아리기도 힘든 구제불능 집으로 변해 있었다.  


도무지 이유를 알 수 없는 일이 계속되어 이마를 책상에 찧어 대고 있을 때쯤, 나는 앳킨슨 부인이 이 모든 당혹스러운 일이 일어난 것과 무관하지 않음을 시사하는 단서를 찾아냈다. 여느 날처럼 배터시 파크 도서관에서 출력한 원고를 들고 집으로 돌아왔을 때였다. 현관문을 열고 앳킨슨 부인의 집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현관문 바로 안 쪽에 있는 내가 머물던 방에서 막 뒷걸음질 치며 나오는 앳킨슨 부인을 발견했다. 바닥에서 살짝 들어 올린 그녀의 발 뒤꿈치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몇 초 동안 그녀는 내가 들어온 것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다가 앞으로 몸을 돌려 내가 그녀 바로 앞에 서 있는 것을 보자 화들짝 놀라며 팔을 등 뒤로 뻗어 열려 있던 방 문을 잽싸게 닫았다.  


“오 찰리, 당신이었군요. 난 또 내 남편 프랜시스라도 돌아온 줄 알았지 뭐예요. 나같이 예쁜 마누라를 버리고 달아난 얼간이 같은 양반 말이에요. ”


놀란 가슴을 쓸어내리던 앳킨슨 부인은 자신이 짓궂은 장난을 당한 피해자라도 되는 것처럼 코를 찡긋거리더니 이내 쾌활한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다. 그녀는 침구를 새 것으로 갈아 놓았고 새 수건도 침대 위에 올려놓았으니 그걸 쓰면 된다는 말도 덧붙였다. 방금 일어난 일의 진의를 파악하려고 나는 멍하니 방 문 앞에 서 있었다. 그러는 동안 그녀는 거실 소파 옆에 있는 티 테이블 위에서 집 열쇠를 집어 들고 다시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뒤이어 앳킨슨 부인은 학교에서 손녀딸 소피를 픽업해서 집에, 그러니까 여기서 세 블록 떨어진 곳에 사는 그녀의 아들 집에 데려다주고 식사도 거기서 같이 하고 올 예정이니까 혹시 필요한 것이 있으면 전화하라고 말하면서 현관문을 열고 급히 나가 버렸다.   


앳킨슨 부인의 말대로 침대 위 이불은 새 것으로 바뀌어 있었고 그 위에는 수건 두 장이 올려져 있었다. 침대 옆 수납장 위에 아무렇게 올려놓았던 책들도 포개어져 정돈되어 있었고 책상 밑에 있는 휴지통도 말끔히 비워져 있었다. 그래, 앳킨슨 부인은 방이 비어 있을 때 청소를 하고 나온 것뿐이야. 호스트로서 해야 할 일을 하고 나오다가 인기척을 느끼지 못하고 놀랐던 것뿐이라고. 그렇게 생각하며 외투를 침대 위에 벗어던지고 책상에 앉는 순간, 앳킨슨 부인을 향해 가졌던 의심을 그렇게 빨리 거둬들여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책상 위에 올려져 있던 출력된 원고용지들이 누가 봐도 누군가가 의도를 가지고 정리한 것처럼 가지런히 쌓아 올려져 있었다. 물론 내가 정리한 것은 아니었다. 정확히 기억나는 것은 아니지만 틈틈이 출력된 원고를 훑어보는 내 습관으로 미루어 볼 때 외출 전에 출력물 종이들은 분명 책상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거나 적어도 어느 한 곳에 삐뚤빼뚤하게 쌓여 있었을 것이다. 그렇다. 그건 분명 앳킨슨 부인의 소행인 게 분명했다. 그녀는 책상 밑에 있는 휴지통을 비우고 몸을 일으키다가 내 책상 위에 흩어진 종이들을 보았을 것이다. 교양이 있는 성인이라면 마땅히 사적인 영역으로 간주해 지나쳐야 했음에도 그녀는 그런 사회적인 룰을 무시하고 내 원고를 손을 대고 읽기 시작했을 것이다. 처음에는 무슨 글인지 이해하지 못해 어리둥절했겠지만 금세 그것이 소설의 일부, 이제 막 탄생을 앞둔 태아와 같은 신성한 이야기인 것을 알아차리고 구미가 당겨서는 몇 장 더 읽어 볼 마음을 먹었을 것이다. 어쩌면 소설의 저자가 나라는 사실을 알아차리고는 닥치는 대로 모조리 읽어 버렸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는 내 글에 대해 제 멋대로 판단을 내리고 이 문장은 왜 여기 있는지 모르겠군, 선택한 단어들도 조잡하기 짝이 없군, 역시 동양인이 쓴 영어라 그런지 결함이 많네 하면서 본인이 평론가라도 되는 듯 마음대로 지껄였겠지. 그렇게 한참 내 글을 찢어발긴 후에 더 씹을 거리가 없다는 것을 깨닫고 종이들을 쓸어 모아 책상 한 구석에 나란히 쌓아 놓음으로써 어리석게도 자신의 악랄한 취미가 남길 만한 흔적들을 모두 지웠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앳킨슨 부인에게 내가 소설가임을, 아직 공식적으로 출간한 책은 없어도 작은 매거진에 단편을 꾸준히 기고하고 있는 작가임을 알리지 않은 것도 이런 일이 벌어질 것이 불 보는 뻔했기 때문이다. 내가 없는 동안 책상 앞에서 앳킨슨 부인이 했던 사악한 일들을 떠올리자 나는 밀려오는 불쾌감을 주체할 수가 없었다. 죄를 짓고 살금살금 뒷걸음치며 나오던 앳킨슨 부인의 뒷모습, 나를 발견하고는 자신이 저지른 범죄가 발각될까 두려워 방 문을 황급히 닫던 모습, 그리고 손녀딸 소피는 항상 등굣길에만 데려다줬음에도 불구하고 오늘은 하교까지 도와줘야 한다고 핑계를 대며 자리를 뜨던 모습. 테이프를 돌려 조금 전에 일어난 일들을 다시 재생하자 앳킨슨 부인을 향한 불쾌감은 분노로 바뀌었고 몸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불덩이 같은 것이 끓어오르는 것 같아 어디론가 분출하지 않으면 안 되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나는 주먹으로 책상을 세게 내려쳤고 그 바람에 책상 위 원고들은 공중으로 떠오르는가 싶더니 낙엽이 떨어지듯 제각기 흩어져 나선을 그리며 바닥에 떨어졌다.    


나는 한동안 분을 삭이지 못하고 마루 바닥에 흩어진 종이들을 멍하니 바라보다가 거기에 뭔가 이상한 점이 있음을 알아차렸다. 이제 종이들은 가지런히 쌓여 있지 않고 내가 평소에 책상 위에 던져 놓듯이 이곳저곳에 흩어져 있음에도 불구하고 바닥에 떨어져 있는 원고에는 외출하기 전 원고의 상태와는 다른 뭔가가 있는 것 같았다. 그 점을 바로 알아차릴 수는 없었지만 이번에도 거기에는 분명 이상한 구석이 있었다. 의자에 앉아 한참 동안 바닥에 떨어진 소설의 조각들을 째려보았다. 구름에 가려져 느껴지지 않던 늦은 오후의 나지막한 햇살이 창문을 통해 깊숙이 밀려 들어왔다. 홍차와 같은 붉은색을 머금은 빛이 이제는 다 망가져버린 이야기의 파편들을 비췄다. 붉게 물든 파편들 옆으로 회색 그림자가 생겼다. 나는 이번에도 되지도 않을 괜한 짓을 벌였다. 애초에 세상에 들려질 가능성이 없었던 이야기들이 이제야 제자리를 찾아간 것 같았다. 이야기들은 내가 손 쓰기도 전에 자기의 운명을 스스로 찾아간 것이다. 나는 나의 조각난 이야기 중 하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렇게 오 분쯤 지났을까. 마침내 실 같은 생각 하나가 머리를 스쳤고 그로 인해 또 다른 생각들이 꼬리를 물고 덤벼 들었다. 출력된 원고를 읽을 때 나는 주로 종이의 한 구석을 손에 쥐고 읽기 때문에 종이 한쪽이 살짝 구겨지기 마련이었다. 하지만 바닥에 떨어진 원고들은 이상하리만치 구겨진 자국 없이 빳빳해 보였다. 마치 갓 프린트에서 출력되기라도 한 것처럼. 미묘하게 달라진 점은 그것 하나였다. 하지만 이 원고들을 나 말고 도대체 누가 또 출력한단 말인가. 이 방을 드나드는 사람은 기껏해야 나랑 앳킨슨 부인밖에 없는데.  


생각이 거기까지 미치자 온 몸에 털이 바짝 일어서고 팔과 다리에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그 가능성은 너무 기괴하고 예상을 뒤엎는 것이라서 나는 화가 치밀어 올라 내 머리가 잠시 오작동을 일으켜 일어날 수도 없는 일에 대해 망상을 갖게 된 것이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 정도였다. 하지만 몇 분간 숨을 고르고 다시 침착하게 생각을 해봐도 그 가능성은 합리적인 추론이자 최근 일어난 모든 정황을 미루어 짐작해 보았을 때 가장 있을 법한 일이었다. 만약 앳킨슨 부인이 원래 있던 원고를 버리고 새 것을 출력해 놓았다면? 그렇다 하더라도 굳이 멀쩡한 원고를 버리고 똑같은 내용이 담긴 새 출력물을 갖다 놓을 이유가 있을까. 그녀는 그것도 자신이 해야 할 청소의 영역에 포함된다고 생각한 것일까. 그런데 만약 앳킨슨 부인이 원본과 똑같은 원고를 출력한 것이 아니라 내 원고를 읽고 손을 본 후에 다시 출력한 것이라면? 구두점의 위치를 바꾸고 단어의 미세한 뉘앙스를 마음에 드는 대로 바꾸어 놓았다면? 그 생각을 하는 순간 잘 나가던 내 소설이 왜 갑자기 삐걱거리게 되었는지, 왜 글이 달라진 것을 제대로 캐치할 수 없었는지에 대한 궁금증이 한순간에 해소되는 것 같았다. 단순히 내 책상 위를 정돈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면 왜 그렇게 당황하고 거짓말까지 꾸며 대며 집을 빠져나갈 이유가 없지 않은가. 모든 의문점에 대한 해답은 단 한 가지 사실, 앳킨슨 부인이 원고를 읽은 후 내 노트북을 열어 내가 알아차리기 어려운 부분만(하지만 글의 흐름에 분명한 영향을 미치는)을 수정하고 그 수정본을 출력해서 원래 원고를 대체해 버렸다는 사실, 그 분명한 하나의 사실 안에서 모두 찾을 수 있었다.  


그날 밤 잠을 청하려 베개에 머리를 두고 누웠지만 머릿속에는 온통 어떻게 앳킨슨 부인이 저지른 만행을 되갚아줄 수 있을까 하는 생각으로 가득 차 있어서 좀처럼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아무런 양해도 없이 열지 말아야 할 상자를 열어 보고 아직 잉태 중인 언어들을 꺼내 교묘하게 난도질을 한 인간, 자신의 교활한 행동이 초래할 고통과 신음에 대해서는 순진하리만큼 무지한 인간, 이런 인간에게 내려야 할 처벌은 무엇이어야 할까. 지금 생각하면 그때 내 상태가 잘 나가던 원고가 갑작스럽게 틀어진 것으로 인한 당혹스러움과 다가오는 데드라인에 대한 압박감으로 인해 상황을 있는 그대로 객관적으로 보지 못하는 과잉 흥분 상태에 있지 않았나 싶기도 하다. 하지만 그때의 나로서는 머릿속을 파고든 생각이 송곳처럼 두개골 안 구석구석을 찔러대는 것을 내버려 둘 수만은 없었고, 한시라도 빨리 머리에서 송곳을 빼낼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앳킨슨 부인에 대한 복수뿐이었다.


물론 나에게도 한쪽으로 치닫는 생각을 잠시 멈추고 상황을 돌이킬 만한 순간이 없었던 것은 아니다. 가령, 내가 새벽에 잠에서 깨어 물을 한 잔 마시러 주방에 갔던 때와 같은 순간 말이다. 냉장고를 열어 물병을 꺼내고 문을 다시 닫으려는 순간, 냉장고에서 새어 나온 불빛이 냉장고의 반대쪽 문을 비추는 바람에 나는 거기에 자석으로 고정되어 있는 사진 한 장을 보았다. 그 사진에는 앳킨슨 부인과 손녀딸 소피, 그리고 소피의 부모로 보이는 커플 한 쌍, 그러니까 앳킨슨 부인의 아들과 며느리가 있었다. 대학 캠퍼스로 보이는 벽돌 건물과 잔디밭을 배경으로 학위 모자를 쓴 아들이 꽃다발을 안고 서 있는 것으로 봐서는 아들의 졸업식 사진인 듯했다. 그는 다섯 살 혹은 여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소피를 안고 서 있었는데 소피를 안은 팔 소매에 줄무늬가 여러 개 있는 것으로 보아 사진은 그가 받은 박사 학위를 기념하기 위한 것인 것처럼 보였다. 소피는 아빠에게 안기기에는 작지 않은 체구를 갖고 있어서 아빠 품에 안겨 있는 자세가 불편해 보였고 얼굴을 잔뜩 찡그린 채 부루퉁한 표정을 하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진에서 가장 인상적인 사람은 다름 아닌 앳킨슨 부인이었다. 그녀는 에메랄드 색 트위드 재킷을 입고 목에는 진주 목걸이를,  머리에는 재킷과 비슷한 색깔의 챙이 큰 모자를 쓰고 있어서 평소에 내가 알던 그녀와는 완전히 딴 판으로 보였다. 그녀의 복장이 다소 과하다는 느낌이 들지 않는 것은 아니지만, 잔뜩 골이 나 있는 손녀딸을 위해 다람쥐 인형을 손에 들고 소피를 향해 사랑스러운 미소를 보내는 인자한 할머니의 모습을 한 앳킨슨 부인은 그 사진을 더없이 아름다운 추억이 담긴 사진, 바람직한 가족사진의 전형으로 만들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냉장고 문을 닫으려다 말고 나는 캄캄한 정적이 감도는 주방에 멈춰 서서 내가 얼마나 앳킨슨 부인에 대해 잘 알고 있는지에 대해 잠시 생각해 보았던 것 같다. 그녀가 이것저것 참견하기 좋아하고 예의에 어긋나는 말로 아무렇지 않게 상처를 줄 때도 있지만 심술궂은 사람이 아니다. 청소를 하다 책상에서 우연히 내 원고를 발견하고 읽었을 수도 있지만 나 몰래 이곳저곳을 고쳐 놓을 만큼 장난을 좋아하는 사람도 아니다. 더군다나 장난이란 게 본래 즉각적인 재미를 위한 것인데 이렇게 언제 알아챌지도 모르고 딱히 재미있다고도 할 수 없는 일을 매번 해야 할 이유가 어디에 있단 말인가.   


대강 이런 흐름의 생각을 하다가 그때까지도 쥐고 있던 냉장고 문을 닫고 돌아서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앳킨슨 부인을 향해 가졌던 의심이 내 머리가 잘못되거나 미쳐버려서가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또 다른 증거와 마주쳤다. 냉장고 바로 옆에는 반쯤 뚜껑이 열린 휴지통이 있었는데 그 틈 사이로 반박할 수 없는 증거물, 바로 파쇄된 종이 조각들이 보였다. 그것은 슬쩍 보기만 해도 고작 한두 장 정도 파쇄된 양이 아니었고, 그렇다고 해서 색깔이 있거나 양식이 그려져 있는 다른 문서의 파쇄물도 아니었다. 그것은 단순히 흰 바탕에 검은 잉크로 된 글자만이 가득한 수많은 용지의 파쇄물이었다. 나는 당장이라도 휴지통에서 뒤집고 그 종이 뭉치들을 꺼내 내가 쓴 글이 맞는지 짜깁기를 할까도 생각해 보았지만 더 확실하고 침착한 복수를 위해 범죄의 현장을 직접 급습하는 편이 낫겠다고 판단하고 방으로 돌아왔다.  


다음날 평소와 같이 세 시쯤이 되자 방에서 나와 외출하러 나가려는 듯이 현관문을 열었다. 앳킨슨 부인은 거실 반대쪽에 있는 그녀의 방에서 통화를 하고 있는 듯했고, 나는 헛기침을 한번 하고는 밖으로 나가 문을 쾅하고 세게 닫았다. 그리고서는 열쇠를 꺼내 홈에 넣고 일부러 몇 번 시계 방향으로 돌렸다 반대 방향으로 돌렸다를 반복하며 달그락 거리는 소리를 냈다. 이만하면 앳킨슨 부인에게 내가 외출한다는 신호를 충분히 줬다고 판단한 나는 조심스레 다시 문을 따고 들어와 살금살금 방에 돌아왔다. 이제부터 할 일은 최대한 침착하게 범인을 현장에서 검거하는 일이다. 그녀가 내가 없는 줄 알고 방에 들어와 문서를 조작할 것이고 이제 그 순간을 기다렸다가 덮치기만 하면 된다. 그 후의 일은 어떻게 될지 나도 모르겠다. 아직 이 사회에 정의라는 게 살아 있다면 죄인은 지은 죄에 상응하는 형벌을 받게 되겠지. 어쨌든 지금 내가 해야 할 일은 그녀의 눈에 띄지 않게 최대한 숨을 죽이고 잠복하는 것이다. 나는 그것들을 곧바로 행동으로 옮겼다. 잠복은 어렵지 않았다. 책상에서 2미터 정도 떨어져 있는 옷장에 들어가 몸을 숨기고 살짝 벌어진 옷장 문 틈새로 범인이 하는 일을 지켜보고 있다가 결정적인 순간에 그녀를 검거하면 되는 것이었다. 벌써부터 습격으로 일그러질 앳킨슨 부인의 표정, 수치심으로 빨갛게 물들 그녀의 얼굴이 떠올라 흐뭇한 미소가 입가를 떠나지 않았다. 나는 스스로에게 정의가 구현될 순간이 머지않았음을 상기시키며 옷장 안으로 들어갔다.  


옷장 안으로 들어와 웅크려 앉아 보니 무게 중심을 바꿀 때마다 발 밑에 있는 나무 선반이 삐걱거리기는 했어도 내부 공간이 넓어서 생각보다 편안했고 얼마 지나지 않아 장시간 움직이지 않고도 앉아 있을 수 있는 안정된 자세를 찾을 수 있었다. 옷장 문을 살짝 열어 약간의 틈새를 만들자 침대와 책상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는 옷장 안에 쪼그려 앉은 채로 문 손잡이의 뒷부분을 고정하고 있는 너트를 양손으로 잡아 틈새의 간격을 1 센티미터 정도로 유지했다. 만반의 준비는 끝났고 이제 주인공이 무대에 등장하기만 하면 됐다. 십 분에서 십 오분쯤 지났을 무렵, 드디어 우리의 낸시 앳킨슨 씨가 방 안으로 입장했다. 그녀는 한 손에는 다이슨 진공청소기를, 다른 한 손에는 티 없이 새하얀 침구와 수건을 들고 뒤뚱거리면서 걸어와서는 그녀의 연기를 시작했다. 그녀의 손과 발은 능수능란했고 십 분 정도가 지나자 그녀가 그 방에서 해야 할 모든 일을 말끔히 해치웠다. 일이 끝나자 예상과는 달리 앳킨슨 부인은 청소기와 사용한 침구과 수건을 챙겨서 방을 나갔다. 옷장 속에서 범행의 순간만을 기다리고 있던 나는 잠시 혼란에 휩싸였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현관문 쪽을 살피며 방으로 다시 들어오는 앳킨슨 부인을 보자 다시 호흡이 가빠지고 그녀의 일거수일투족에 온 신경이 집중되었다. 문턱을 넘어서자 그녀는 주저하는 기색도 없이 반대편에 있는 책상으로 빠르게 걸어갔다. 책상 앞에 멈춰 선 그녀는 창문 밖을 한번 힐끔 내다 보고서는 예상대로 출력된 원고들을 집어 들었다. 그녀가 옷장을 등지고 서 있는 바람에 그녀의 시선이 정확히 어디를 향하고 있는지 알 수는 없었지만 그건 누가 봐도 손에 들고 있는 종이의 글을 샅샅이 쥐 잡듯이 읽어 내려가고 있는 사람의 뒷모습이었다. 지금쯤 그녀의 얼굴에는 비웃음과 조소가 가득할 것이 분명했다. 비열한 인간. 나는 그녀의 행동이 역겹게 느껴졌다. 그녀는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행동이 얼마나 가혹한 것인지 알지 못하고 있다. 당장이라도 옷장 문을 박차고 나가서 내 소중한 원고들을 그녀의 손에서 낚아채고 싶었지만 그녀에게 완벽한 타격을 가하기 위해 더 결정적 순간, 이를테면 내 노트북에 손을 대고 타이핑을 하는 순간을 기다리기로 했다.  


다음에 내가 취했던 행동은 지금에 와서 생각해 보면 사태가 악화되는 기로로 치닫는 것을 막을 수 있었던 마지막 분기점이 아니었나 싶다. 그때 내가 조금 더 경계의 끈을 꽉 잡고 있었더라면 사건이 그렇게까지 암울한 국면으로 전환될 필요는 없었을 것이다. 옷장 안에 쪼그려 앉아 이십 분 정도 시간이 지나자 한겨울이긴 했지만 콧등에 땀에 배어 나와 걸쳐 있던 안경이 코끝으로 흘러내렸다. 그 때문에 문틈 사이로 보이는 앳킨슨 부인의 실루엣이 흐릿해졌고 나는 얼굴을 찡그리거나 고개를 뒤로 젖힘으로써 내려온 안경을 올릴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오른편 문을 잡고 있던 손을 떼어 검지 손가락으로 안경을 밀어 올리는 무모한 행동을 감행했다. 그것은 거의 반사적으로 일어난 일, 일 초도 채 안 되는 짧은 시간 동안의 움직임이었지만 그 경솔한 행동은 영구적인 파급 효과를 몰고 왔다. 안경을 올린 손이 다시 문을 잡으려는 순간 옷장의 오른쪽 문이 앞으로 움직이며 끽소리를 냈다. 너무 놀란 나머지 나는 양쪽 문을 안쪽으로 잽싸게 잡아당겨 옷장 문을 닫았고 그로 인해 나는 완전한 어둠 속에 갇혀 행운의 여신이 나를 가려 주기만을 간절히 바라며 떨고 있는 신세가 되어 버렸다.  


한 순간에 형사와 용의자의 역할이 바뀌었다. 이제 나는 무고한 타인의 사생활을 엿보는 파렴치한이 되려던 참이었고 몇 초간의 정적이 있은 후 형사의 발자국 소리가 옷장 쪽으로 가까워지는 것을 들었다. 기분 나쁘게 나무 바닥을 쓸면서 서서히 나를 조여오던 그 소리는 옷장 문 바로 앞에서 멈춰 섰다. 지금이라도 나가서 자초지종을 설명하고 사과를 해야 할까. 그런데 내가 무슨 이유로 그녀에게 사과해야 한단 말이지? 아니면 문을 박차고 나가서 그녀의 얼굴을 향해 삿대질하고 그녀의 죄목을 읊어줘야 하는 것일까. 그러면 그녀는 증거가 있냐고 하면서 다른 변명들을 늘어놓을 게 뻔하다. 그것도 아니면 앳킨슨 부인에게 조용히 기도할 곳을 찾던 중 옷장보다 더 나은 곳을 찾지 못했다고 말하며 허허 웃어넘겨 버릴까. 그 어느 것도 마음에 차지 않았다. 모두 바보 같은 소리였다. 그녀에게 당한 수모를 갚아줄 수 있었던 절호의 기회를 그렇게 실없는 소리들로 허무하게 날려 보낼 수는 없었다. 그렇게 말도 안 되는 시나리오들을 머릿속에서 저글링 하는 사이 몇 분이 흘렀다. 이상하게도 그 발자국 소리는 옷장 앞에서 멈춘 이후로 더 이상 아무 소리도 내지 않았고 예상했던 것처럼 앳킨슨 부인이 옷장을 열어젖히는 일도 일어나지 않았다. 사방은 고요했고 나는 얼마간 소리도 빛도 없는 좁은 감옥에 숨죽이고 갇혀 있는 것 외에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십 분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 조심스럽게 옷장 문을 열어 방 안을 살펴보았다. 침대와 책상은 여느 때처럼 반듯하게 정리되어 있었지만 방은 텅 비어 있었다. 앳킨슨 부인은 그곳에 없었다.  


여러분도 모두 예상하듯이 그 사건이 있은 후 앳킨슨 부인을 대하는 것은 여간 불편한 일이 아니었다. 그녀와 마주치는 시간을 더 줄이기 위해 아침 식사를 바나나와 우유 정도로만 해치우고 얼른 방으로 돌아오려 했지만, 그녀는 내가 식사를 할 때면 항상 주방에 나와 주변을 서성거렸다. 더욱 고약한 것은 그 사건이 있은 다음부터는 그렇게 수다스럽던 그녀가 내게 말을 잘 걸어오지 않았다는 점이다. 사과를 베어 물면서 식탁 주변을 기웃거리다가 나와 눈이 마주치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싱긋 웃거나 내 유리잔에 우유를 따라주면서 내 눈을 빤히 쳐다보거나 하는 식이었다. 마치 나는 너의 수치스러운 비밀을 다 알고 있다는 메시지를 던지려는 것처럼.  


“찰리, 다음 주 크리스마스이브에 우리 귀여운 소피네 식구가 와서 같이 식사를 할 거예요. 참, 내가 소피 아빠에 대해 얘기하지 않았던가요? 제레미는 학교에서 영국 현대 문학을 강의하고 있어요. 찰리 당신도 이언 맥큐언이나 가즈오 이시구로의 작품들은 읽어 보았겠죠? 내가 장담하건대 제레미가 당신을 지루하게 하지는 않을 거예요!”


커피잔의 테두리를 문지르고 있던 엄지 손가락을 내려다보면서 그녀가 말했다. 그 후 며칠 동안 그녀가 내게 했던 말은 아마도 이 말이 거의 유일했을 것이다. 역시 내가 묻지도 않은 얘기를, 그것도 하필이면 문학에 정통한 아들 얘기를 꺼내는 이유는 너무도 뻔한 것이었다. 나는 그렇게 비열하게 굴 것 없습니다, 경멸을 당할 만한 일을 먼저 한쪽은 이 쪽이 아니라 그쪽이잖아요 하며 쏘아붙이고 싶었지만 최후의 복수, 이 모든 굴욕을 한꺼번에 갚아 줄 궁극의 심판을 위해 말을 아꼈다.


크리스마스이브. 드디어 결전의 날이 밝았다. 이전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으려 내가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준비를 했고 이번에야말로 온 식구들이 보는 앞에서 그녀의 범행을 낱낱이 까발리고 말 작정이었다. 나는 이전의 참담한 패배를 교훈 삼아 전략을 수정했다. 불안하기 짝이 없는 옷장 대신 안전한 매복지를 선택하고 맨 눈으로 사건의 현장을 보는 대신 영상으로 기록을 남길 수 있는 방법을 고안해 냈다. 머릿속에 명확한 그림이 그려지자 곧장 실행에 들어갔다. 근처에 있는 테스코에 가서 빨간 고무장갑 한 짝과 기저귀 한 팩을 사고, 돌아오는 길에 데니스 씨네 철물점에서 청 테이프와 고무 부츠를 한 켤레 샀다. 방에 돌아온 나는 런던에 온 이후로 한 번도 쓰지 않던 셀카봉을 슈트케이스에서 꺼냈다. 위대한 심판을 수행할 물건들을 바닥에 늘어놓자 비장한 기분마저 들다가도 가족 앞에서 수모를 당할 앳킨슨 부인을 생각하니 일말의 동정심이 일었다. 오후 세 시가 되자 이전처럼 외출하는 척 현관문을 나갔다가 방에 들어온 나는 최후의 결전을 위한 매복지가 되어 줄 벽난로를 바라보았다. 그곳은 옷장보다는 불편할 수도 있겠지만 바닥에 줄지어 늘어놓은 장비들만 적절히 활용한다면 나의 몸을 숨기면서도 적의 동태를 살필 수 있는 최적의 요새가 되어 줄 것이었다.  


완벽한 작전을 구상해 낸 스스로에게 자부심을 느끼며 벽에서 미끄러지는 것을 막아 줄 빨간 고무장갑을 손에 끼고 발에는 고무 부츠를 신었다. 벽난로 안쪽, 그러니까 굴뚝으로 이어지는 통로는 빅토리안 양식의 집들이 그렇듯 벽돌이 표면에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고무장갑과 부츠 표면의 마찰력이라면 내가 벽난로의 통로 속으로 비집고 올라가 사지를 벽돌에 밀착시키고 몸을 공중에 띄우는 일을 가능하게 해 줄 것 같았다. 과거의 실수를 반복하지 않기 위해 청 테이프를 뜯어 안경의 양쪽 다리는 관자놀이에, 왼쪽과 오른쪽 림 사이 브리지 부분은 콧등에 단단히 고정시켰다. 마지막으로 벽난로 통로에서 미끄러지거나 떨어질 만약의 경우를 대비해서 머리에 기저귀를 헬멧처럼 뒤집어쓰는 것—안전을 위해 두 개를 겹쳐 썼다—도 잊지 않았다. 이제 거울에 비친 내 모습은 마침내 정의를 실현시키기 위해 위험도 마다하지 않을 준비가 된 전사 같았고 전사는 무기를 집어 드는 대신 핸드폰을 장착한 셀카봉을 들었다.  


이제 얼마 있지 않으면 앳킨슨 부인이 자신에게 불어 닥칠 잔인한 운명을 알지도 못한 채 제 발로 방 안으로 걸어 들어올 것이다. 나는 벽난로 통로로 비집고 들어가 몸을 공중에 고정시킨 다음 셀카봉 끝에 달린 핸드폰 카메라로 그녀의 범행 현장을 낱낱이 기록할 것이다. 결코 쉽지만은 않은 미션이겠지만 이 정도의 위험은 위대한 쟁취를 위한 과정에 으레 있기 마련인 별 것 아닌 장애물이자 영웅담을 더욱 생생하고 우러러볼 만한 업적으로 만드는 데 필요한 미미한 장식물에 지나지 않았다.  


막상 벽난로 위쪽으로 나 있는 통로로 몸을 밀어 넣고 보니 예상치 못한 몇 가지 난관들이 보였다. 일단 공간이 생각했던 것보다 비좁았고 굴뚝으로 통로는 균일한 일직선이 아닌 잘록한 허리처럼 중간에 좁아지는 구간이 있는 구조를 하고 있었다. 잠시 당황하긴 했지만 나는 이내 호흡을 가다듬고 머릿속으로 구상한 자세들을 하나하나 동작으로 옮겼다. 머리 위에서 사선으로 좁아지는 벽면을 등받침대 삼아 허리를 숙여 등을 벽에 밀착시키고 기저귀를 찬 머리의 정수리 부분을 앞 벽에 닿게 함으로써 비디오를 촬영하게 될 카메라가 있는 아래쪽으로 시선을 고정하는 데 성공했다. 두 다리는 기마 자세를 취한 후 고무 부츠를 신은 발바닥을 옆으로 뒤틀어 벽 옆면에 고정시켰다. 고무장갑을 낀 왼손으로는 앞에 보이는 벽을 짚고 오른손으로는 핸드폰이 장착된 셀카봉을 아래로 늘어뜨려 핸드폰 뒷면 끝에 달린 카메라만 겨우 벽난로 밖으로 노출되게 했다. 카메라의 각도를 조정하여 잠시 후 앳킨슨 부인이 나타나게 될 책상을 향하게 하자 캄캄한 어둠 속 스크린에 눈부실 정도로 새하얗게 빛나고 있는 나의 원고가 짠 하고 나타났다. 이제 난 불 꺼진 경비실에 웅크려 앉아 감시 카메라를 주시하는 보안요원이 되어 침입자가 들어오기만을 기다리면 됐다.  


오 분에서 십 분 정도의 시간이 지났을 때 현관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리더니 거실 쪽에서 웅성거리는 소리가 났다. 평소보다 한 옥타브는 높아진 앳킨슨 부인의 웃음소리와 어린아이의 재잘대는 소리가 뒤섞여 들려왔다. 소피네 가족이 온 것이 분명했다. 이제 웅성거림은 소피의 아빠와 엄마의 웃음소리가 합세하여 악보 없는 즉흥 연주가 되었고 뒤이어 재즈 풍으로 고요한 밤 거룩한 밤을 연주하는 트럼펫 소리까지 더해졌다.  멀리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나는 소리였지만 벽난로 속에 들어와 있어서 그런지 내게는 한밤중에 먼 곳에서 들려오는 기차의 기적 소리처럼 아득하게 느껴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기적 소리는 점점 가까워지는 듯했고 마침내 스크린에 눈꽃송이가 그려진 스웨터를 입은 앳킨슨 부인이 나타났다. 그녀는 붉은 와인이 담긴 유리잔을 한 손에 든 채로 책상을 등지고 걸터앉아 스크린 밖에 있는 그녀와 아들과 얘기하는 듯했다. 나는 바로 리코딩 버튼을 눌렀다. 다행히 그녀는 카메라를 보지 못한 듯했다. 소피네 가족 때문인지 그녀는 침구를 정리하거나 청소기로 바닥을 미는 일 따위는 하지 않았다. 나는 내심 그녀가 가족들을 핑계로 매일 해오던 그녀의 악취미, 나의 원고를 요리조리 뜯어보고 거기에 마녀의 가루를 뿌리는 일을 하지 않으면 어떡하나 조바심이 났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내 생각이 기우에 불과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녀는 평소처럼 책상에서 소설이 쓰인 종이 뭉치들을 집어 들었고 몇 장을 넘겨 어떤 대목을 찾는가 싶더니 심지어 큰 소리로 읽기 시작했다. 이런 말도 안 되는 엉터리 같은 문장들을 어디 한번 들어보라는 듯이. 할머니가 낭독하는 소리를 듣고 루돌프 머리띠를 한 소피가 방으로 쪼르르 들어와 할머니 곁을 빙빙 돌면서 뛰어다녔다. 사일런트 나이트, 홀리 나이트, 올 이스 캄, 올 이스 브라이트(Silent night, holy night, all is calm, all is bright). 소피는 박자에 맞지도 않게 흥얼거리며 조금 전에 밖에서 쓰고 들어왔던 것으로 보이는 눈이 채 다 녹지도 않은 우산을 접었다 폈다 하면서 빙글빙글 돌았다. 소피의 우산 위에 있던 눈이 사방으로 튀었다. 슬립 인 헤븐리 피스, 슬립 인 헤븐리 피스(Sleep in heavenly peace, sleep in heavenly peace). 소피는 여전히 기분이 좋은 듯이 깔깔거리다 노래를 부르다 하기를 반복하며 방 안을 뛰어다녔다. 나는 스크린 밖에서 이 모든 광경을 흐뭇한 미소를 띠고 지켜보고 있을 앳킨슨 부인의 그 잘난 아들 생각에 울화가 치밀어 올랐고 모욕감으로 온몸이 부들부들 떨리기까지 했다.


내 맘 속 깊은 곳에 힘겹게나마 나 자신을 떠받치고 있는 얇은 발판이 무너져 내리는 것 같았다. 순간 내 몸은 균형을 잃고 휘청거렸고 떨어지지 않으려 벽에 대고 있던 발을 떼었다가 다시 붙이는 바람에 벽돌에 있던 그을음이 벽난로 바닥으로 눈 내리듯 떨어졌다. 나는 가까스로 원래 자세로 돌아가는 데 성공했지만 이미 상황은 내게 불리한 쪽으로 기울어지고 말았다. 방 안을 헤집고 돌아다니던 소피가 이상한 낌새를 놓치지 않고 벽난로 쪽으로 다가오고 있었다. 그 작고 앙큼한 꼬마 아가씨는 이제 호기심이 한껏 동한 표정을 하고 우산을 든 채로 내가 있는 쪽으로 걸어왔다. 나는 카메라를 끄고 셀카봉을 들어 올려 최대한 높은 곳에서 웅크린 자세를 유지하려고 애를 썼다. 산타 할아버지야! 진짜 산타 할아버지가 왔어! 바닥에 엎드려 고개를 뒤틀어 벽난로 안쪽을 보려고 용을 쓰고 있는 소피의 얼굴이 발아래 벽난로 입구를 통해 어렴풋이 보였다. 소피는 어둠 속에서 재미있는 무언가를 발견한 것처럼 장난기 가득한 미소를 짓더니 곧장 우산 끝으로 벽난로 안을 쑤셔대기 시작했다. 산타 할아버지! 산타 할아버지가 여기 있어! 소피의 공격은 시간이 갈수록 더 과격해졌고 소피의 우산 끝은 나의 발바닥과 엉덩이를 마구 찔러대기 시작했다. 이어 벽난로 밖에서는 소피를 타이르는 아빠의 목소리가 들렸고 나는 나무에서 떨어진 매미 신세가 되지 않기 위해 안간힘을 다해야 했다. 제레미가 벽난로를 향해 삿대질을 퍼붓고 있는 소피를 저지하려고 움켜 안기 전 마지막 순간, 소피가 가한 회심의 공격이 나의 사타구니를 정통으로 강타했다. 나는 외마디 항복하는 비명과 함께 바닥으로 떨어졌다.  


“진짜 산타 할아버지야. 요술 지팡이를 든 산타 할아버지!”


제레미 품에 안긴 소피는 이 상황이 재미있어 죽겠다는 듯이 온몸에 검댕을 뒤집어쓰고 처참하게 쓰러져 있는 나를 향해 손가락질하며 말했다. 앳킨슨 부인과 제레미는 한동안 너무 놀라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어둠 속에서 고장 난 신호등처럼 껌뻑이는 내 눈을 한 번 바라보더니 곧바로 서로의 두 눈을 바라보았다. 콧등에서 반쯤 떨어져 나간 청 테이프가 숨을 쉴 때마다 내 두 눈 사이에서 경망스럽게 달랑거렸다. 앳킨슨 부인이 먼저 입을 가리고 있던 손을 떼며 내게 말했다.  


“맙소사, 찰리. 찰리 당신이었군요. 도대체 이게 다 무슨 일이에요?”


나는 이 엉망진창이 되어버린 상황을 벗어나려면 무슨 말이라도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입술을 뗄 수가 없었다. 바닥에 떨어진 충격으로 팔꿈치와 무릎 관절이 욱신거렸고 오른쪽 뺨에도 상처를 입었는지 쓰렸다. 하지만 그것은 내가 받은 정신적인 충격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었다. 할 수만 있다면 도로 벽난로를 타고 기어 올라가고 싶은 심정이었고 눈을 감았다가 뜨면 이 모든 일이 나의 불안과 걱정이 자아낸 한낮 꿈이었다는 걸 깨달을 수 있길 바랐다. ‘슬립 인 헤븐리 피스, 슬립 인 헤븐리 피스(Sleep in heavenly peace, sleep in heavenly peace).’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고 있던 소피는 내가 아무 말도 하지 않자 아까 들은 캐럴을 다시 흥얼거리며 시무룩하게 방 안을 돌아다니기 시작했다. 나는 방금 일어난 모든 상황을 믿을 수가 없었고 억울하고 비참한 마음에 왈칵 눈물이 날 것만 같았다.  


“오, 가엾은 찰리. 어디 다친 데는 없어요?”


앳킨슨 부인을 그때까지 자신의 손에 쥐고 있던 내 원고를 바닥에 내려놓고, 두 손으로 고무장갑이 끼워진 내 팔을 조심스럽게 일으켜 세우며 말했다. 나는 아무 말 없이 고개를 끄덕였지만 눈을 들어 그녀를 쳐다볼 수가 없었다. 머리에 쓰고 있던 기저귀에서 검은 가루들이 미끄러져 내려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제 만신창이가 된 상황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자포자기하는 심정으로 고개를 숙이고 있는 수밖에 없었다. 순간 나는 내 어깨에 뭔가 따뜻한 것이 와 닿는 느낌이 들었다. 오랫동안 느끼지 못했던 그리운 어떤 포근한 것이 나를 감싸는 것 같았다. 여전히 고개를 들어 볼 수는 없었지만, 나는 그게 앳킨슨 부인의 손이라는 것을 알았다. 그녀가 내 오른쪽 어깨를 부드럽게 토닥이고 있었다. 그때 내 눈에서 눈물 한 방울이 나와 그녀와 나 사이에 있던 원고 위로 떨어졌다. 내 마음의 온도만큼 뜨거운 눈물이었다. 원통함 때문인지 부끄러움 때문인지 알 수 없었다. 둘 다 아닐 수도 있었다. 어쩌면 그때까지 알지 못했지만 진작에 눈 밖으로 내보냈어야 했던 무엇 때문일지도 몰랐다. 앳킨슨 부인도 나처럼 방금 눈물이 떨어진 곳을 보고 있는 것 같았다. 내 몸에서 떨어진 액체는 까만 글씨 위에 희뿌연 얼룩을 남겼다.  


“이 글 찰리 당신이 쓴 거 맞죠?”


앳킨슨 부인은 종이 위의 얼룩을 마치 손가락으로 닦을 수 있다는 듯이 꼬옥 누르며 말했다.  


“원래 이렇게 자세히 읽어 볼 생각은 아니었는데……”


그녀는 방 청소를 하다가 원고를 발견한 일, 호기심에 한 두 장 읽어보다가 매료되어 매일 계속 읽게 된 일, 문학을 전공한 아들에게 전화해 투숙객의 작품을 알린 일을 비롯해서 자신이 원고를 읽기 시작한 후 일어난 지난 몇 주간의 변화들을 모두 털어놓았다. 처음 몇 장을 읽었을 때 그녀는 당장이라도 나의 어깨를 토닥이며 굉장한 작품을 쓰고 있다며 칭찬해 주려고 했었다. 하지만 아들에게 그 일을 알린 이후로 그녀는 단순히 한번 듣고 잊히고 말 칭찬 말고 어떤 특별한 것을 내게 돌려주고 싶어 졌다. 그녀로서는 그것이 허락 없이 남의 물건에 손을 댄 것에 대한 사과의 제스처, 감명 깊은 글을 읽은 독자가 저자에게 건넬 수 있는 감사의 선물이라 느꼈고, 마침 크리스마스도 다가오고 있었으므로 작지만 깜찍한 이벤트를 나 몰래 준비해도 좋을 것 같다는 생각을 했다. 그녀는 제레미 앳킨슨에게 다시 전화를 걸어 찰리의 소설이 완성되면 런던에서 출판할 수 있도록 도와줄 수 있는지 물었다. 제레미도 그것을 흥미로운 제안이라 여겼고 크리스마스이브에 우리 가족이 모였을 때 그 원고를 제대로 읽어보고 나와도 얘기를 나눠보겠다고 했다. 내가 동의한다면 그가 알고 있는 출판계에 있는 친구들에게 내 작품의 출판을 추천해 보겠노라고.  


한순간에 모든 것이 땅에 떨어지고 내가 알던 세상이 뒤집혀 전혀 다른 곳으로 바뀐 것 같았다. 앳킨슨 부인은 나의 원고에 ‘손을 대지’ 않았다. 손을 대지 않았을 뿐 아니라 원고를 생각지도 못한 땅에서 사람들의 손에 쥐어 주고 입에 오르내릴 수 있도록 힘을 써 보려 했다. 나는 그때까지도 고개를 들지 못하고 있었다. 이제 어쩌면 영영 들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슬립 인 헤븐리 피스, 슬립 인 헤븐리 피스(Sleep in heavenly peace, Sleep in heavenly peace).’ 앞에 앉아 있는지조차 잊어버리고 있던 제레미가 아직도 노래를 부르고 돌아다니는 소피를 불러 세웠다. 소피는 걸음을 멈추더니 자기 아빠 품에 안기다 말고 내 앞에 와서 쪼그리고 앉았다. 어깨에 메고 있던 손바닥 만한 가방에서 뭔가를 꺼내려는 듯 주섬주섬 찾기 시작했다. 잠시 후 소피의 손에는 빨간 코를 한 루돌프 사슴의 얼굴이 그려진 반창고가 들려 있었다. 소피는 내 뺨에 난 상처를 호오 하고 한번 불더니 내 뺨에 반창고를 붙이고 작은 손으로 반창고를 꼭꼭 눌러줬다. 상처가 난 부위가 욱신거렸다. 두 번째 눈물 방울이 루돌프의 얼굴 위로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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