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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민 Aug 08. 2020

플랫랜드



2017년 7월 23일 금요일 밤 11시. 샌프란시스코 도그패치에 위치한 창고를 개조한 교회 건물. 예배당 앞쪽에 남자 셋이 모여 있었다. 강대상에 자신의 왼 팔꿈치를 올려놓고 비스듬히 기대어 서 있는 사람은 필립 오. 그의 맞은편 긴 예배당 원목 의자에 서로 6 피트 정도 간격을 두고 앉아 있는 사람은 제임스 양과 폴 림. 이들 셋은 5년 전 실리콘 밸리에서 불바다라는 회사를 창업한 공동 창업자로 그들은 이 건물을 아일랜드라고 불렀다. 


아일랜드는 한때 온라인 쇼핑몰 스타트업의 물류 창고로 쓰이던 건물이었는데, 필립과 제임스와 폴은 건물의 높은 천장이 사람들에게 종교적 외경심을 불러일으키는 데 큰 몫을 할 것이라는 점에 동의하여 그 창고를 사들였다. 그들은 건물의 외벽과 내벽에 칠해진 페인트를 모두 벗겨내어 회색 콘크리트를 그대로 노출시켰고, 건물 내부에 있던 모든 집기와 장식을 없애고 고동색 원목의자와 강대상만을 들여놓았으며, 높은 천장을 덮고 있던 슬레이트 지붕의 일부를 유리로 대체했다.


그날도 유리 천장을 통해 달빛과 가로등 불빛이 건물 안으로 스며들었다. 덕분에 그들은 아일랜드 안에는 어떤 조명도 켜져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서로의 표정을 읽어내는 데 아무 어려움을 느끼지 않았다. 필립은 그의 미간을 찌푸리고 그의 앞머리를 손가락으로 쓸어 넘김으로써 그들의 종교 사업이 이제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고 있다는 것을 그의 동업자들에게 알렸다. 


필립: 내가 세상을 구원하기 위해서 이 사업을 시작한 것은 아니라는 걸 자네들도 잘 알 거야. 지금도 마찬가지겠지만 5년 전에도 나는 그렇게 야심 찬 인물이 아니었어. 


제임스: 그건 내가 잘 알고 있지. 알고 말고. 필립 자네가 선지자 노릇을 할 위인은 아니라는 걸 나도 한눈에 알아보았지. 나는 아직도 그때 자네가 한 말을 기억하고 있네. 자네는 단지 다르게 살고 싶다고 했고 그 당시에 자네가 하고자 하는 일은 소설을 쓰는 일에 가깝다고 했어. 난 자네에게 그 말을 듣고 집에 돌아와서 자네가 왜 소설을 쓰고 싶다고 말하지 않고 소설을 쓰는 일에 ‘가까운’ 일을 계획하고 있다고 말했는지 곰곰이 생각해 봤었지. 딱히 이해는 되지 않았지만 말이야. 


필립: 그래 맞아. 내가 그랬었지. 난 분명 그렇게 말했었어. 아마도 나도 그때 단정할 수 없었을 거야. 내가 하고자 하는 일에 대해서 말이네. 내가 확신했던 것은 한시라도 빨리 그 망할 놈의 실험실, 얼간이들만 가득했던 회사에서 나와야 한다는 것뿐이었으니까. 경영진이라고 하는 놈들은 실험실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선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 아니, 알려고 하지도 않았어. 그들이 하는 짓이라고는 돈 많은 사람들을 만나 당치도 않는 호언장담을 늘어놓는 일뿐이었다네. 자네들도 잘 알지 않나. 실험실에서 사람 뇌를 만들 수 있다느니, 그걸로 새로운 약을 개발하면 인류의 난제인 치매를 해결하는 것은 시간문제일 뿐이라는 둥 하는 그런 얘기들 말일세. 지금 생각해도 말도 안 되는 얘기들을 그 작자들은 5년 전에도 떠벌리고 다녔다니까. 


폴: 그거 참 재밌는 말이네요. 그러니까 지금 거짓말하는 게 싫어서 이 사업을 시작하셨다는 거예요? 남들을 속이는 걸로 말하자면 우리 회사만큼 유능한 곳도 없을 거 같은데요. 안 그런가요?


필립: 그렇게 볼 수도 있겠지, 폴. 하지만 거기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네. 그건 우리가 그들과 다른 가장 핵심적인 부분이지. 난 가상의 세계를 만들고 싶었던 것이지 거짓을 말하고 싶은 건 아니었어. 말하자면 허구로 만들어진 세상을 만들어서 그 안에 진실을 담고 싶었네. 자네도 잘 알듯이 허구가 아닌 세상에 진실이 설 자리는 없으니까 말이네. 그래서 그때 자네를 찾아갔던 거지. 난 폴 자네라면 꾸며진 이야기를 현실보다 더 현실에 가깝게 만들어 줄 수 있을 거라 믿었네. 그리고 자네는 그 역할을 멋지게 해냈지. 난 정말 그때 자네가 했던 말들에 온종일 사로잡혀 지냈었지. 탈물질주의와 영원성의 회복! 이 두 가지가 우리 사업이 사람들에게 약속해야 할 가치라고 했었지. 아직도 난 그 말을 할 때 번뜩이던 자네의 눈을 기억하고 있어. 자네가 아니면 누가 그런 말을 내게 해줄 수 있었겠나. 폴, 자네는 이 사업에 영혼을 불어넣은 거라고! 그 점은 누구보다 자네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을 거라 믿네. 


폴: 음, 그랬었죠. 그때 5년 전에 필립이 했던 말들이 기억나네요. 제가 일하고 있던 마운틴뷰까지 차를 몰고 내려와서는 새로운 사업을 구상하고 있다, 그런데 그 사업은 사람들에게 정말 필요한 것을 줄 것이다, 그건 기술이 할 수 없는 영역의 사업이고 언어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고 말했었죠. 솔직히 그 말을 듣는 순간에는 지금 이 사람이 나한테 무슨 얘길 하고 있는 거지, 얼른 회사 식당에서 배나 채워서 돌려보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었어요. 하지만 그다음에 필립이 폴 오스터 얘기를 하는 바람에 그럴 수가 없었어요. 


필립: 아, 실존의 호텔. 맞아. 그때 그 얘기를 자네에게 처음 꺼냈었지. 


폴: 그래요. 실존의 호텔. 필립은 그때 제게 폴 오스터의 글을 읽고 있다고 했었죠. 거기에 실존의 호텔이란 말이 나오는데 그건 내면의 은신처에 관한 것이라고 했어요. 현실 세계에서의 삶이 더 이상 여의치 않을 때 사람들이 찾아가는 곳. 이런 은신처야말로 누구에게나 필요한 것이고 기술이 선사할 수 없는 것이라고 말했죠. 그러고는 필립은 폴 오스터의 문장을 몇 개 읽어주었는데, 전 아직도 그 단어들을 잊을 수가 없어요. 실존의 호텔은 더 나은 세상에 대한 약속의 상징이자 단순한 장소 이상의 장소, 우리가 꿈속에서 살 수 있는 기회이자 가능성을 의미한다고 했었죠. 순간 저는 뒤통수를 망치로 한대 세게 얻어맞은 느낌이었습니다. 필립이 눈치챘었는지 모르겠지만 전 그 충격이 너무 커서 몇 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앉아 있었을 거예요.  


필립: 내 말이, 아니 폴 오스터의 말이 자네에게 그렇게 설득력이 있을 줄은 나도 몰랐었네. 나는 그저 그다음 얘기를 꺼내기 위해 그 책을 인용하는 편이 좋겠다 싶었어. 바로 이어서 아마 나는 불바다 얘기를 했을 거야. 내면의 은신처를 생각하면 이상하게도 난 불바다 같은 이미지가 떠오른다고 말이야. 내 마음속에 그리던 불바다는 화염이 휘몰아치는 무자비한 징벌의 공간이 아니었어. 오히려 고요하고 정돈된 명상의 공간에 가까웠지. 불필요한 모든 것이 소멸되고 잔잔한 온기만 남은 채 끝없이 펼쳐진 무한한 공간. 거기서 나를 움직이게 하는 건 시퍼런 파도가 아니라 타닥타닥 타고 있는 주홍빛 물결이었어. 해가 수평선 가까이 다가왔을 때에만 보이는 수면의 움직임. 자네도 무슨 말인지 잘 알 거야. 그러니까 우리가 여기까지 올 수 있었던 것이고. 난 그 바다가 모두에게 필요하다고 생각했어. 설사 사람들이 그 필요성을 알아차리지 못하고 있더라도 말일세. 사람들의 무지는 내게 문제가 되지 않았네. 오히려 그건 다른 사람들이 포착하지 못한 사업의 기회를 내가 먼저 찾아냈다는 걸 의미했으니까.


제임스: 그래, 그게 우리의 시작이었어, 필립. 그렇게 폴을 만난 다음 날 자네가 나를 다시 찾아와서는 이제는 정말로 소설을 쓸 준비가, 그러니까 이 불바다 사업을 시작할 때가 되었다고 했지. 자네는 폴의 잠재력을 제대로 알아본 것에 아주 만족해했어. 폴이 지금은 앱에 들어가는 버튼의 모서리나 손질하고 색깔이나 바꾸고 있지만, 겨우 그 정도에 만족할 깜냥의 인물은 아니라는 걸 자네 두 눈으로 직접 확인하고 왔다고 했지. 폴은 과연 상상의 세계를 직접 그려낼 수 있는 사람이고 그 작업에 필요한 언어의 힘을 믿는 사람이라고도 했어. 아직도 자네가 폴에 대한 경탄의 말들을 쏟아 내던 그 모습이 눈에 선하구먼.


폴: 사실 필립을 만났던 그때가 제 인생에서 가장 가난했던 시기였죠. 오해하지 마세요. 돈이 없어서 가난했다는 말을 아니니까요. 돈은 문제가 아니었어요. 회사는 내게 내 삶에서 모든 언어를 내가 몰아내고 기술에 충성할 것을 맹세하기로 한 대가로 먹고살 수 있는 만큼의 돈을 제공해 주었죠. 그때 나는 무언가를 끊임없이 만들어 내고 있었지만, 그건 내일이면 바뀔 수도 있는 하찮은 것들에 불과했어요. 그 회사에선 모두들 오늘 하는 일에 마치 생사가 달린 것처럼 행동하지만 그들도 아마 알고 있었을 거예요. 며칠 지나면 그게 아침에 팬케이크를 먹을지 오믈렛을 먹을지 결정하는 것보다도 중요하지 않은 일이라는 것을. 전 그런 비루한 일상을 버텨낼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필립이 실존의 호텔, 불바다를 얘기했을 때, 그리고 그것이 몽상이 아니라 사업이 될 수 있다 얘기했을 때 충격을 받았죠. 전 곧바로 그 사업의 본질은 종교라는 걸 알아차렸어요.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일 수 있는 유토피아를 자신 있게 약속할 수 있는 형태는 종교밖에 없다는 걸 전 알고 있었죠. 사업이 종교라는 걸 간파한 이상, 그다음에 약속의 언어가 등장해야 한다는 것은 제게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수순이었습니다. 그래서 전 흥분해서 필립에게 사업을 통해서 영원한 세계를 약속하고 그것은 물질에서 해방될 때에만 도달할 수 있는 곳이라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말했죠. 


제임스: 그래 그래. 필립도 내게 그런 식으로 얘기하더군. 폴 자네가 방금 했던 말들 말이야. 하지만 난 도무지 이해가 되지 않았어. 실존이니 영원이니 하는 그런 것들하고 창업이 어떻게 연관이 있을 수 있단 말인지 난 알아들을 수가 없었지. 난 솔직히 내 친구 필립이 스트레스를 너무 많이 받아서 잠깐 미쳐버린 게 아닌가 생각했었네. 내가 사업과 연관시킬 수 있는 단어라고는 호텔뿐이었어. 그래, 호텔 같은 숙박 업체를 차리는 건 나쁘지 않을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지. 자네들도 잘 알지 않나? 그때 난 회계사였다고. 정확한 숫자가 눈에 보여야 어떤 결정이라도 해볼 마음이 생기는 그런 사람이었지. 내 능력으로는 필립이 한 말 중에 숫자로 바뀔 여지가 있는 것은 호텔뿐이었어. 그래서 그렇게 말했던 거야. 필립에게 별생각 없이 ‘그래, 자네 이제 숙박업을 해보겠다는 얘기인가 보군.’ 하면서. 지금 생각하면 진짜 바보 같은 얘기지. 그런데 자네들도 내 바보 같은 말이 우리가 여기까지 오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을 거야 (목을 예배당 의자 등받이 뒤로 젖히며 큰 소리로 두세 번 소리 내어 웃는다). 


필립: 숙박업. 그 단어를 듣는 순간 난 우리 불바다 사업의 마지막 퍼즐이 맞춰지는 느낌이 들었어. 이거면 정말 되겠다 싶었어. 사람들에게 영원의 세계를 가져다주는 대가로 우린 그들에게 몸을 누일 수 있는 곳, 그래, 아늑한 집을 제공해 주면 되겠다는 생각이 들었던 거야. 돈은 문제가 되지 않았어. 어차피 입주자들이 다 내게 될 거였으니까. 난 영원한 세계는 결코 값싼 것이 아니라는 걸 알고 있었지. 난 사람들에게 영원의 가치에 상응하는 돈을 마땅히 받아낼 권리가 내게 있다고 믿었지. 정확한 금액은 나중에 제임스와 상의하면서 입주자가 갖고 있던 재산의 60 퍼센트가 되어야 한다는 데 합의했었지만, 난 아직 우리가 그 이상의 돈을 받았어도 된다고 생각하네. 어차피 여기 실리콘 밸리에 사는 사람들은 다 자기들 수입의 60 퍼센트 이상은 집세로 내고 있지 않은가? 우리는 입주자 대부분이 그때까지 살던 집보다 훨씬 더 나은 환경을 평생 보장해 줄 참이었어. 그들이 얻게 될 것에 비하면 재산의 60 퍼센트는 너무 저렴해. 음, 하지만 다 지난 일이고 우린 이미 그렇게 계약을 하고 시작했으니 내가 이제 와서 뭘 어쩌겠나?


폴: 어쨌든 입주자들이 자신들의 재산의 절반 이상을 덜어 내고 입교하게 한 건 정말 탁월한 결정이었어요. 그거야말로 말로만 탈물질주의를 선언하게 한 것이 아니라 직접 행동으로 옮기게 한 거였으니까요. 


필립: 그래. 난 우리가 사용하게 될 경전에 대한 믿음이 그 정도는 되어야 한다고 봤어. 경전에는 부자에 대한 저주가 가득하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은 낙타가 바늘구멍을 통과하는 것보다 어렵다’는 말이나 지옥에 간 부자가 살아생전에 자신에게 구걸하던 거지가 천국에 있는 것을 보고 물 한 방울을 구걸하는 장면만 생각해 봐도 쉽게 알 수 있지. 문제는 경전을 믿는다는 사람들도 그걸 그저 하나의 비유, 가난한 자들을 위로하는 상징 정도로만 여긴다는 거야. 난 그 오해 때문에 모든 게 꼬여버린 거라고 생각했네. 물질적 소유를 고집하는 한 영원한 세계는 끝내 요원한 것이 되어버리고 말 걸세. 


제임스: 나도 그 점에 동의하네 필립. 어쩌면 지금에 와서야 그 의미를 깨닫고 있는 중이라고 말하는 편이 더 맞을 거 같군. 우리가 사업을 시작할 때만 해도 난 영원한 세계 같은 것을 꿈꿀 만큼 여유가 있진 않았어. 내가 바라던 것은 안정이었네. 지속적으로 금전이 유입될 때 느낄 수 있는 안도감 같은 거 있지 않나? 그 빌어먹을 회계사는 그런 것들과는 전혀 상관이 없는 직업이었지. 내게 대차대조표를 맡긴 회사가 다음 분기에도 망하지 않고 살아남는다는 보장이 어디 있겠나? 자네들도 이 바닥 돌아가는 상황을 잘 알 거야. 내 고객이었던 회사에게 소식이 끊길 때마다 난 그들의 명복을 비는 것 말고는 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네. 그리고 망할 시장의 흐름이 잠시라도 내 편이 되어주기를 잠들기 전마다 기도 했었지. 그러다 필립이 숙박업 얘기를 내게 꺼냈던 거야. 그래, 자네들이 그 사업은 종교, 컬트 같은 것에 더 가깝다고 얘기했었지만 내겐 숙박업이든 사이비든 뭐라 부르건 상관이 없었네. 내 머릿속에는 이미 숙박 시설과 부동산, 우리에게 지속적으로 현금을 공급해 줄 마르지 않는 오아시스의 청사진이 그려지고 있었네. 난 우리가 해야 할 일이라곤 물이 나오는 수도꼭지에 호스를 연결하는 일, 물을 받을 큰 양동이들을 여럿 준비하는 일뿐이라는 걸 알고 있었어. 입주자들이 내다 받친 헌금으로 타운하우스 몇 군데를 확보하기만 하면 그다음엔 시간이 저절로 돈을 벌어다 줄 거란 걸 알고 있었지. 10억은 10억을 벌어다 주지만 100억은 같은 시간에 또 다른 100억을 벌어다 주는 법이지. 난 우리 사업이 후자에 가까운 일이라는 걸 직감적으로 알았어. 그런 계산을 하는 데에는 그간 부동산 업자들의 회계를 봐주면서 주워들은 얘기들이 도움이 되더군. 어디에서 물을 받아야 할지 알아내는 건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어. 


필립: 그래, 제임스 자네가 우리 사업의 마지막 퍼즐을 맞춰 준 셈이야. 자네의 청사진은 날 납득시키기에 충분했고 자네가 옳았다는 건 지난 5년 동안의 시간이 이미 증명해 주었지. 사람들은 우리가 제공한 공동주택에 아주 만족했고, 우린 샌프란시스코뿐만 아니라 로스앤젤레스, 뉴욕에도 진출했지. 거기엔 우리 불바다의 체계적인 포교 활동이 나름대로의 역할을 했다고 할 수도 있지만, 난 제임스 자네 머리에서 그려진 청사진이 결정적이었다고 생각하네. 폴도 거기에는 이견이 없을 거야. 


폴: 그럼요. 제임스의 혜안이 아니었더라면 지금 이 성전도 얻을 수 없었을 거고 광야학교, 약속의 땅 건물들은 정말 엄두도 못 냈을 거예요 (그들이 운영하는 불바다는 크게 세 단계에 거쳐 성도를 모집했는데, ‘골짜기(그들은 입주하기 전 사람들이 원래 거주하거나 일하고 있던 곳을 그렇게 불렀다)’에서 사람들을 포섭하고, ‘광야학교’라고 부르는 시설에서 12주간 교리 교육을 시킨 다음, 자신의 재산의 60 퍼센트를 헌납하기로 결심한 성도들을 ‘약속의 땅’이라 부르는 공동 주택에 입주시켰다). 


필립: 난 무엇보다 이 성전이 아주 마음에 들어. 우리가 아일랜드라고 부르는 이 곳 말일세. 난 우리 성도들과 이곳에서 집회를 하는 시간을 늘 기다리곤 하지. 그건 내가 군중들 앞에서 말하기를 좋아한다거나 그들을 선동할 수 있는 기회를 엿보고 있는 사람이어서가 아니네. 자네들도 알겠지만 난 사람들 앞에 나서는 걸 극도로 꺼리는 사람이야. 누군가 내게 이 성도들 앞에서 설교하는 것과 성전 바닥을 대걸레로 닦는 것 둘 중에 하나를 택하라고 한다면 난 주저할 것도 없이 후자를 택할 걸세. 그래서 나는 우리 집회에서 설교를 하는 방식 대신 간증을 택한 것이라네. 성도들이 자발적으로 자신의 얘기를 돌아가며 고백하는 의식이지. 한 주간 그들의 영혼이 세속에 얼마만큼 오염되었는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가 만든 경전이 그들의 영혼을 정화하는 데 얼마나 큰 도움이 되는지를 듣는 것은 정말 즐거운 일이야. 그 이야기를 할 때 그들의 목소리가 떨리는 것은 그 이야기가 모두 진실이라는 것을 증명하지. 이 건물은 그 의식을 치르기에 안성맞춤인 곳이네. 여기 들어와서 앉기만 하면 모든 욕망이 사라지는 것 같아. 이 건물 주변을 둘러보게. 이미 쇠락한 지 오래된 산업화의 잔재 속에서 사람들이 다시 무슨 짓을 하고 있는지 똑똑히 보라고. 쓰러져 가는 공장 안을 컴퓨터로 가득 채운 다음에 저들이 어떤 꿍꿍이를 꾸미고 있는지를. 어떤 얼간이들은 그들이 하는 일을 혁명, 미래, 진보 같은 알아듣기도 힘든 말로 포장하고 있지만 우리는 이미 다 알고 있지 않나? 그건 욕망을 향한 헛된 몸부림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을. 골드 러시가 다시 시작된 것이고 그 끝에 남는 건 오염과 파멸뿐일세. 난 이 성전을 만드는 일이 저들의 욕망에 대항하는 공백을 만드는 일이라 생각하네. 광기가 휘몰아치는 바다에 침묵의 섬 하나쯤은 있어야 하지 않겠나? 


제임스: 침묵의 섬이라. 자네 계획은 분명 성공한 것 같군 그래. 성도들도 약속의 땅에서 사는 걸 꽤 만족하는 것 같고, 여기 아일랜드에서 매주 열리는 집회에서도 이따금 눈물 흘리는 사람들이 있는 걸 보면 말이네. 그들이 모두 연기를 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는 그들에게 멋진 신세계를 만들어 주는 일에 성공했다고 할 수 있겠지. 그래, 모든 게 자네 말대로 잘 되어가고 있어 필립!


필립: 그런데 말이야. 왠지 난 요즘 맘이 영 편하지가 않아. 좀처럼 잠을 자기도 힘들고. 침대에 누워 눈을 감으면 깜깜한 어둠 속에서 갑자기 어린아이의 얼굴이 떠오르는 거야. 그 아이는 웃고 있지도 않고 울고 있지도 않아. 문득 난 그 아이가 어린 시절 내 얼굴을 하고 있는 것 같다는 생각을 했네. 그래서 아이의 표정을 자세히 보려고 눈을 더 세게 감았어. 하지만 그 아이의 얼굴이 사라지고 없었어. 내가 어떤 기분을 느꼈을지 알겠나? 난 뭔가를 놓치고 있는 것 같아. 그게 날 불안하게 한다네. 사실 오늘 자네들을 부른 것도 그것 때문이야. 


폴: 필립, 혹시 요즘 사람들이 우리를 견제하는 것 때문에 불안한 건 아닌가요? 우리를 컬트나 사이비라고 부르는 사람들 말이에요. 그런 것 때문이라면 보지 못한 길을 개척하는 사람에겐 그만한 의구심이나 질책이 따라오는 건 당연하다고 생각해 보는 게 어떨까요? 모든 사람의 동의를 얻는 것은 애초부터 우리가 기대하던 바는 아니었으니까요. 


필립: 폴, 자네가 날 걱정해 주는 마음은 고맙네만 난 그런 걸 말하는 게 아니야. 사람들이 우리를 사이비라고 부르는 게 뭐 그리 대단한 일이겠나. 우린 사람들에게 가장 필요한 허구의 세계를 선물해 주었고 그걸 사람들이 사이비라고 부른다면 난 기꺼이 받아들이는 걸 주저하지 않을 거야. 그까짓 꼬리표 하나 단다고 달라질 건 아무것도 없어. 어쨌든 우리는 우리가 사람들에게 약속한 탈물질과 영원의 가치를 우리 스스로도 믿고 있고 그걸로 우린 충분히 진실의 사도가 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네. 


폴: 그럼 문제가 될 것이 뭐가 있나요? 우리 사업은 모든 게 잘 되어가고 있는데요. 어느 것 하나 흠잡을 것이 없어요. 


필립: 바로 그게 문제야, 폴. 무엇 하나 어긋난 것이 없어. 성도들이 우리가 원하는 데로 너무 정확하게 움직이고 있단 말일세. 물론 나는 우리의 확고한 비전이 그걸 가능하게 했다는 걸 알아. 난 우리의 방향이 잘못되었다고 말하려는 것이 아니야. 문제는 모든 드라마가 사라졌다는 것이지. 우리가 만든 법칙에 사람들이 너무 잘 순응하는 바람에 모든 게 기계처럼 완벽하게 돌아가고 있어. 골짜기에서 새 신도를 포섭하는 것도, 광야 학교에서 사람들을 선동하는 것도, 약속의 땅에 사람들을 고립시키는 것도, 각자가 자기의 정해진 역할을 너무 잘 수행하고 있어. 지파장들은 또 어떤가? 여기 샌프란시스코 뿐 아니라 로스앤젤레스, 뉴욕의 모든 구역 지파장들이 본인이 관리해야 할 사람이 누군지, 누구에게 보고해야 하는지 정확하게 알고 있지. 우리 사업이 이대로만 진행된다면 우리가 영원한 사후 세계에 들어갈 수 있다고 약속한 천사백사십 명의 성도를 모으는 것은 너무 자연스러운 수순이 될 거야. 선택받은 사람들에게만 주기로 했던 천사백사십 장의 티켓이 곧 동이 날 거라는 말이야. 


제임스: (못 말리겠다는 듯이 고개를 저으면서 유쾌한 말투로) 그러니까 필립 자네, 지금 우리 사업이 너무 빠르게 성장하는 것을 염려하는 것이로군. 입장권이 너무 일찍 매진될 까 봐 두려운 거야. 그런 문제라면 뭐 방법이 있지 않겠나? 여분의 자리 몇 개 만드는 것쯤은 우리가 머리를 맞대면 불가능 하진 않을 거 같은데. 


필립: 그래, 나도 그건 우리가 어떻게든 손을 쓸 수 있을 거라 생각하네. 하지만 난 단지 우리 회사가 성장하면서 초래할 결과를 얘기하고 싶은 게 아니야. 오히려 성장의 동력에 대해 말하고 싶어. 조금 전에 내가 말했던 것처럼 그 많은 성도들 숫자를 생각한다면 우리 회사는 하나의 거대한 엔진처럼 너무 한치의 오차도 없이 움직이고 있어. 이게 우리 성장의 밑거름인 것은 맞지만, 내가 애당초 그렸던 그림은 아니야. 제임스, 자네도 아까 내가 한 그 말 기억한다고 했지? 내가 창업에 대해 자네와 논의하려고 찾아갔을 때 했던 말 말이네. 


제임스: 음, 무슨 말 말인가?


필립: 소설을 쓰는 일에 가까운 일을 하고 싶다는 말. 나는 정말로 소설을 쓰고 싶었네. 할 수만 있다면 말 그대로 글을 쓰는 작가가 되고 싶었지. 어디까지나 가능하다면 말이네. 하지만 난 그 가능성에 내 삶을 걸 수 있을 정도로 무모한 바보는 아니었어. 그래서 소설을 쓰는 대신 창업을 선택한 거야. 전에 없던 세계를 가공해서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그 안에 사는 사람들이 그 세계를 믿게 하고 싶었지. 난 현실보다 더 진실한 세계를 선물할 자신이 있었고, 그 진실 안에서 사람들은 자신들이 미처 알아차리지 못한 있던 고귀한 어떤 것을 발견할 거라 믿었네. 그 과정에서 어떤 다툼이나 반목이 있더라도 난 중재할 준비가 되어 있었어. 어쩌면 난 그런 갈등을 포착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었던 건지도 모르겠네. 서로가 서로를 손가락질하며 일어설 때, 누군가가 그로 인해 무릎을 꿇을 때, 지나가던 사람이 주저앉은 사람을 일으켜 안아줄 때, 이런 때에야 비로소 좋은 소설이 탄생할 수 있는 거 아니겠나? 하지만 신은 내게 소설가의 영광을 허락하지 않으시는 것 같네. 내가 지금까지 쓴 소설은 첫 장을 읽으면 마지막 장이 훤히 보이는 글, 대부분의 문단은 그 자리에 없어도 하등 문제 될 것이 없는 그런 뻔한 이야기가 되어 버렸어. 인물들의 개성은 사라지고 사건은 그저 몇 문장으로 요약할 수 있을 만큼 시시한 글이 되고 말았어. 이게 정말이지 나를 불편하게 한다네. 어린 시절의 내가 지금의 나를 보고 있다면 크게 실망할 걸세. 그 아이가 보고 싶어 했던 위대한 소설가를 이제 잃어버렸으니 말이야. 


폴: 필립은 소설 속 인물들을 다시 살려보고 싶은 거네요. 안 그래요? 그들의 본성을 더 또렷하게 보고 싶은 거라고요. 그렇죠? 


필립: 그래 맞아, 폴. 어쩌면 내가 좀 사악하다는 생각이 들기도 하네. 그걸 부정하지는 않겠어. 난 그 사람들을 데리고 또 다른 실험에 뛰어들려고 하는 것이니까. 하지만 난 소설의 힘을 믿네. 당장은 혼란스러워도 결국에는 사람들도 자신이 몰랐던 사실을 깨닫게 될 거야. 


제임스: 어떤 실험을 해보겠다는 말인가? 어떻게 사람들을 싸우게 할 셈인가 말해 보게. 필립 자네, 성도들에게 돈이라도 더 내놓으라고 할 작정인가? 아니면 전도 실적에 따른 보너스 같은 거라도 내걸고 경쟁하게 만들 계획인가?


필립: 아니야. 난 인위적으로 사람들이 싸우게 만들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네. 물론 그들이 싸우게 되더라도 난 당분간은 멀리서 지켜보기만 할 생각이지만. 어쨌든 난 단지 우리 성도들이 자신의 본성을 좀 더 가까이에서 들여다볼 수 있는 기회를 주고 싶은 것뿐이야. 그리고 그 본성을 솔직하게 표현할 수 있도록 도와주자는 거지. 난 그것에 방해되는 것이면 무엇이든 다 치워버릴 생각이네. 그들이 사는 동산에 사과나무 한 그루 정도만 금단의 열매로 남겨 놓고 다른 규칙은 모조리 없애 버릴 거야. 나머지는 그들 마음대로 먹을 수 있게 할 계획이네. 설령 그게 다른 사람의 나무에 열린 열매라도 말이야. 어때? 흥미진진하지 않겠나? 그들도 그 과정에서 깨달을 수 있는 게 있을 거야. 우린 일단 여기 소파에 앉아 몸을 기대고 지켜보기만 하자고. 재미없는 소설이 되진 않을 걸세. 내가 장담하지.  


폴: 그게 가능할까요? 우리 성도들은 자신들이 정해진 테두리 밖으로 한 발자국도 나가려 하지 않을 텐데요. 서로의 영역을 절대 침범하려 들지 않을 거예요.


필립: 왜 그렇다고 생각하나? 내 말은, 왜 우리 성도들이 자신에게 할당된 몫만큼만 일하는 데 만족하게 되었냐고 묻는 것이네. 


폴: 그거야 우리가 그렇게 시켰기 때문이죠. 필립, 누구보다도 당신이 제일 잘 알겠지만 우리가 이 회사를 시작할 때 제일 공들였던 부분이 그 부분이잖아요. 구조를 만드는 일. 각자의 역할을 구분 짓고 명령 체계를 갖추는 일. 그래서 의사 결정의 시간을 최대한 줄이고 우리가 정말 하고자 전도와 교육에 모든 역량을 효율적으로 집중시키는 일. 전 이게 우리 셋이 머리를 맞대고 앉아서 한 일 중에 가장 잘한 일이 아닌가 싶은데요. 


필립: 그래, 아주 정확해. ‘구조’. 바로 그 구조를 다시 생각해 볼 때가 된 것 같네. 성도들이 자신의 본성에 가장 솔직해질 수 있는 구조로 우리 불바다를 바꿔 보자는 얘기야. 그동안 우리 조직이 성도들 본성을 제한하는 데 초점이 맞춰져 있었다면 이제 그 반대 방향으로 가보자고 말하고 있는 걸세. 성도들에게 무한에 가까운 자유를 주자는 거지. 난 불바다의 이상에 걸맞은 프로젝트라면 우리 성도들이 어떤 것이든 자유롭게 제안하고 추진할 수 있게 해 볼 생각이야. 어떻게 생각하나, 제임스?


제임스: 흥미로운 생각이네. 내가 이해하기로는 힘들이지 않고 사람들 행동을 조정할 수 있는 방법을 찾고 있는 것처럼 들리는데 그렇지 않은가, 필립? 그것 또한 매우 자네 다운 발상이네. 


필립: 그런가? 나는 성도들을 이리저리로 몰고 다닐 만한 카리스마가 없는 사람이라네. 그렇다고 사람들을 일일이 만나서 설득하는 일은 더 질색하는 사람이고. 그것보다는 난 커튼 뒤에서 머리를 쓰는 편이 더 편해. 몇 날 며칠이든 머리를 쥐어짜서 쓸만한 것을 만들 수 있다면야, 누가 그 시간을 아깝다고 할 수 있겠나?


제임스: 그래, 그래서 자네 지금 우리를 그 커튼 뒤 공작실로 불러들인 게 아닌가? 자네 소설의 공저자가 되어 달라고 부탁하고 있는 것이지. 


필립: 말하자면 그런 셈이야. 하지만 이건 음습한 계략이나 꾸며 보자는 게 아니야. 우리를 따르는 사람들에게 인간성을 되찾아 주려는 거야. 우리가 하는 일은 언제나 그들이 잃어버린 것을 되돌려 주는 것뿐이라는 걸 자네들도 잘 알지 않나? 


폴: 그래서 우리 불바다의 구조를 어떻게 바꿔보려는 거예요, 필립? 이제 우리 셋이 경영에서 손을 떼자는 건가요? 


필립: 아니야. 정확히 그 반대일세. 우리 셋만 남기고 다른 모든 관리자들을 없앨 생각이네. 각 구역 지파장이라든지 광야학교 총무라든지 이런 직함을 모두 떼어버릴 생각이야. 이제부터 모든 성도들은 갓 입주한 신도이든 몇 년 지난 신도이든 상관없이 동등한 위치에서 발언권을 갖게 될 거야. 우린 포섭이든 교육이든 집회 운영이든 불바다의 모든 활동에서 그들이 원하는 바를 말할 수 있게 할 거야. 물론 그들 중 누구의 말을 따라 움직여야 할지도 그들이 조율하고 판단해야 하겠지. 


폴: 그러니까 수직으로 서 있던 구조를 기울여 넘어뜨려서 수평 구조를 만들겠다는 말이군요. 


필립: 그래 바로 그거야. ‘수평구조!’ 자넨 역시 무엇이든 눈에 보이듯이 설명하는 재주가 있어. 


제임스: 그거 아주 난장판이 되겠는데? 우린 날마다 목에 핏대를 세우면서 서로에게 고함치는 사람들을 보게 될 걸세. 그러다 결국 목소리 큰 사람 주위로 우르르 사람들이 모이겠지. 필립, 난 자네가 이 성전을 그런 시끄러운 경매장으로 만들고 싶어 할 거라 생각하진 않았는데. 


필립: 뭐 잠시 그런 시기를 지나야 한다면, 난 감내할 준비가 되어 있다네. 하지만 상황이 꼭 그런 식으로 돌아가지만은 않을 거야. 수평적 기업은 이미 우리 주변에 있는 실리콘 밸리 회사들이 수년간 자기네들 회사를 운영해 오던 방식이거든. 그러니 너무 지레 겁먹을 필요는 전혀 없네. 


제임스: 음, 난 자네가 그렇게 실리콘 밸리 회사들의 열성 팬이 된 줄은 까맣게 모르고 있었네. 


필립: 그런 말이 아니야, 제임스. 난 그저 그들의 방식을 빌려오려는 것뿐이야. 그들이 원하는 건 오로지 황금뿐이야. 그걸 얻기 위해서라면 어떤 교묘한 속임수를 써서라도 직원들을 착취하고 말지. 수평구조도 그들에겐 또 하나의 창살에 지나지 않네. 직원들을 가둬 놓을 수 있는 창살. 하지만 우린 달라. 우리의 목표는 번쩍이는 금 덩어리가 아니야. 보이지 않는 영원한 세계. 지금까지는 거기로 가는 길이 너무 순조로워서 마치 거짓말처럼 느껴졌네. 이제 그 길에 현실성을 조금 더 가미하는 것, 그게 우리가 해야 할 일이네. 


폴: 그러니까 우리가 쓰고 있는 소설을 더 현실처럼 만들어 보자는 얘기군요, 필립. 그럼 맘 속에 정해 둔 다음 챕터의 주인공은 있나요? 


필립: 그것도 우리 불바다 성도님들이 스스로 정해야 할 걸세. 마지막 결정은 우리 셋이 하더라도 난 우리 성도들이 다 같이 참여했으면 좋겠어. 누가 주인공이 될 것인지를 정하는 과정 말이네. 좋은 생각들이 있으면 좀 말해 보게. 


제임스: 이것 봐 자네들. 자네 둘은 또 그렇게 뜬구름 잡듯이 얘기하는구먼. 소설이니 주인공이니 하지 말고 좀 더 알아듣기 쉽게 말해보게. 그러니까 결국 우리 불바다의 의사 결정 과정에 성도들을 참여시키려 한다, 그리고 누구의 말을 따라야 할지도 다 터놓고 결정하자, 대충 이런 얘기 아닌가? 


필립: 하하 제임스, 미안하네. 맞아. 자네가 이해한 게 맞아. 뭐 괜찮은 묘안이라도 있나?


제임스: 음, 다 같이 회의를 하도록 해야지 별 수 있겠나? 일단 사람들을 한 곳에 모아 놓고 누구든지 마음속에 담아 뒀던 이야기를 꺼낼 수 있도록 말이네. 그게 앞뒤가 맞는 이야기이건 아니건 간에. 일단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사람들이 자신의 맨 얼굴을 보여주도록 유도하는 일 아니겠나? 그들이 쓰고 있는 가면을 벗어도 안전하다고 안심시켜 주는 일 말일세. 


필립: 음, 모두가 참여하는 회의라…… 


폴: 그런데 그 가면을 어떻게 벗길 수 있을까요? 


필립: 우리가 직접 가면을 벗기기는 힘들 거야. 누군가의 힘을 빌려야겠지. 


제임스: 이를테면 누구를 염두에 두고 있나? 


필립: 그거야 물론 신이네. 우리가 그들의 마음속에 심어놓은 신. 그렇다고 신의 존재를 이용해서 그들을 위협할 생각은 없네. 우린 그들이 약간의 외경심만 갖게 하면 되네. 마치 우주의 주인과 조우한 것 같은 느낌 있지 않나? 무얼 숨기려고 해 봤자 소용없겠구나, 반대로 무얼 꺼내 놓든 잃을 것이 없겠다고 여길 수도 있겠지. 복잡하게 생각할 것 없네. 난 이 공간을 활용할 계획이 막 떠올랐어. 여기 이 성전이 멋진 아고라 광장이 될 거야. 거기서 우린 누구도 상상하지 못했던 가장 솔직하고 평등한 토론을 하게 될 것이네. 


제임스: 이 사람 또 별난 생각을 하고 있는 것 같군. 그래, 이번에도 난 결국 자네 의견에 찬성하게 될 게 뻔하지만 그래도 들어는 봐야지. 말해 보게. 여기에 집단 고해소라도 지을 작정인가? 


필립: 그건 아니네. 하지만 비슷하다고 할 수도 있지. 적어도 종교의식에서 힌트를 얻었다는 측면에서는. 굳이 끼워 맞추려고 한다면 침례 의식과 비슷한 느낌을 연출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 그렇다고 모두가 물에 잠겼다가 나오는 번거로운 짓을 하자는 얘기는 아니야. 하반신 정도 잠길 수 있는 물이면 충분할 걸세. 여기 성전에 들어오는 사람들은 누구나 영혼에 묻은 떼를 씻기 위해 오는 것 아닌가? 물이 그 역할을 훌륭히 해낼 거야. 신을 만나는 것. 그래서 영혼을 정화하는 것. 그래, 난 지금 커다란 욕조를 말하고 있는 것이라네. 자네들이 로마의 공중목욕탕을 상상하고 있다면 그렇게 틀린 그림은 아닐 거야. 저기 저 입구와 예배당 의자 사이에 빈 공간 보이나? 저 정도 공간이라면 삼사십 명이 들어갈 수 있는 온탕을 만들기엔 충분할 거야. 기왕이면 원형 욕조가 되면 좋겠고 이 성전 바닥과 같은 소재인 콘크리트로 만들면 더욱 좋겠네. 마치 원래 그 자리에 있었던 것처럼 자연스럽고 간결한 구조물이 되었으면 싶네. 


제임스: 역시 자네 다운 발상이야. 그 목욕탕에서 회의를 하시겠다? 모두 벌거벗은 체로 말인가? 사람들이 그걸 동의할 거 같은가? 


필립: 내가 그 정도로 막무가내인 사람은 아니야. 복장은 각자 물에 들어가기 알맞다고 생각하는 걸 입고 오게 하면 될 거야. 그건 여기서 별로 중요한 이슈는 아니야. 우린 지금 모든 성도들에게 자율권을 나눠 주기 위해서 이 일을 하고 있다는 걸 잊지 말게. 난 말도 안 되는 것을 강요할 생각은 전혀 없네. 상상해 보게. 매주 집회 전에 우리는 새로운 의식을 치르는 거야. 성도들이 원형 욕조에 몸을 담그면 둘러앉은 그들의 시선이 물 위에 만났다가 흩어지게 되는 거지. 그럼 우리는 잠시 침묵하면서 신의 임재를 기다리게 될 거고. 자신의 영혼이 정화되었다고 느낄 때쯤 한 사람 한 사람씩 자신의 목소리를 내게 될 거야. 가장 진솔하고 본성에 가까운 소리를. 성수 안에서 불바다의 미래를 함께 그려가는 거지.


폴: 필립이 생각하는 것처럼 그렇게 낭만적인 회의가 되지 않으면 어떡하죠? 


필립: 자네, 내가 조금 전에 한 말을 잊었나? 그게 내가 이 새로운 의식을 하고자 하는 이유야. 사람들의 본성은 원래 서로 충돌하기 마련이지. 난 그것을 보고 싶은 것이고. 그래서 충돌을 막는 모든 장애물들을 다 치워 버리려고 하는 거야. 무엇이든 인과관계를 또렷이 알기 위해서는 불필요한 변인들은 미리 제거해 버리는 게 낫지. 이게 내가 실험실에서 배운 유일한 레슨이라면 레슨이네. 아무튼 이제 우리는 무엇이 갈등의 씨앗을 잉태하게 하는지, 어떤 조건에서 혼돈이 열매 맺게 되는지를 직접 목도하게 될 거야. 그다음에 우리가 어떻게 해야 할지는 그다음에 생각해도 늦지 않을 거야. 


폴: 필립은 이미 마음을 정한 것 같군요. 그럼 우리 셋은 거기서 뭘 하게 되나요? 그냥 고개만 끄덕이고 있으면 되나요? 


필립: 당분간은. 


폴: 음 당분간이라……


필립: 우리 너무 서두르지 말자고. 이건 어디까지나 우리의 가설이고 사람들이 서로를 물어뜯게 될지 아닐지는 아직 아무도 모르는 것 아닌가? 설사 그렇게 된다 하더라도 우린 목소리 큰 사람의 손을 들어주든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사람의 손을 들어주든 둘 중의 하나만 선택하면 될 걸세. 누굴 살아남게 할지는 우리 셋이 둘러앉아서 그리 어렵지 않게 결정할 수 있을 거야. 


제임스: 하하 자네 우리 능력을 너무 과신하는 거 아닌가? 아무튼 난 필립 자네의 낙관을 지지하겠네. 


필립: 고맙네. 폴, 자네도 동의하는 건가? 


폴: 음, 성도들만 설득할 수 있다면 말이죠. 수직구조에서 수평구조로 바꾸는 게 그들에게 꼭 반가운 일은 아닐 수 있으니까요. 지파장들은 직함을 내려놓아야 하고 평신도들도 더 이상 올라갈 고지가 없어지는 건데, 그들이 순순히 따라오려 할까요? 


필립: 난 그들이 따라올 거라 믿어. 우리는 지금 그들에게 자유와 평등의 대지를 선물하려 하고 있어. 그걸 마다할 사람이 어디 있겠는가? 그리고 난 사다리를 치워 봐야 비로소 보이는 것이 있다고 생각해. 돈에 대한 사다리는 이미 우리가 입교할 때 정리했으니, 이제 권력을 향한 사다리도 제거할 때가 되었네. 우린 사람들이 순수성을 회복할 수 있도록 돕고 있는 거야. 그들은 가장 순수한 상태에서 이상을 더욱 강하게 붙들게 될 거네. 그게 안 되는 사람들은 내가 이 참에 불바다에서 나가 줄 것을 권고하도록 하지. 지금 우리에게 숫자를 늘리는 것은 그렇게 중요하지 않네. 기억하게. 우리가 약속한 천사백사십 개의 티켓은 거의 다 소진되어 가고 있어. 이번 기회에 약속의 땅에서 몇 명 내보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거야. 


폴: 좋아요. 저도 필립을 믿어 볼게요. 


필립: 그래, 정말 고마워. 여기 아일랜드 성전에서 수평구조가 잘 작동하면 차츰 다른 성전에서도 적용해 보고. 어때? 이만하면 쓸만한 챕터 하나는 건질 수 있을 것 같은데. 


제임스: 좋아. 이제 정말 우리 불바다가 새로운 챕터를 시작하게 된 것 같군 그래. 이 참에 우리 회사 이름도 변화에 걸맞게 바꿔 보는 게 어떤가? 뭐든 바꾸려면 확실히 하는 게 좋지 않겠나?


필립: 그것도 나쁘지 않은 것 같은데. 내가 지은 불바다의 시대는 이제 막을 내렸으니 이번 작명은 자네들에게 맡기겠네.  


폴: 음, 바다의 시대가 저물었으니 이제 육지로 가야 하지 않을까요? 무한한 자유가 보장되는 끝없이 펼쳐진 연둣빛 대지, 플랫랜드 (Flatland). 필립이 처음 생각했던 고요한 주홍빛 불바다의 연장선으로 제격인 것 같은데, 어때요? 


제임스: 플랫랜드! 무슨 놀이동산 이름 같기도 하구먼. 입장권 가격만 제대로 받을 수 있다면야 난 찬성일세. 


필립: 그래, 우리에게 이만큼 더 재밌는 놀이가 어디 있겠나? 안 그런가? 플랫랜드라, 역시 폴 자네는 여전히 언어의 힘을 잃어버리지 않은 것 같군. 그보다 나은 이름은 없을 걸세.  


필립은 강대상에 기대고 있던 몸을 일으켰다. 그는 두 세 걸음 정도 걸어 앞 줄에 앉아 있던 폴에게 다가왔다. 필립은 폴의 어깨를 토닥인 다음 그의 옆자리에 앉았다. 제임스는 그 둘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다가 천천히 등받이에 몸을 기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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