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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동민 Mar 07. 2020

에밀리

에밀리를 만났던 날에도 나는 내 앞에 주어진 시간이 내게 명령하는 일들을 하고 있었다. 6월 26일 샌프란시스코 공항에서 만나야 하는 사람들의 도착 예정 시간을 체크하고 그들에게 입국 수속이 끝나고 짐을 찾는 대로  게이트 G로 나와서 카파 투어 푯말을 들고 있는 사람을 찾으라는 안내 문자를 보냈다. 그리고 공항에서 픽업하는 대로 그들이 예약한 샌프란시스코 다운타운의 오패럴 가에 위치한 니코 호텔까지 이동해서 체크인을 한 후 바로 샌프란시스코 골든아워 투어를 시작할 것이며, 카파 투어를 이용해 주셔서 다시 한번 감사하다는 말을 덧붙였다. 나는 도요타 시에나를 몰아 하루 전 이동한 것과 동일한 동선을 따라 움직이면 되었고, 전날의 언어를 반복하여 누군가에게는 갈망의 대상이 되었던 차창 밖의 세계가 이제 직접 만질 수 있는 당신의 것이 되었음을 관광객들에게 확인시켜 주기만 하면 되었다. 그날 굳이 언급할 만한 특이사항이 있었다면 성수기에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투어 예약 인원이 두 명 밖에 되지 않는다는 점과 내가 새벽에 축구 경기를 보는 바람에 약간의 피로감을 느끼고 있다는 점 정도였다.  


어제 자정 무렵 나는 서니베일에 있는 갤러리아몰 푸드코트에 앉아 스크린(거실에 깔린 러그 정도 크기였다)에 중계되고 있는 한국과 우루과이의 월드컵 16강전 경기를 보고 있었다. 그 자리에는 나 말고도 삼십 명이 조금 넘는 한인들이 있었는데, 16강전 경기임에도 불구하고 4년 전 2006년 독일 월드컵 때 모였던 사람들에 비해 그 수가 반이 채 되지 않았다. 그중에는 2002년 한일 월드컵 당시 대다수의 한국 사람들이 구입하였던 Be the Reds 빨간색 티셔츠를 입고 온 뚱뚱한 중년의 남성이 있긴 했지만, 특별히 한국 대표팀 유니폼 색깔에 맞춰 붉은색 옷을 입고 사람들은 별로 눈에 띄지 않았다. 스크린 위에 투영된 넬슨 만델라 베이 경기장에는 비가 내렸고, 이로 인해 가뜩이나 반발력이 커서 컨트롤하기 힘들었던 자블라니가 젖은 잔디 위 이곳저곳으로 미끄러지는 바람에 선수들은 자기 발 앞에 공을 잡아두는 데 애를 먹었다. 일찌감치 수아레즈에게 선제골을 먹는 바람에 푸드코트에 모인 응원단의 분위기는 가라앉았고, 후반전 중반 이청용이 상대 수비수들과 경합 중에 한 헤딩이 골문을 갈랐을 때 잠시 고조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수아레즈의 추가골로 다시 잠잠해졌다. 경기 종료를 오분 여 앞두고 우루과이 수비수 다섯 명을 가르고 이동국에게 전달된 박지성의 스루패스가 이동국의 오른발이 보인  큰 회전 궤적과 대조를 이루며 그의 발 끝을 스쳐 우루과이 골키퍼에게 데굴데굴 굴러갔을 때 사람들은 이 경기에 이제 마침표가 찍혔다는 것을 알았다.  


새벽의 캄캄한 푸드코트를 비추던 스크린 불빛은 꺼졌고, 사람들이 자리에서 일어나면서  스틸 의자가 콘크리트 바닥을 긁어대는 덕분에 그 마찰 소리가 함성을 대신해 우리들의 임시 관람석을 채웠다. Be the Reds 티셔츠를 입은 중년의 남성은 푸드코트에 입점해 있는 비빔밥 코너의 카운터에 있는 간이 문을 열쇠로 열고 육중한 몸을 비틀며 조리장으로 들어가 메뉴 사진으로 구성된 간판의 스위치를 올렸다. 곧바로 돌솥에 담긴 해물 비빔밥, 불고기 비빔밥, 야채 비빔밥이 후광을 받아 머리 위에서 빛났다. 우리의 응원 팀장은 그의 성긴 머리카락이 채 가리지 못해 드러난 정수리 부분의 두피에 주방장 모자를 올려놓으면서, 오늘 같은 날일수록 다같이 힘을 내야 한다고 떠나는 사람들의 뒤통수에 대고 외쳤다. 그리고는 늦은 새벽이라 다들 출출할 텐데 본인이 무상으로 음식을 제공할 테니 주문만 하라고 했다. 하지만 우람한 체구에 걸맞지 않게 그의 목소리는 얇은 하이톤이었던 까닭에 대부분의 사람들은 듣지 못하고 그 자리를 떠났다. 그와 멀지 않은 곳에 있던 나는 그의 호기로운 호의가 어둠 속에 사라지는 것이 안타까워 그에게 유부우동도 가능한지 물었다. 푸드코트 반대편에 있는 출입문을 통해 나가는 사람들을 응시하던 응원 팀장의 시선이 내 얼굴로 옮겨왔다. 그는 몇 초 동안 내 말을 듣지 못하고 아직 주문을 기다리고 있는 사람처럼 나를 내려다보았다. 나는 늦은 시간에는 밥보다는 국물이 있는 게 좋지 않냐고 그를 설득하여 내 소기의 목적을 달성하고 서둘러 그곳을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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