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리스본행 야간열차>
라이문트 그레고리우스(제레미 아이언스)는 이혼 후 불면의 밤마다 혼자 양 편을 오가며 체스를 두곤 한다. 그는 스위스 베른에 있는 한 고등학교 고전문헌학 선생으로 늘 똑같은 루틴을 반복하는 사람이다. 비가 쏟아지던 어느 날, 그레고리우스는 다리 위에 올라 선 빨간 코트를 입은 여자를 목격한다. 그는 여자가 강물에 빠지지 못하게 막고, 대신 그의 우산이 강물에 휩쓸린다.
비에 쫄딱 젖은 채 여자를 데리고 학교에 나타난 그레고리우스는 엄청난 이야깃거리가 된다. 여자는 코트를 남긴 채 홀연 사라진다. 그레고리우스는 코트 주머니에서 아마데우 프라두의 『언어의 연금술사』라는 책을 발견한다. 책에 꽂혀 있던 리스본행 열차 티켓은 그레고리우스를 포르투갈로 이끈다. 그 책은 그레고리우스의 생각을 그대로 옮겨 놓은 듯하다.
프라두에 대해 미치도록 궁금해진 그는 전에는 감히 상상도 못 할 일들을 한꺼번에 저지른다. 하루도 빼먹지 않았던 학교를 벗어났고 빨리 돌아오라는 교장의 연락을 피한다. 몸의 일부 같았던 두툼한 안경 대신 가벼운 안경을 새로 맞춘다. 스위스 베른에서는 체스로 날밤을 새곤 했는데, 리스본에서는 햇살을 맞으며 잠에서 깬다. 프라두가 남긴 글이 그레고리우스의 삶을 송두리째 뒤집어 놓았다.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의 글을 읽을수록 자신의 삶이 초라해지는 것만 같다. 하지만 프라두의 흔적을 따라가는 여정을 통해 삶을 살아갈 힘을 다시 얻고 있음이 분명하다. 아마데우 프라두(잭 휴스턴)는 이미 이 세상이 사람이 아니다. 독재 시절 판사의 아들로 태어나 의사가 되었고, 독재 타도를 도모하는 레지스탕스에 가담했다. 그는 냉철한 이성과 불 같은 감성을 가진 사람이었다. 그레고리우스는 프라두 주변 사람들을 하나둘 만나 이야기를 요청한다.
늘 검은 옷을 입고 있는 그의 여동생 아드리아나(샬롯 램플링)는 오빠가 살아 있는 것처럼 행동한다. 주안(톰 커트니)은 프라두가 레지스탕스를 하기에는 심성이 너무 여렸다고 말한다. 피아노를 치던 그의 손은 압제의 상처를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발리시오 학교의 바르톨로메오 신부(크리스토퍼 리)는 프라두의 졸업 연설이 신성모독처럼 들렸음에도 탁월함을 부정할 수 없었음을 고백한다. 프라두의 가장 친한 친구이자 연적이었던 조지(브루노 간츠)는 갑자기 나타나 과거 이야기를 꺼내는 그레고리우스가 못마땅하다.
그레고리우스가 만난 사람들은 프라두의 파편을 나눠가진 채 각자 고립되어 있었다. 그레고리우스에게 안경을 새로 맞춰준 안과의사 마리아나(마르티나 게덱)는 주안의 조카다. 그녀는 사람들이 독재 시절에 대해 사람들이 쉬쉬하고 있다고 말한다. 독재에 가담했든 저항했든 그 시절은 모두에게 너무 큰 상처를 남겼다. 과거 기억을 공유하는 사람을 만나면 고통을 마주해야 할 테니, 차라리 고독 속에 숨어 몇십 년을 살았던 것이다.
그 한복판에 나타난 이방인 그레고리우스가 구심점이 되어 프라두의 과거를 재조립한다. 덕분에 아드리아나는 오빠의 죽음이 헛되지 않았다며 안도할 수 있고, 조지는 프라두에 대한 그리움을 대신해 프라두가 선물해 준 약국의 불을 밤에 환하게 켜놓는다고 말한다. 제삼자가 아픈 역사를 돌아보도록 도와주는 이야기로 보일 수 있어서 조심스럽다. 하지만 프라두의 글이 불러온 이방인 덕분에 애써 외면했던 아픔을 돌보고 마음의 짐을 내려놓는 얼굴들이 마음에 남는다.
파스칼 메르시어의 동명 원작 소설을 바탕으로 한 이 영화는 방대한 원작 내용을 압축적으로 그린다. 주변 인물이나 서사의 비중을 크게 줄이고 때로는 두 인물을 하나로 합치기도 한다. 원작에서 그레고리우스가 프라두를 이해하기 위해 포르투갈어를 배우는 과정이 꽤나 중요하다. 영화는 모든 대사가 영어로 치환되어 이질적인 언어들의 미묘한 충돌을 음미할 수 없다. 그래도 프라두의 글을 낭독하는 제레미 아이언스의 목소리가 너무나 감미롭기에 감수할 만한 손실이었다고 사심을 담아 말한다.
그레고리우스는 전혀 다른 사람이 되어 스위스 베른으로 돌아갈 테고, 베른도 그의 눈에 완전히 새로운 풍경으로 보일 것이다. 그레고리우스의 거대한 일탈에 누군가는 대리만족을 얻고 원래의 일상으로 돌아갈 것이다. 또 다른 누군가는 어디론가 훌쩍 떠나는 일을 도모할지도 모르겠다. 어느 경우든 그레고리우스의 이야기는 지금 내가 붙박여 있는 이곳을 벗어나 다른 삶을 꿈꾸게 만든다.
한편 이 이야기의 원동력을 제공하는 프라두의 글은 이야기 속 이야기로서 강력한 힘을 발휘한다. 한 사람의 글이 시간과 공간을 초월해 다른 누군가를 변화시켰다. 또 그 사람이 프라두의 주변 사람들을 다시 연결한다. 프라두는 생의 모순이 초래한 고통을 감내하며 삶의 진실 혹은 진실에 가까운 무언가를 적확한 언어로 남겼다. 진실을 말하는 글은 강력한 힘을 가진다. <리스본행 야간열차> 속에서 진실한 글이 뒤에 남겨진 사람들에게 축복으로 내려앉은 광경을 목격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