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짓수를 하면서 대회를 나갈 기회는 굉장히 많았다. 하지만 '아직 대회에 출전하기에 부족한 실력이어서', '준비할 시간이 많지 않아서', '다칠까 봐 겁이 나서', '큰 실력차로 질 것 같아서' 등등 스스로 안 해야 되는 이유를 계속 찾았었다.
그러던 중 콜롬비아에 도착해 며칠 지나지 않아 주짓수 대회가 한 달 반 후에 있다는 걸 알게 되었다. 대회를 나갈 생각을 해본 적이 없던 터라 망설이고 있었으나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콜롬비아 메데진에 또다시 올 수 있을까? 이곳에서 대회를 참여하는 것만으로도 좋은 경험이 되지 않을까?' 그리고 곧 대회에 출전하겠다고 결심했다. 누가 보면 대단하지 않은 결심일 수 있으나, 대회에 전혀 관심 없이 취미로 운동한다고 생각했던 나에겐 커다란 도전이었다.
대회 전 날 계체량
처음 계체를 하다 보니 한 가지 착각했던 것이 있었다. (대회마다 규정이 다르지만) 이 대회는 몸무게를 도복을 입은 채로 무게로 잰다는 것이었다. 일반적으로 도복 무게를 약 1.5kg으로 계산한다. 하지만 가지고 있던 도복은 특히 더 무거운 편이었고, 도복 무게를 포함한 체중을 그냥 내 몸무게로 생각했다가 초과한 것을 계체 전 날 알게 되었다.잘 모르고 그저운동만 하다가 계체 전 날 무게를 재보니 약 1.3kg을 초과했었다. 체중계가 따로 없어서 그냥 감으로 이 정도면 되었겠지 했는데 큰 오산이었다. 계체가 초과되면 대회를 참가할 수도 없고, 대회 당일 아침에 몸무게를 급격하게 빼고 시합에 나갈 수도 없는 상황이었다.
당장 할 수 있는 것은 굶는 것이었다. 대회 이틀 전 약 24시간 동안 금식을 했고, 물을 최소한으로 마셨다. 계체장에 가기 전, 몸무게를 재러 다니던 헬스장에 가서 확인해 보니 웬걸 또 예상보다 더 많이 빠졌다. 아마도 체육관에서 재었던 몸무게가 정확하지 않고 조금 더 많이 나오는 것 같았다. 그래도 혹시 몰라 관장님께 계체 할 때 입을 가벼운 도복을 빌려달라고 요청했다. 다행히 관장님이 빌려주셨고, 계체장에서는 1.5kg나 더 적은 무게로 계체에 통과하게 되었다.
Medellín pro bjj
대회 당일, 아침부터 긴장이 되어서 아침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시합장으로 이동했다. 택시를 타고 가는 동안 긴장이 되어 연신 물만 마셨다. 내 시합은 오후 늦게 있었지만 체육관 친구들의 시합이 오전 중에 있어 일찍 와서 현장 분위기를 구경했다. 몸을 풀면서 서서히 이 분위기에 적응하려고 노력했다.
Medellín pro bjj
친구들 경기를 보며 응원하고, 사진을 찍어주고, 계속 바뀌는 시합 시간을 확인하며, 마인드 컨트롤을 했다. 예전에 들었던 기억이 있는데, 최홍만 선수가 K1에서 활동하던 시절 한 인터뷰에서 기자가 '케이지에 올라갈 때 어떤 마음가짐으로 올라가느냐'는 물음에 그런 대답을 한 적이 있다. "케이지에 올라갈 땐 상대를 죽인다는 마음으로 올라간다." 마치 나도 그 말처럼 뭔가 결의를 다지고 매트 위로 올라가야 할 것 같았다.
하지만 평소에도 나와 상대방 둘 다 다치지 않게 운동해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데 갑자기 상대를 기절시킨다던가, 관절기로 어딘가를 부러트린다는 생각으로 임하는 게 오히려 집중이 되질 않았다. 머릿속은 복잡하고, 마음은 요동쳤다. 그렇게 시작한 나의 주짓수 첫 시합, 무릎이 아파 양 쪽 무릎 보호대를 차고, 계체에 무관심해서 전날 무리하게 금식했던 것, 마인드 세팅이 제대로 되지 않은 것 등 부족한 면이 너무 많았다.
Fist bump
서로 주먹을 맞대고, 상대방의 깃을 잡은 순간 꿈을 꾸는 듯했고, 힘이 전혀 들어가질 않았다. 첫 시합인데도 몸은 무거웠고, 그렇게 계속 끌려다니다가 결국 점수는 2-2, 어드미션 2-1로 하나 차이로 졌다. 점수는 2대 2었지만 사실상 계속 끌려다니는 형세였고, 계획했던 기술은 써보지도 못하고 경기가 끝나버렸다. single elimination 시스템이어서 한 번 지면 더 이상 경기는 없었다.
체육관에서 스파링을 많이 해보았지만, 이렇게 5분이 지나고 힘들었던 적은 결코 없었다. 후회와 핑계만 가득했던 첫 시합, 끝이 나자 긴장이 풀리고 시험이 끝난 학생마냥 홀가분한 기분까지 들었다. 한 달 반동안 기다렸던 날을 졌지만 그래도 도전은 해보았다고 생각이 들었다.
시합에 져도 메달을 받는 경우가 있다
앞서 말한 것처럼 나와 대회는 전혀 무관하다고 생각했다. 한국에서 운동했을 때도, 스스로 주짓수는 나에게 취미라고 생각했고, 대회를 나가는 건 체육관에서 잘하는 친구들이나 하는 것인 줄 알았다. 하지만 대회를 준비하는 과정에서의 내 모습은 취미로 운동하던 모습과는 사뭇 달랐다. 시합 계획을 짜야했고, 어떤 동작을 하던지 정확하게 구사할 줄 알아야 했기 때문에 더욱 집중하고, 관장님께 질문하는 시간이 늘었다. 그저 하루 운동을 마치는 게 다였던 내 일상에, 시합으로 준비하며 더욱 꼼꼼하게 배우기 시작했고, 열정이 생겼다.
경기 중 두 번이나 암바에 걸려 이를 악물고 버텼는데 집에 돌아오니 오른쪽 겨드랑이 쪽이 시퍼렇게 멍이 들어 있었다. 첫 시합에서 탭을 치고 싶지 않았고, 포기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컸다. 정말 위험했다면 탭을 쳤겠지만, 무조건 빠져나갈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그나마 5분을 버텼던 것 같다.
이 시합에서 지고 나서 약 한 달 동안은 악몽을 꾸었다. 아쉬운 마음에 잠이 들면, 암바 당하고 있는 내 모습과 매트 위에서 긴장하고 있던 순간이 떠올라 괴로웠다. 이렇게 나의 주짓수 대회를 끝낼 수 없었기에 아픈 무릎을 위해 충분히 쉬어주고, 또 다음 대회를 준비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