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존경하는 마음이 없으면 진정한 사랑이 될 수 없다➀

클라라 슈만 피아노 트리오 작품번호 17번 중 3악장 안단테

by 에리카

클래식 음악 작곡가들 중 가장 유명한 부부는 아마도 로베르트 슈만과 클라라 슈만 부부의 이야기일 것입니다. 로베르트는 자신의 스승이었던 비크의 딸 클라라와 사랑에 빠집니다. 그들은 무려 9살 차이로 로베르트가 클라라에게 사랑을 고백하던 해에 그는 25살, 클라라는 16살이었지요. 클라라의 아버지 비크는 당연히 노발대발하며 결혼을 반대합니다. 그에게 클라라는 엄마 없이 애지중지 키운 외동딸이었고 그녀는 실력 있는 피아니스트로 한창 명성을 떨치고 있었으니 말입니다. 그런 소중한 딸을 경제적으로 불안정한 작곡가에게 시집보낼 아버지는 아무도 없었겠지요. 심지어 딸은 16살, 아직 어린 소녀였고요.


결국 이 결혼을 반대하며 비크는 슈만을 '미성년자 유괴'로 고발하고 슈만도 비크를 ‘정당한 이유 없이 결혼을 방해한다’는 명목으로 맞고소하면서 스승과 제자 간의 지리한 법정 싸움이 벌어집니다. 기나긴 싸움 끝에 결국 1840년, 법정은 클라라가 성년이 되면 아버지의 허락 없이 결혼할 수 있다는 판결을 내리고 1819년 생이던 클라라는 그 해 이미 성년에 도달해 있었기에 슈만과 바로 결혼을 하게 됩니다.


클라라 슈만 Clara Schumann


19세기 낭만주의 음악사에서 클라라 슈만은 종종 ‘로베르트 슈만의 아내’ 혹은 ‘브람스의 뮤즈’로만 소개되곤 합니다. 그러나 이것은 그녀의 정체성을 심각하게 축소하고 왜곡하는 일입니다. 클라라는 단지 위대한 작곡가의 조력자가 아니라 오히려 그 시대를 앞서간 예술가이자 최고 수준의 피아니스트였습니다. 로베르트 슈만은 손 부상으로 인해 연주자의 길을 일찍 포기했지만 클라라는 유럽 전역을 누비며 수십 년간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활약했습니다. 그녀는 멘델스존, 리스트, 요아힘, 브람스 등 시대의 거장들과 동등하게 교류하며 그 누구보다 섬세하고 강렬한 해석력으로 ‘연주자 중심의 음악 문화’를 이끌었습니다. 반면 로베르트는 생전에는 대중적 인지도가 높지 않았고 그의 작품은 오히려 클라라의 연주를 통해 세상에 알려진 경우가 많았습니다.


클라라의 삶은 ‘사랑’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희생과 제한의 연속이었습니다. 로베르트는 클라라의 공연 일정, 연습량, 심지어 곡 해석 방식까지도 끊임없이 간섭하고 통제했습니다. 약혼 당시 그는 “결혼 첫 해에는 콘서트도, 레슨도 하지 말라”라고 요구했고, 클라라의 작곡 활동 역시 결혼 후 급격히 줄어들었습니다. 클라라는 남편의 예술적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해 자신의 이름과 연주를 희생했고 로베르트의 작품을 중심으로 공연 프로그램을 구성했습니다. 그녀는 자신이 더 좋은 평가를 받아도 겸손을 넘어 자기 검열에 가까운 태도를 보였습니다.


공연 중 청중의 갈채는 기뻤지만 남편의 작품이 나보다 더 사랑받길 바랐다.
- 클라라의 일기 중에서


당시 여성 예술가들이 처한 사회적 조건이 열악했던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클라라는 아버지가 저명한 음악가였고 이미 최고의 피아니스트로 자리 잡은 예술가였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녀가 남편의 권위에 맞서 자신의 예술적 주체성을 끝까지 지켜내지 못했다는 점은 단순히 시대 탓만으로는 설명되지 않는 부분입니다.


사실 그녀는 연주뿐 아니라 작곡 실력도 매우 뛰어나, 젊은 시절 피아노 협주곡, 가곡, 실내악 등 다양한 장르의 작품을 남겼습니다. 그러나 결혼과 육아, 남편의 병간호, 끊임없는 연주 투어 속에서 그녀는 작곡가로서의 자신을 온전히 펼칠 기회를 점점 잃어갔습니다.


나는 작곡을 그만두었다. 그것은 남자의 일이기 때문이다.
- 클라라의 일기 중에서


이 문장은 단지 시대의 제약을 반영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녀 스스로도 사회적 기대를 내면화하고, 억압을 자기 삶의 질서로 받아들이고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클라라 슈만의 내면화된 억압과 자기 검열은 단지 남편과의 관계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보다 훨씬 이른 시기, 그녀의 어린 시절과 아버지 프리드리히 비크와의 관계 속에서 이미 깊게 뿌리내리고 있었지요. 아버지 비크는 딸의 재능을 아주 일찍부터 알아보고 혹독하게 훈련시켰으며, 교육은 철저한 통제와 감시의 형태로 이루어졌습니다. 하루 수 시간씩 연습을 시키고 일기와 편지를 검열하며 공연 프로그램과 옷차림, 말투까지 모두 지시했습니다. 그는 딸에게 ‘아버지의 기대에 부응해야만 존재 가치가 있다’는 신념을 심었습니다. 클라라는 통제적인 아버지의 그늘에서 벗어나기 위해 서둘러 결혼을 택했을 가능성도 큽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그녀는 남편에게서도 유사한 통제 구조를 다시 겪게 됩니다. 그녀는 자신이 남편보다 더 주목받는 것을 불편해했고 스스로 작곡을 포기했으며 자녀에 대한 죄책감으로 연주 활동마저 제약하려 했습니다. (그녀는 슈만과의 사이에서 여덟 명의 자녀를 낳았습니다.)


슈만부부의 자녀 (사진을 찍을 당시 클라라는 일곱째를 임신 중이었다)


이는 단순히 시대의 한계를 수동적으로 견딘 것이 아니라 그 한계를 내면화하여 스스로의 삶을 제한했던 비극이기도 합니다. 클라라는 당대 여성 예술가 중 가장 뛰어난 재능을 지녔지만 많은 순간에서 자신을 억제하고 축소하며 살아갔습니다. 그 억제는 외부의 강요뿐 아니라 아버지와 남편을 통해 학습되고 반복된 구조적 억압이 그녀의 일부가 되어버린 결과였습니다.


클라라와 로베르트의 관계에는 분명 사랑이 있었지만 그 사랑은 서로의 가능성과 자유를 존중하지 못한 채 불균형 속에 놓여 있었습니다. 진정한 부부란, 상대가 가진 재능을 질투하거나 통제하지 않고 서로의 성장과 변화, 고유한 존재로서의 삶을 지지해 주는 관계여야 합니다. 무엇보다 중요한 건 상대를 하나의 독립된 인격으로 존경하는 마음입니다. 클라라 슈만의 삶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질문을 던집니다.


당신은 사랑이라는 이유로
누군가의 자유를 억누르고 있지는 않습니까?
혹은, 당신은 누군가의 기대에 맞추기 위해
자신의 목소리를 지우고 있지는 않습니까?


이 질문에 정직하게 답하는 것, 그리고 사랑 안에서 서로를 온전히 존중하고 자유롭게 만드는 관계를 지향하는 것. 그것이 우리가 클라라의 삶을 돌아보며 배워야 할 진정한 교훈입니다.



클라라 슈만 피아노 트리오 작품 17의 3악장 안단테

Clara Schumann's Piano Trio in G Minor, Op. 17: III. Andan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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