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가 자꾸 얼굴이 빨개지는데요…
갱년기에 좋은 약 있나요?”
앗! 이런 남성분은 처음이었다.
갱년기 증상을 호소하시는 여성분은 자주 접하는 편이었지만,
남성분께서 오셔서 갱년기라고 표현하면서
영양제를 찾는 경우는 드물기 때문이다.
중년 남성분들께 대체로 간에 좋은 역할을 하거나
정력 개선, 지구력 증진이라는 카피가 적힌 것을 권해드리게 된다.
그런데 보통 요즘 부쩍 피곤하다고 말씀하시거나
소변을 보기 불편하다고 하시지,
얼굴이 빨개진다면서 찾으시는 경우는 없었다.
갱년기 증상이라는 게 사람마다 차이는 있겠지만 말이다.
매대에 진열된 상품에 손이 가다가 망설여진다.
이걸 드신다고, 얼굴이 빨개지는 증상이 정말 좋아지실지
자신이 서지 않는다.
뭘 드려야 할까?
호박씨? 아연? 코큐텐?
살짝 당황한 마음을 진정시키고,
말씀하시는 분을 찬찬히 살펴본다.
허옇고 깔끔한 느낌의 피부 톤,
자신의 감정을 잘 털어놓을 것 같지 않은
내성적이고 얌전한 기운이 흐른다.
주로 주변의 의견에 맞춰서 조용히 지내실 것 같은 인상이다.
“심장이나 혈압은 괜찮으세요?”
“다 검사해 봤는데, 그런 건 괜찮대요. 혈압도 안 높고.”
조금 더 여쭤보고 배워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주로 어떨 때 얼굴이 빨개지는 것 같으세요?”
“아무렇지도 않아요. 그냥 갑자기.”
내 질문이 조금 엉성했나 보다.
몸의 증상이 일어나게 된 상황에 대해서 여쭤보게 되면,
또 다른 몸의 증상을 떠올리시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그래서 아무 일도 없었다고 대답을 주시거나,
요즘은 주로 코로나 백신을 맞은 후로 그런 것 같다고 의심하신다.
장자끄 상페의 <얼굴 빨개지는 아이>가 생각난다.
부끄럽거나 화가 나지도 않았는데
시도 때도 없이 얼굴이 빨개지는 아이와 감기에
걸린 것도 아닌데 영문 없이 재채기해대는 아이들의 우정 이야기다.
둘은 서로의 원인 모를 병에 관해서 이야기를 나누며
끈끈한 동질감을 느꼈고, 함께 할 때는 지루한 줄 몰랐다.
점차 아이들의 증상은 사라져 갔다.
“음, 낯선 사람들이랑 있을 때 그러세요? 조금 불안하거나 당황했을 때?”
“아니요. 그런 것도 없는데.”
수줍음이 많고 혼자 조용히 있는 것을
좋아하시는 분이라고 생각하고 여쭤본 말이었다.
예민한 감각으로 복잡하고 새로운 정보들을
한꺼번에 받아들여야 할 때,
감수성이 풍부해서 아직 익숙하지 않은 자리가 불편할 때
얼굴이 빨개지는 것은 아닐까 추측해 보았다.
그런데 아니라고 하신다.
“그럼, 언제 빨개지세요?”
“그냥 가게에 있는데.”
“뭘 보시거나, 뭔가를 떠올리시고 그렇게 되는 거예요?”
“아니, 그냥 갑자기 그래. 갑자기.”
언제 정확히 그러시는지 스스로 인지해서 설명해주시지 않으시면,
나로서는 어쩔 도리가 없다.
자기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일은
오로지 그 사람만 알 수 있기 때문이다.
당사자가 인지하지 못한 일은 전해 들을 수가 없다.
점점 알쏭달쏭하기만 해서
다시 몸에 대한 이야기로 전환하고 싶은 충동이 들었다.
“누구랑 같이 밥을 먹다가도 갑자기 얼굴이 빨개져서…”
“평소에 좀 불편한 점이 있는 상대이신가요? 혹시 그때 무슨 생각을 하고 계셨어요?”
“아니, 전혀. 그냥 서로 아무 말도 안 하고 먹다가 갑자기 또 그러기도 하고.”
함께 마주 앉은 상대와 밥을 먹으며
아무 말도 안 하게 되는 상황을 떠올려 본다.
일단, 상대가 너무나 익숙하고 편안해서
별다른 기운을 쓰고 싶지 않을 수도 있다.
혹은, 뭔가 이야기를 해야 할 것 같은 어색함을 느끼면서도
그 사람과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해야 할지 도무지 떠오르지 않을 때가 있다.
상대에게 더 이상 매력이나 흥미가 느껴지지 않는다고 생각될 수도 있고,
혹은 반대로 내가 상대에게 무료하고 지겹고 따분한 사람으로 느껴질까 봐
불안감을 느낄 수도 있다.
“사람들이 여럿일 때는 어떠세요?”
“그럴 때는 한 번도 그런 적이 없는데… 둘이 있거나 혼자 있다가 얼굴이 빨개지더라고요.”
“혼자 있을 때요?”
“네. 그냥 혼자 있다가 갑자기 얼굴이 빨개져요. 사람이 많을 때는 오히려 괜찮아요.”
설비 가게를 운영하시는 분이다.
하루의 대부분의 시간을 주로 혼자 보내신다고 하신다.
혼자 있을 때 특별히 다른 일을 하시지는 않으신다고 한다.
여러 사람과 어울려 있을 때는 오히려 얼굴이 빨개지는 일이 없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서 즐겁게 시간을 보내고,
반응을 주고받을 때 편안함을 느끼는 분일까?
조용히 자기만의 감성을 즐기거나,
혼자 생각을 정리하는 것에 낯설어 하는 분일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소속된 곳에서 안정감을 느끼고,
집단의 정체성을 자신의 정체성으로 그대로 수용하시는 분 중에
간혹 그런 분들이 있다.
다른 사람이 나를 어떻게 생각하는지에 많은 에너지를 쏟고
타인의 인정을 통해서 만족을 느끼는 사람들이다.
자기 욕망을 표현하기보다는
배려하며, 협조하고, 양보하며 갈등을 줄이고 싶어 하는 사람들은
그만큼 자기의 마음을 들여다보기가 낯설다.
자신의 마음이 자주 의식되면,
주변과 균형과 조화를 이루기가 때때로 어려워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런 삶의 태도를 가진 채,
혼자 남겨지게 되었을 때,
그 사람을 어떻게 자신의 존재를 느껴야 할지 망연하다.
가족을 위해 많은 관심을 쏟으며 지내는데,
배우자나 자녀가 자주 함께해주지 않을 때,
심심하고 서운해하는 모습으로 우리 주변에서 흔히 표현되기도 한다.
그동안 자기가 살아있다는 느낌을 타인을 통해 얻어왔는데,
아무것도 아닌 존재가 되어버린 것 같다는 불안이다.
착하고 배려심 많은 사람이 겪어야 하는 아픔이기도 하다.
“혹시 직원을 고용하실 수는 없는 상황인가요?”
대화 상대가 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어, 상황을 여쭙는다.
그럴만한 규모는 아니라고 하신다.
혼자 있는 시간이 길다는 것이
그만큼 영업 건수와 수입이 적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일지도 모르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어떻게 하지… 고민하다가,
우선 천왕보심단을 권한다.
“일단, 얼굴이 빨개져 오는 것 같을 때,
이걸 한번 드셔보세요. 효과가 있을 거예요.
그리고 혼자 계실 때의 지루함을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그러실 수도 있을 것 같아요.
가게 문 열고, 하루 시작하시면서
오늘 하고 싶은 일을 하나씩 한번 적어 보시는 건 어떨까요?
요즘 유튜브도 재밌는 거 많을 텐데,
관심을 끄는 것들을 한번 적극적으로 찾아보시는 것도 좋을 것 같아요.”
갱년기로 예상하고 오셨는데,
엉뚱한 대화들을 나눈 것에 살짝 의아해하심이 느껴졌다.
그래도 부드러운 성품 그대로 알겠다고 하고 가져가신다.
한 달쯤 지났을까.
사실 무던한 인상 탓에 한눈에 알아 뵙지는 못했다.
별말씀 없이 핸드폰으로 사진을 보여주신다.
“이거 하나 더 주세요.”
약이 마음에 드셨는지,
똑같은 것을 확실히 구매하기 위해 사진을 찍어서 오신 것이다.
“아, 좀 괜찮으셨어요?”
“내가 얼굴 빨개지는 것 때문에 8년 정도 고생을 했는데, 이거 먹고 싹 없어졌어요.”
“와! 정말요?”
살짝 신이 났다.
약효를 믿는 사람은 약이 좋아서라고 할 것이다.
하지만 자신의 증상을 나타나게 했던 상황을 이해하면,
증상이 서서히 사라진다는 말을 믿는 사람은
그렇게 한 번 믿어볼 수도 있을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