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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등 겨울방학, 더 이상 무섭지 않다.

길어도 너무 길다

by 필로니


두 달 방학은 살다 살다 처음 당해(?) 본다. 그래서 우리 가족은 말레이시아 한 달 살기를 계획해 지금 쿠알라룸푸르에 와있다.



주변에서 말레이시아 한 달 살기를 간다고 하면 다들 아이들 어학원 보내는 거냐고 물었다. 혹은 국제학교 프로그램 신청해서 가는 거냐고. 아니다. 그냥 놀러 왔다.



심지어 한 달 동안 지낼 모든 숙소를 다 예약하지도 않았다. 쿠알라룸푸르에서 지낼 일주일, 거기서 또 비행기 타고 들어갈 랑카위 섬에서 보낼 3일, 거기서 또 배 타고 들어가야 하는 태국 꼬리뻬에서의 3일만 예약해 두었다. 그 뒤는 그때 가서 정하기로 했다.



33층에서 보는 뷰가 멋진지 매일 창가에 붙어있는 아이들


8세, 5세 딸들을 데리고 가면서 우연에 맡기는 여행을 한다는 게 조금은 무모할 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그렇게 여행다운 여행을 아이들과도 해보기로 했다. (그래봤자 아이들과 다니는 여행은 한계가 있다. 쿠알라룸푸르에서의 일주일 동안 키자니아, 과학관, 도서관, 맥도날드 다녀왔다. 한국 아님 주의.)



이지성 작가가 아이들과 -영혼없는 관광하지 말고- 하라고 강조하는 문화인류학적 여행(현지인들의 삶에 깊게 녹아드는 여행)까지는 못하더라도 그 나라의 문화를 온몸으로 느끼는 시간을 아이들에게 만들어 주고 싶다.



이미 말레이시아 랑카위 섬에서, 태국의 몰디브라고 불리는 아름다운 리뻬 섬으로 가는 여정 자체가 굉장한 무리다. 블로그에 보면 경로가 '사악하다'라고 표현한다. 젊은 사람 혼자만 가는데도 말이다.




그런데 우리는 캐리어 세 개와 함께 어린아이들을 데리고 간다. 얼마나 고생할지 두렵기도 하다. 하지만 우리 가족은 함께 위기를 극복하며 더 단단해지고 더 행복해질 것을 안다. 아이들도 그 과정에서 어마어마한 성장을 이뤄낼 것이다.






그렇게 1월을 한 달 살기 여행으로 보내고 오면, 또 한 달이 남아있다는 게 정말 놀랍다. 이 대단한 겨울방학 같으니라고.



둘째는 유치원 방과후 과정이라 등원하면 되는데(유치원 만세) 초등학생인 첫째 아이를 우짤꼬.. 하다가 수영 방학특강을 신청했다. 아이가 수영을 좋아하고, 요즘 실력도 부쩍 향상되며 수영의 참맛을 알아가고 있다. 타이밍 좋다.



해외여행 와서도 달리는 엄마. 운동은 정말 중요하다.


친구도 한다고 하니 아이도 흔쾌히 하겠다고 했다. 마침 아이의 겨울방학 원씽을 '운동'으로 하려고 생각했었다. 잘됐다. 월, 수, 금 11시 주 3회를 신청했다.



그리고 여름방학에도 그랬듯이 매일 아침 도서관에 갈까 한다. 아파트 도서관이든, 동네 도서관이든 9시에 무조건 나가는 거다.



둘째 입장에선 자기는 유치원에 가는데 언니는 학교에 안 간다. "왜 나만 유치원에 가?" 하면서 등원 거부를 할 수 있는 가능성이 농후하다.



쿠알라룸푸르 도서관, 여행에 가져온 책들


둘째의 평화로운 등원을 위해, 방학에도 규칙적으로 하루를 시작하기 위해 가족이 모두 나가서 둘째를 배웅한 후 도서관에 가서 하루를 시작하려 한다.



월수금은 도서관 후 수영, 화목은 도서관 후 그 친구와 놀기. 그리고 오후엔 채니가 학원이라 생각하지도 않고 너무나 좋아하는 영어학원. 다녀와서는 숙제와 자유시간.






정리하면, 첫째의 방학은 말레이시아 여행, 수영, 도서관, 영어학원으로 이루어지는 것이다. 이렇게 글로 정리하니 체계가 잡히는 느낌이다. 이 글대로라면 아주 완벽한 겨울방학이다.



하지만, 늘 그렇듯, 아이와 관련한 계획은 뜻대로 흘러가지 않는다. 계획한 일이 물 흐르듯 평화롭게만 펼쳐지지 않는다. 변수가 생길 수도 있다. 아니 100프로 변수는 생긴다. 지독하게 말 안 들을 때도 있을 것이고, 갑자기 아파서 루틴이 다 망가질 수도 있다. 그게 육아지 뭐. 그게 인생이지.



이렇게 계획이 뜻대로 되지 않을 거라는 것과, 아이 역시 내 생각대로 움직여주지 않을 거라는 걸 ‘알고 있기만 해도’ 화가 덜 난다. 우리는 알아야 한다. 아이는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는다는 것을.



뜻대로 착착 잘 움직여주면 그게 더 문제다. 말도 안 듣고, 엄마 아빠 말에 반기도 들고, 이견을 제시하기도 해야 잘 자라는 거다. 미래를 살아갈 아이들이 과거에서 온 엄마 아빠를 넘어서야지, 엄마 아빠의 그늘 안에서만 자라서야 되겠는가. 부모의 그릇보다 훨씬 더 큰 그릇이 될 우리 아이들이라 말도 좀 안 듣고 대들기도 하는 거다.


그래. 너무 타이트하지 않게 책 읽고 놀 시간도 충분하게 방학 계획 잘 짰겠다, 뜻대로 되지 않을 거라는 마음도 장착했겠다, 이제 무시무시한 두 달간의 방학을 잘 보낼 수 있을 것 같다.



겨울방학.

더 이상 무섭지 않다.

(그런데 왜 떨고 있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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