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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경은 Dec 23. 2020

#4 불편한 사실

빼앗긴 아이들

  알지 못하고, 해본 적 없고,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를 때 우리는 불안을 느낍니다. 길을 잃고 헤매는 사람처럼 우왕좌왕 말이죠. 아이들이 봤을 때, 팬데믹을 마주한 어른들의 모습이 그랬을 겁니다. 자신들과 다르지 않구나 하고. 어른들 역시 한 번도 경험해 보지 못한 일이니까요. 지금껏 모르는 게 있으면 부모에게 달려가 물어보고 불안을 잠재웠던 아이들도 팬데믹 앞에 무력한 부모를 보며 매우 두렵고 혼란스러웠을 겁니다. 아이들은 팬데믹이라는 대혼란을 그저 피부로 온전히 경험하는 게 전부였으니까요. 어른들은 뉴스나 인터넷, 책 등 다양한 채널로 자신의 불안을 잠재우려 했고 나름대로 시나리오도 짜고 앞으로를 위해 대비책을 강구했습니다. 그러나 아이들은 어땠을까요?


  아무도 아이들에게 팬데믹이 뭔지에 대해 알려주지 않았습니다. 그저 손을 잘 씻으라고 강조하고, 마스크를 벗으면 안 된다며 무서운 말로 경고만 했습니다. 지금 무슨 일이 일어나고 있는지에 대해 알려주는 어른이 몇 명이나 있었을까요? 


  작년까지도 잘 다니던 학교를 더 이상 갈 수 없다고 하면서, 별안간 e-학습으로 수업을 대체할 때도 아이들은 새로운 환경 변화에 대해 아무런 설명도 듣지 못한 채 그저 치열하게 적응을 해야만 했습니다. 부모를 포함한 어른들은 아이들에게 ‘해야 할 일’만 알려주고, ‘어떻게 하라’ 고만할 뿐, 친절한 설명은 그 어디에도 없었죠. 너무도 불친절한 소통을 하고 있다는 생각 안 드시나요?


  고맙게도 그런 불친절한 어른들의 요구에도 아이들은 누구보다 마스크를 잘 쓰며, 가장 잘 적응하는 모습을 보여줬습니다. 누구보다 솔선수범하고, 모범적으로 말이죠(마스크를 쓰지 않고 방역에 적극 협조하지 않는 어른들의 실태에 대한 뉴스를 보노라면). 


  부모들은 아이들에게 감독처럼 지시를 주로 합니다. 그리고 약속을 지키는 것에 대해 매우 엄격한 태도로 이야기하죠. 아이들에게 끊임없이 숙제 거리를 안겨주며 재촉합니다. “손 씻었어?”, “마스크는 잘 썼고?”, “숙제는 했어?”하고 말이죠. 좀 과격하게 표현하면 마치 빚쟁이에게 돈 갚으라고 하는 사람들처럼 보입니다.


  앞에서 언급했듯이 저 역시도 두 아들의 엄마입니다. 저의 태도 역시 별 다를 바 없습니다. 그래서 더 솔직하게 제 자신에 대해 반성과 책망, 때로는 고개가 절로 돌려질 정도의 민낯을 마주하며 실망하기도 합니다. 특히, 제 언어 패턴에 대해 말이죠. 


  시중에 ‘말’에 대한 부모교육 책이 상당히 많이 출간되고 있고 인기코너에 꼭 자리하고 있는 것을 보면, 저처럼 많은 부모 역시 자신의 ‘말’에 대해 심각성을 느끼고 있는 것도 같습니다. 그러나 비단 언어 패턴의 문제일까요? 단지 ‘말’, ‘언어’로 축소시켜 볼 건 아니라는 생각이 듭니다. 보다 근본적인 것을 볼 필요가 있습니다.  


  내가 과연 우리 아이들을 존중하고 있는가?


  타인에게 존중받는 것에 대해 민감한 우리들이(부모들이) 과연 우리 아이들을 얼마나 존중하고 있는지에 대해서, 우리는 진지하게 생각해봐야 합니다. 아이들을 위해서라고 하면서, 부모의 욕심을 채우려는 책략을 꾀하고 있는 건 아닌지. 부모 자신조차 눈치 채지 못할 정도의 교묘함으로 말이죠.


  아이들이 학교에 가지 못하고, 친구들을 만나지 못하고, 고강도의 사회적 거리두기를 하면서 거의 칩거 수준의 생활을 할 때에도 학원들은 북적였습니다.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특정 종교시설이나 특정 지역에서의 코로나 확진 상황을 제외하고) 가장 많이 확진자가 언급된 곳이 바로 학원이었으니까요. 특히 영어학원이었죠. 


  고등학생인 한 학생이 제게 자신의 핸드폰에 온 문자를 보여준 적이 있습니다. “선생님 그거 아세요? 요즘 학원에서 문자 되게 많이 와요. 이럴 때(코로나로 학교 가지 않을 때) 더욱 학습을 잘해둬야 입시에서 좋은 결과를 얻을 수 있다고요. 다들(경쟁자인 다른 친구들) 쉴 때가 기회라면서”. 핸드폰에 있는 문구는 ‘코로나 특강’이었습니다. 참나! 학교에 가지 않으니 학원에 더 열을 올리는 기이한 현상이 나타난 듯해 보였습니다. ‘안전보다 학습’이라는 건가? 매우 씁쓸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이때다 싶어 부모들의 불안을 부추겨서 극도의 경쟁 구도라는 늪에 빠지게 하는 입시 구조도 속상하게 하는 일이었지만, 이 구도에서 도저히 헤어 나오지 못하는 많은 부모들이 너무도 안타깝게 느껴졌습니다. ‘생계보다도 안전’이 우선인 요즘 같은 시기에 경제도 맥을 못 추스르고 있는데, 여전히 학원가에는 아이들이 북적이는 걸 보면 왠지 모르게 울적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입시’라는 블랙홀에 우리 모두 빨려 들어가고 있어서 어디서부터 어떻게 해야 할지 감도 잡히지 않지만, 분명한 건 고3 입시가 학교도 아직 입학하지 않은 어린아이들의 놀이시간에도 영향을 주고 있다는 건 매우 절망적입니다. 


  남들보다 ‘먼저’, 남들보다 ‘빨리’ 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이 부모의 가장 핵심 불안으로 자리 잡게 되면서, 아이들은 오감각을 동원해 마음껏 놀아야 하는 때조차도 ‘교구 놀잇감’에 둘러싸여 학습에 유인되고 있으니까요.

  아이들의 당연한 권리인 놀이를 빼앗으면서까지 그 시간에 학습으로 채우는 것이 부모가 기대하는 안정된 미래, 성공적인 인생, 만족스러운 삶으로 안내해주는 유일한 길일까요? 저는 의문이 듭니다. 


  어려서부터 선택권이 없고 자유가 없는데 어떻게 아이들이 주도적으로 성장할 수 있을까요? 우리는 말 잘 듣는 로봇을 키우는 것이 아닙니다.


  처음부터 불편한 진실이라고 했던 것처럼, 우리는 이 사실을 마주해야 합니다. 그리고 통렬하게 현재 아이와 부모인 자신의 스탠스를 확인해야 합니다. 저 역시도 부모이기에 아픈 마음을 안고, 함께 고민하길 바라는 것입니다. 적어도 우리 아이들에게 머리만 좋은 괴물처럼 살지 않게 하기 위해, 자기만 아는 이기적인 공공의 방해물이 되지 않게 하기 위해 말이죠. 


  앞으로 어떤 시대가 펼쳐질지는 알 수 없으나, 더욱더 따듯한 감수성을 가진 인간다움이 가장 큰 핵심이라는 건 누구도 부정할 수 없는 일일 겁니다. 옹알이를 하던 아이를 보며 웃음 지었을 그때, “건강하게만 자라면 돼”라고 했던 그때를 다시 한번 기억해 보는 게 어떨까요? 이것이 바로 초심으로 돌아간다는 말 아닐까요?  




p.s. 부득이하게 제가 자꾸 '학습'과 '놀이'를 비교하는 발언을 하게 되지만, 결코 '학습'에 대해 비판적인 것이 아닙니다. 극단의 예를 들려니 어쩔 수 없는 부분이 있음을 미리 말씀드립니다. 간장종지 같은 저는, 글을 쓰면서도 이런 부분에 대한 오해가 생길까 염려가 됩니다. 그래서 덧붙입니다. 어쩌면 저의 변명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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