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출간 후 연재] #07. 난징 리지샹 위안소
내가... 내가 있던 곳이..
바로 여기입니다.
2003년 11월 21일, 중국 난징. 백발이 성성한 한 노파가 떨리는 손가락으로 어딘가를 가리켰다. 모두의 시선이 그곳에 쏠렸다. 이윽고 노파의 눈에서 눈물이 흐르기 시작했다. 모인 이들 모두가 숙연한 표정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곳에는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던 걸까?
평안남도 남포 출신인 그녀는 1939년 중국 난징으로 향했다. "돈을 벌 수 있는 일이 있다"는 일본 순경의 말만 믿고 머나먼 남의 나라 땅으로 향한 소녀 앞에 펼쳐진 것은 지옥도였다.
일본군 위안부(성노예)가 된 소녀는 그곳에서 3년 동안 머물며 하루에 많게는 서른 명의 일본 군인들을 상대해야 했다. 말을 듣지 않으면 일본 병사가 군도를 휘둘렀고 다락방 고문실에서 전라로 체벌을 당했다. 소녀의 나이 불과 17살이었다.
세월이 흘러 다시 찾은 그곳, 이제는 백발이 성성한 노인이 된 소녀는 70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여전히 그 장소를 기억했다. 그 소녀의 이름은 박영심(1921~2006)이었다.
다들 감정이 비슷했나 보다. '난징 리지샹 위안소'를 나온 『임정로드 4000km』 취재팀 4인의 눈시울이 하나같이 붉어졌다. 생각해 보면 분노 때문이기도 했고 미안함 때문이기도 했다.
나라를 잃었다는 이유로, 소녀들은 이곳 난징까지 끌려와 능욕을 당했다. 이 사실을 마주하자, 80년이라는 세월을 뛰어넘어 깊은 자책과 회한이 밀려왔다.
왜 우리는 이렇게 온전히 기록하고
기억하지 못한 것일까?
그때처럼 지금 우리가
나라를 잃은 것도 아닌데,
그때처럼 힘이 없는 것도 아닌데,
무엇이 부끄러워서
당당히 역사적 사실을 자꾸만
왜곡하거나 축소하고,
또 감추려고만 하는 것일까?
그래서 다들 그렇게 눈물이 났나 보다. 살아남은 세대의 미안함과 분노 때문에 말이다.
박영심 할머니의 증언으로 세워진 '리지샹 위안소 유적진열관'
난징 리지샹 위안소 유적진열관(利濟巷 慰安所 舊址陳列館)은 2015년 12월 1일 정식 개관했다.
일제의 성노예 관련 유적지로는 아시아 최대 규모이고, 무엇보다 평안도 출신 박영심 할머니가 이곳 두 번째 건물 19번 방에서 3년 동안 위안부 생활을 했던 곳이다.
2003년 11월 21일, 박 할머니가 현장을 찾아 '내가 있던 곳이 바로 여기'라고 증언하자 중국 정부는 직접 나서서 할머니의 증언과 여러 기록을 바탕으로 난징 한가운데에 유적 진열관을 마련했다. 진열관은 면적 총 3,000㎡ 규모에 약 1,600여 점의 전시물과 680장의 사진이 생생하게 보존돼 있다.
당시 일본군이 난징에서 동양 최대 규모로 위안소를 운영했던 8개 건물 가운데 6곳을 온전한 형태로 복원시켰다. 중국 정부의 결단이 돋보인다.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앞서 언급했듯 총면적만 3,000㎡에 달한다. 이곳은 난징시의 중심에서 걸어서 10분 거리밖에 되지 않는 시내 한복판이다. 말 그대로 난징 한가운데 위치한 금싸라기 땅이다.
지금의 형태로 개관하기까지, 무려 10년이 넘는 긴 시간이 걸릴 정도로 여러 논란이 있었다. 정부와 언론, 지역주민, 부동산 업자들까지 가세해 치열한 논쟁을 벌였다고 한다.
그러나 "역사를 바로 보자"는 결정이 나자, 논쟁을 멈추고 모두 결정을 받아들였다. 결정에 지대한 영향을 끼친 것이 바로 박영심 할머니의 증언이다.
중국 정부는 박영심 할머니의 증언을 토대로, 이후 우리 교과서에도 실린 할머니의 임신한 모습의 동상을 진열관 입구에 세웠다. 할머니가 생활했던 19번 방까지 그대로 복원했다. 중국 땅에 세워진 진열관의 주인공이 우리 동포 소녀였다는 사실에 숙연해지고 미안해진다.
이 지점을 놓치지 말아야 한다. 중국 정부와 난징시는 보존 결정을 내린 뒤, 치욕스러운 역사까지 기억하고 보존하고 있음을 강조하고 있다. 이를 보여주듯 2014년 위안부 유적진열관은 장쑤성(江蘇省) '문물 보호 단위'로 지정됐다. 관람료는 당연히 무료다.
닦아도 닦아도 멈추지 않는 할머니의 눈물
사실 리지샹 위안소 진열관 전체를 관람하기가 쉽지는 않다. 내부 촬영을 금지할 정도로 충격적이고 섬뜩한 내용도 즐비하다. 몇 장의 사진만 훑어보아도 일본이 난징을 점령해 얼마나 참혹한 만행을 저질렀는지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특히 박영심 할머니가 1939년 17살 나이에 일본인 순경에게 속아 난징의 위안소로 끌려왔을 때 머물렀던 2호 건물 19번 방 앞에 서면, 참으로 형언하기 어려운 감정이 일어난다.
할머니가 머물렀던 방에는 작은 화장대와 주전자, 찻잔, 세숫대야, 그리고 낡은 다다미 침상 위에 옷가지까지 그대로 재연돼 있다. 건너편에는 할머니가 리지샹 위안소 생활 이후 중국 윈난성(云南省)으로 끌려가 임신한 채 찍혔던 사진과 전라의 사진도 전시돼 있다.
당시가 1944년이었는데, 미군이 찍은 사진 속 박 할머니는 임신한 모습으로 두려움에 떨고 있다. 박 할머니뿐 아니라 바로 옆 조선 여성들의 모습도 다르지 않다. 다들 지치고 두려운 모습이다. 박 할머니는 "당시 포로수용소에서 아기를 유산했다"고 말한 바 있다.
진열관 내부는 위안부와 관련된 디테일한 증거품들까지 온전한 형태로 진열돼 있다. 특히 일본군에 배포된 '돌격 앞으로'라는 문구가 새겨진 콘돔이 충격적이다.
콘돔 옆에 당시 사용하던 연고 등도 그대로 전시돼 있다. 위안부를 정기적으로 검사했던 신체검사용 틀과 위안부를 훔쳐보는 일본 군인들의 사진까지도 적나라하게 전시하고 있다. 직접 보면 알 수 있다. 우리가 얼마나 외면하고 살아왔는지…….
가장 안타까웠던 건 진열관 끝자락에 자리한 '끝없이 흐르는 눈물'이라는 이름이 붙은 한 할머니의 조각상.
그 아래에는 "그녀의 눈물을 닦아달라"는 문구와 함께 마른 수건이 놓여있다. 리지샹 위안소 진열관에서 할머니의 눈물을 닦아주도록 수건을 준비한 건데, 아무리 닦아도 할머니의 눈물은 멈추질 않는다.
너무나도 비교되는 한국 정부의 태도
다들 기억할 것이다. 2015년 12월 28일, 당시 박근혜 정부는 마치 대단한 결단을 한 것처럼 한·일 일본군 위안부 협상 타결을 발표한다.
일본으로부터 지원금 10억 엔(100억 원)을 받으면서 위안부 문제와 관련해 양국은 "최종적이며 불가역적인 해결을 봤다"고 강조했다. 그러면서 "유엔 등 국제사회에서 위안부 문제로 상호 비난과 비판을 자제한다"고 약속했다.
뒤늦게 이 소식을 접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 이용수 할머니는 "우리가 있는데도 정부가 이렇게 해결해선 안 된다"며 "나라가 없을 때도 아니고, 정부가 이렇게 창피스럽게 해결을 못 하는 것은 아니다"라고 지적했다. 그러면서 이 할머니는 "싸우겠다"고 했다. 1918년생인 이용수 할머니의 연세가 올해로 100세다. 나라를 잃었을 때 위안부로 끌려갔고, 나라가 있을 때조차 모욕당했다.
당시 우리 정부의 선택이 얼마나 졸속이었는지 모른다. 피해자들의 의견은 전혀 고려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중국에서 아시아 최대 규모 리지샹 위안소를 개관할 즈음, 우리 정부가 최종적이며 불가역적이라는 위안부 합의안을 발표했다는 사실이다.
위안부 할머니들의 말처럼 '당시 우리 정부는 대체 어느 국민의 정부였을까?' 묻고 싶을 뿐이다.
중국은 정부가 나서서 피해자들의 증언을 최대한 듣고, 시민들에게 "잊어선 안 된다"며 의무적으로 가르치고 강조한다. 시민들은 이런 현장을 찾아 끊임없이 배우고 나눈다.
반면 과거 우리 정부는 제대로 된 위안부 관련 진열관 하나 없이, 소녀상 하나 세우는 것도 일본의 눈치를 살폈다. 2015년 12월에는 말도 안 되는 협상안을 들고 와 할머니들을 모욕했다.
이 때문에 협상이 타결된 날부터 현재까지 일본대사관 소녀상 옆에서 뜻있는 대학생들이 모여 2년 6개월이 넘도록 노숙농성을 이어가고 있다. 정부가 지켜주지 않으니 학생들이 나서서 할머니들을 지키겠다고 나선 것이다.
취재팀이 가장 안타깝고 아쉬웠던 지점이다. 감추고 없앤다고 사라지는 게 아니다. 아픈 기억일수록 더 기억하고 기록해야 반복되지 않는 것이다. 할머니들의 시간이 얼마나 남지 않았다는 걸, 이대로 할머니들이 가버리면 다 끝나는 것 아니냐고 당시 정부는 생각했던 것 같다.
2018년 7월을 기준으로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이제 28명에 불과하다. 불과 며칠 전, 22세에 고향 통영에서 필리핀 등으로 끌려가 고초를 겪었던 김복득 할머니가 별세했다. 할머니들의 시간은 정말 얼마 남지 않았다.
편집자 주: 책 출간 과정 중이었던 지난 10월 26일에 하점연 할머니가, 12월 5일과 14일에 각각 김순옥, 이귀녀 할머니가 세상을 떠났습니다. 이제 위안부 피해 생존자는 25명 밖에 남지 않았습니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어떻게 갈까
주소: 南京 喜相逢婚礼主题会馆 (남경 희상봉혼례주제회관)
난징 지하철 2호선과 3호선이 동시에 통과하는 ➊ 대행궁역(Daxinggong/大行宫站) 1번 출구로 나와야 한다. 출구를 나와 뒤를 돌아 200m 정도 걸어가면, 1933년 김구 선생이 장제스 총통과 회담하기 위해 머물렀던 ➋ 중앙반점이 있다.
중앙반점을 뒤에 놓고 건너편을 바라보면 <Bank of China>가 있다. 중앙반점에서 건너편에 위치한 은행을 좌측에 놓고 걸어 내려가면 골목 끝자락에 ➌ <리지샹 위안소 유적 진열관> 정문이다. 입구로 향하는 길목에 박영심 할머니의 동상과 위안부 할머니들의 사진을 모아놓은 벽면을 확인할 수 있다.
리지샹 위안소에 들어가면 영어가 어느 정도 가능한 중국 관리인이 나오는데, QR코드를 스캔해 우리말 설명을 들을 수 있는 방법을 안내한다. 다소 복잡하게 설명하는데, 각 장소별로 QR코드를 스캔하면 한국어로 된 설명을 들을 수 있다는 이야기다.
주의사항 및 팁
리지샹 위안소 유적 진열관은 상당한 규모를 자랑한다. 전시물도 매우 꼼꼼하고 사실적이다. 하나하나 자세히 살펴보면 시간이 꽤 걸린다. 취재팀의 경우 오후 1시경 입장해 문을 닫는 오후 4시 30분까지 머물렀다. 그래도 다 둘러보지 못했다. 감정적으로 상당히 힘든 상황을 연달아 마주해야 하므로 전시를 보면서 마음을 다독일 시간이 필요했다. 일정을 여유 있게 잡고 진열관을 둘러보자.
입장할 때는 반드시 신분증이 필요하다. '여권'을 미리 준비하자. 진열관 안에서는 사진 촬영이 금지다. 처음에는 왜 그럴까 생각했는데, 다 보고 나오니 자연스레 알게 됐다. 그만큼 충격적인 장면들이 많다.
※ 운영시간 : 09:00 –16:30 (일/월/공휴일 휴관)
※ 신분증 필수, 입장료 없음
2019년 3.1 혁명 및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 기념작
국내 최초 대한민국 임시정부 순례길 가이드북『임정로드 4000km』
"일생에 한 번은 '백범의 계단'에 서라!"
이 책은 국내 최초 임시정부 순례길 여행가이드북이다. 중국 상하이에서부터 충칭에 이르기까지 임시정부 요인들이 활동했던 지역을 그대로 따라가며 기억 속에 묻힌 장소를 꺼내어 소개한다.
대한민국이 탄생한 '상하이 서금이로'부터 영화 <암살>, <밀정>의 약산 김원봉이 독립군을 훈련시켰던 '난징 천녕사' 등 임시정부 사적지를 소개하며 독자들이 직접 찾아갈 수 있도록 안내한다.
"걷지 않는 길은 사라진다." 역사의 진실이 아무리 귀중해도, 기억하지 않는다면 소용없을 것이다. 20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수립 100주년을 맞이하여 떠나는 임정로드 여행은 치열했던 우리 역사를 기억하는 가장 특별한 방법이 되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