최초의 SF소설이자 수학소설로 유명한 영국 작가 에드윈 A.애벗의 『플랫랜드』.
지금까지는 'SF소설의 고전', '20세기 물리학자들의 극찬을 받은 수학소설', '영미권 명문대 학생들의 필수 교양서' 등으로 많이 주목 받은 책입니다.
그러나 이 책은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사회적 불평등을 '차원'에 빗대어 신랄하게 풍자한 사회비판소설이기도 합니다. 모든 것이 납작한 2차원 평면 도형의 세계인 플랫랜드에서, 구성원들은 성별과 사회적 신분에 따라 도형의 형태가 결정됩니다. 변과 각이 많을수록 가장 높은 계급을 상징합니다. 그래서 동그라미는 가장 높은 성직자 계급을 가리킵니다. 하지만 최하층 계급인 여성의 경우 각조차 없는 '변'으로 묘사됩니다. 이를 통해 당대 영국의 여성 인권이 얼마나 열악했는지 엿볼 수 있습니다.
탁자 위에 바늘 하나를 올려놓아 봅시다. 그런 다음 탁자의 표면에 눈높이를 맞추어 옆에서 바늘을 보세요. 그러면 바늘의 전체 길이가 보이겠지요. 이번에는 바늘 끝 방향에서 보세요. 점 하나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지 않을 겁니다.
우리 플랫랜드 여자들의 모습이 바로 이렇답니다. 여자들이 우리를 향해 측면을 돌리면 우리에게는 여자들 모습이 하나의 직선으로 보입니다. 여자들 때문에 우리가 얼마나 위험에 노출되어 있는지는 이제 스페이스랜드의 가장 우둔한 사람도 분명히 알 수 있을 정도죠. 중간 계급의 점잖은 삼각형의 각이라고 해서 위험하지 않다고는 할 수 없어요. 노동자 계급과 부딪치면 깊은 상처를 피할 수 없고, 군인 계급의 장교와 충돌한다면 심각한 부상이 불가피해요. 하급 병사의 꼭짓점은 스치기만 해도 죽음의 위험으로 벌벌 떨게 되지요.
그러니 양끝이 모두 뾰족한 여자와 부딪친다면 그 자리에서 완전히 끝장나지 않겠어요? 게다가 여자가 눈에 보이지 않는다면, 아니 흐릿하고 희미한 점만 간신히 보인다면, 아무리 주의를 기울인다 해도 매번 충돌을 피한다는 게 얼마나 어렵겠습니까!- 『플랫랜드』27p.
양쪽이 뾰족한 바늘로 묘사되는 여성은 플랫랜드 안에서 매우 위험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잘못 다가가면 찔려 죽을 수도 있지요. 플랫랜드에서는 이러한 위험을 피하기 위해 여성을 규제하고 억압하는 다양한 법령을 만듭니다.
1. 모든 집은 동쪽 방면에 여성 전용 출입문을 설치해야 한다. 모든 여성은 '품위 있고 공손한 태도'로 이 문으로만 출입해야 하며, 남성 전용 출입문이나 서쪽 방향의 문을 이용해서는 안 된다.
2. 모든 여성은 공공장소를 지날 때 계속해서 평화의 소리를 내야 하고, 이를 어길 경우 사형에 처한다.
3. 어떤 여성이든 무도병이나 발작, 심한 재채기를 동반한 만성 감기, 기타 비자발적 동작이 불가피한 질병을 앓고 있다는 것이 공식적으로 인정되는 경우 즉시 처분될 것이다.
이렇듯 여성에 대한 지나친 폄하 탓에 소설이 발표된 직후, 작가를 '여성혐오자'로 비판하는 독자들의 의견도 쏟아졌다고 합니다. 하지만 당시 『플랫랜드』 편집자는 1884년 개정판 서문에서 작가를 여성혐오자라 낙인 찍는 것은 잘못됐다고 반박합니다.
작가가 『플랫랜드』에서 여성을 바늘로 묘사했던 의도는 여성을 폄하하려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여성이 차별 받는 당대 영국의 현실을 그대로 드러냄으로써 여성 인권 문제에 대한 관심과 개선을 촉구하려 했던 것입니다.
소설 『플랫랜드』가 출간된 해가 1884년이니 올해로 벌써 출간 135주년이 됩니다. 지금 사회적으로 이슈가 되는 페미니즘 열풍을 생각해보면, 작가는 이미 135년 전에 이 책을 통해 페미니즘을 이야기한 셈입니다. 작가의 선구적 혜안에 그저 감탄이 쏟아집니다.
스페이스랜드의 독자들에게는 우리 나라 여자들 상황이 굉장히 비참해 보이겠지요. 사실 그렇습니다. 가장 낮은 신분인 이등변삼각형 남자들은 각의 수를 늘리면 마침내 천한 신분에서 승격될 수 있을 거라고, 얼마간 기대라도 해볼 수 있어요.
하지만 여성이라는 성으로는 누구도 그런 희망조차 가질 수 없습니다. "한 번 여자면 영원히 여자"라는 것이 자연의 명령이에요. 게다가 진화법칙은 여자에게 불리한 상태에서 멈춰버린 듯합니다. 하지만 신의 섭리는 얼마나 지혜로운지, 감탄하지 않을 수가 없어요. 덕분에 여자들은 희망이 없는 만큼 떠올릴 기억도 없고, 앞일을 기대하고 숙고하는 일이 없는 만큼 고통과 굴욕도 느끼지 않으니까요. 여자라는 존재에게 필연적이기도 하고 플랫랜드 헌법의 기반을 이루는 것이기도 한 고통과 굴욕 말입니다. -『플랫랜드』34p.
이쯤 되면 『플랫랜드』를 최초의 SF 페미니즘 소설이라고 불러도 손색이 없을 듯합니다.
필로소픽에서는 『플랫랜드』 원전 뿐만 아니라 『플랫랜드』에 담긴 사회적·역사적·수학적 의미를 주석으로 풀어낸 『주석 달린 플랫랜드』를 출간한 바 있습니다.
『주석 달린 플랫랜드』는 미국수학협회와 케임브리지 대학교가 공동 기획한 책으로 『플랫랜드』에 대한 저명한 수학자의 상세한 주석과 밀도 높은 해설이 돋보이는 책입니다.
주석과 해설은 유클리드 기하학에서 현대 수학에 이르는 방대한 자료와 다양한 도해로 소설에 나타난 개념들과 배경지식을 꼼꼼하게 설명해내고 있습니다. 또한 문장마다 숨어있는 고대 그리스와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문헌, 셰익스피어 작품 등 서양의 고전 텍스트를 읽는 재미가 있습니다. 『플랫랜드』 의 행간 속 숨겨진 의미가 궁금하다면 『주석 달린 플랫랜드』와 함께 읽는 것을 권합니다.
책 읽기 좋은 독서의 계절 봄을 맞아 『플랫랜드』와 『주석 달린 플랫랜드』를 한 번 읽어보는 것은 어떨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