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무루 MuRu Dec 26. 2015

생각도 느낌이다

이렇게 프레임을 바꾸면 많은 것이 달라진다.

만약 생각도 느낌이라고 본다면?


보통 우리는 몸의 오감과 그리고 정서적 기분(감정)을 '느낌'이라고 한다. 몸의 오감은 확실히 느낌이다. 감정은 몸의 오감보다는 좀 더 미세하지만 이 역시 느낌으로 친다. 그런데 생각은 어떤가?


보통 '생각은 생각'이라고 하며 느낌과는 다른, 뭔가 추상적이지만 좀 더 절대적이고 의미 있는 것으로 여긴다. 그런데 만약 '생각도 느낌이다'라고 보면 많은 게 달라질 수 있다. 감정보한 층 더 미세한 느낌인 것이다.


말하자면, 우리의 뇌는 몸의 '오감, 정서적 반응, 생각' 이 세 가지느끼고(지각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다.

(* 불교에서는 '근경식 삼합'이라고 해서 '감각 기관인 근, 감각 대상인 경, 감각 인식인 식' 이렇게 3가지 영역을 나누는 모델을 사용해서 상세히 살피기도 한다. 즉 '안이비설신의'의 육근에 각각 '색성향미촉법'의 육경을 설정해, 6번째 감각인 '의(식)'과 그 감각 대상인 '법'을 대응 시킨다.)


'오감'의 경우는 몸의 감각 기관이 감각한 것을 뇌가 반응 및 해석하면서 느끼는 것이고, '감정'의 경우도 몸과 몸 안에서 일어나는 여러 미세한 자극과 변화들을 뇌가 반응 및 해석하면서 느끼는 것이라면, '생각'의 경우는 뇌의 추상적인 의식 활동 자체를 뇌가 해석하면서 느끼는 것이라 할 수도 있겠다.(여기서 말하는 '해석'은 '느낌을 인식하는 의식적 행위'이다. 언어적으로 구체적일 수도 있고 비언어적으로 추상적일 수도 있다. 물론 구체적으로 이야기하면 '생각'은 뇌신경망에 흐르는 신경적 신호라 할 것인데, 그 앞의 오감과 감정도 '신경적 신호'인 것은 동일하다.)




그런데 새삼 '생각도 느낌이다'는 관점을 취하는 게 어떤 효용성이 있을까? 그렇지 않은 경우와 비교해서 무슨 이점이나 좋은 점이 있겠느냔 말이다. 만약 그런 게 없다면 굳이 이렇게 볼 이유도 없다. 왜냐하면 '생각이 느낌이다'라는 것은 어떤 과학적 주장이나 학문적 주장이 아니 그저 하나의 '새로운 관점의   활용'일뿐이기 때문이다.


보통 우리는 생각은 뭔가 감각적인 느낌과는 다르고, 뭔가 절대적인 것 같고, 뭔가 확고한 것이라 여긴다. 그래서 생각 즉 '가치관, 신념, 인간관, 세계관, 종교관, 믿음, 앎' 등에 기반해서 아주 심각한 일들을 저지르기도 한다.


생각을 긍정적으로 사용할 때는 사실 별 문제가 없다. 하나의 유용한 도구로 활용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자신의 생각 혹은 어떤 생각을 절대시 하거나 전부로 여기면서 그를 바탕으로 혐오나 분노, 싸움 그리고 슬픔이나 불안, 공포, 무기력 등 부정적 과정과 결과들을 과도하게 만들어 내는 경우이다.


이에 반해서, 감각이나 느낌 즉 몸의 감각과 정서적 느낌 등은 그 느낌 자체야 실제적이고 구체적이지만 '생각'만큼 심각하고 여기거나 절대적으로 삼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느낌'이라는 것은 기본적으로 일어났다 스러지는 것이고 그리고 상황에 따라 얼마든지 변할 수 있는 것임을 잘 알기 때문이다.


다른 말로 하면 느낌은 일어났다 스러지는 것이지만, 생각은 느끼는(일어나는) 순간 우리는 무의식적으로 '이 생각이 사실이고 절대이다'라고 여기면서 뇌리에 '각인(도장 꽝!)'이 되는 것이다. (이 '각인에 의한 영구화'가 핵심이기도 하다)


물론 오감과 정서의 느낌도 사실은 아주 강렬하며 특히 그것이 고통이나 부정적인 경우는 당연히 심각하게 취급하고 또 대응도 하고 처리도 해야 한다. 그리고 강렬한 느낌 때문에도 여러 심각한 문제들이 발생하기도 한다. 하지만, 그 경우에 문제를 심각하게 만드는 것은 그 느낌들  자체라기보다는 그에 수반해서 일으키는 '심각한 생각'들인 경우가 많다. 우리는 애초의 그 오감과 정서적 느낌들이 문제라고 여기지만 사실은 그에 덧씌워지는 '생각'들이 문제가 되는 것이다.




생각도 느낌이다.


생각은 어떤 절대적인 것이 아니다. 이 역시 우리의 의식 혹은 뇌가 뭔가를 포착(감각)하는 '느낌'이다. 그 포착되는 건 아주 미세한 '정신적 흐름'이라 해 볼 수 있겠다. 혹은 요즘 말로 하면 '뇌신경망에 흐르는 일련의 신경적 신호의 흐름'이라 해도 되겠다. 그걸 감각해서 구체화시킨 것이 생각인 셈이다.


그런데 '느낌'은 항상 생겨났다 스러진다. 고정적이지 않다. 다만 '고정적이다'는 믿음만 있을 뿐이다.


필요하면 당연히 '생각'을 최대한 세밀하고 정확하고 냉철하고 효율적으로 사용해야 하지만, 만약 그 생각(즉 그 미세한 의식적 느낌)이 뭔가 부정확하거나 틀렸다면 혹은 효용성이 별로 없다면, 그러면 그 생각을 절대적으로 붙들고 있을 필요가 없다. 마치 우리가 몸의 불필요한 오감이나 감정을 지나 보내듯이.


생각을 느낌으로 보면 이렇게 뭔가 가벼워지고 유연해질 수도 있다. 이러한 가벼움과 유연함이 이 프레임의 효용성이고 목적이다.


물론 이런 관점을 어떻게 받아들이고 어떻게 활용할 것인가는 각자의 고유한 선택이다.




이제


이 글을 읽고난 지금,

가만히 앉아 눈을 감고

자신에게 '떠오르는' 생각들을

하나의 느낌으로 대하며

가만히 '느껴보자'.


마치 몸의 오감과 감정을 느끼듯.


그 생각들을

굳이 의식에 '각인' 시키지도 말고.


그래서 그 생각이 지나가든 남아있든

둘 다에 상관 없이 있어 보는 것이다.


이런 것이 진정한 명상 중에 하나라 할 수 있다.


(그리고, 그런 가운데 삶에서 해야 할 것들은 능동적으로 다 한다.)

매거진의 이전글 '많이 안다'는 것은 지식의 양의 문제가 아니다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